시민사회단체들, 정부·재벌 노동법 개악에 맞서 노동운동과 연대
한국 노동운동 역사상 최초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벌이는, 본격적인 총파업까지 예고됐던, 지난 해 12월 중순의 노동법 관련 대치정국은 개악된 노동법의 국회 상정이 연기되면서 일단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으로 봐서 이는 단지 파국의 시간을 유예한 데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재벌들은 노동자들에게 양보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한 발자국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으려 하고 있고 정부는 그저 재벌들 편일 뿐인데, 위기가 해소될 리 만무하다. 안기부법 개정문제까지 겹쳐져서 올 겨울은 그 어느 해 겨울보다도 땀내 나는 겨울이 될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이 재벌, 자본가들의 제일의 원군인 보수언론들은 이 싸움이 마치 경영자 집단과 노동자 집단이라는 두 ‘특수한’ 집단 사이의 밥그릇 싸움인 듯이 비추고 있다. 마치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소위 ‘시민들’만 고생이라는 식으로. 더 나아가서는 위기의 한국경제를 살리려는 경영자 집단의 고매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기적인 이익에만 몰두하는 우매한 노동자 집단이라는 구도까지 그려내곤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그 시민들이란 누구인가? 그들 자신 공무원 및 교사의 단결 금지, 정리해고제와 변형시간 근로제, 파견 근로제의 피해대상이 되는 ‘피고용자’들이 아닌가? 혹시 있을지 모를 총파업 국면에서 지난 94년의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 파업에서 나타난 ‘선량한 시민들의 불만’을 다시 한번 재현시키기 위해 눈코뜰 새 없는 보수언론으로서는 이런 진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시민’의 이름으로 시민의 권리가 압살당하는 이 불가사의한 풍토를 뒤엎고자 우리 시민사회 내의 민주적인 역량을 대표하는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바로 그 ‘시민’의 이름으로 노조운동과의 연대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민주적 노사관계와 사회개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가 그것이다. 현재 여기에는, 건강사회를 위한 보건의료단체 대표자회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실천불교전국승가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진보정치연합, 전국노동단체연합,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한국노동운동협의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동조합기업경영분석연구소, 노동정책연구소,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한국노동청년연대, 전국철거민연합, 전국노점상연합, 진보민중청년연합, 장애인한가족협회, 사회개혁운동연합,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30여 개 단체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시민단체간에도 이견은 있어

물론 시민사회운동단체들 사이에서도 노동법 개혁과 관련해 몇 가지 이견들은 있다. 가령 범대위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의 경우, 노동력 이용의 유연화 문제에 있어서는 경영상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고려한 상태에서 노사간 타협을 이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변형시간근로제’의 경우, ‘1개월 단위로 특정 주에 56시간 범위 내에서 변형시간 근로를 가능케 하라’는 경총 등의 주장에는 반대하지만, ‘2000년 안에 법정 근로시간을 40시간으로 단축한 이후에야 변형시간 근로제를 도입할 수 있다’는 노동계의 입장에도 의견을 달리해, ‘1개월 단위로 특정 주에 8시간 범위 내에서 노동시간의 유연화를 도입하자’는 제안을 내세우고 있다. ‘파견근로제’에 대해서도, 법제화에 전면 반대하는 노동계의 입장과는 차별되게 ‘심도 있는 연구조사를 전제로 장기적으로 도입하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집단적 노동관계법 개정에 있어서도 미묘한 이견들이 있어서, 가령 경실련의 경우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문제나 공무원 및 교사들의 단체교섭권 인정 문제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은, 제3자 개입 금지나 복수노조 금지 같은, 민주사회에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악법들을 발악하며 지켜내려는 자본가들의 구태나 이들에게 끌려다니는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에 대해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기본적인 공통 지향을 바탕으로 이들의 목소리가 앞으로 다시 등장할 노동관련 위기국면에 어떠한 역할을 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해 12월에는 일단 위기가 유예되면서 이들의 역할도 크게 두드러지지는 못했는데, 가령 진짜 총파업이 벌어졌을 때 이들이, 지난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 파업 때 ‘무조건 화해’를 주장함으로써 사실은 그렇게 중립적이지 못했던 시민운동 지도자들의 행동과는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일단 범대위가 꾸려져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으로도, 더 이상 시민의 이름으로 시민사회의 기본적 민주주의를 농락하려는 짓이 쉽게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깨인 시민들의 결의를 보여주기에는 벌써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손설화 자유기고가
1997/01/01 00:00 1997/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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