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이 세계를 시장으로 한 책방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을 듯하다. 한국에도 아마존과 비슷한 알라딘이라는 책방이 있다. 실제 사회에 공간을 확보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책을 파는 이른바 ‘인터넷 서점’. 요즘 사람들은 이런 사이버 책방에서 책을 많이 산다. 책값을 10~50%까지 깎아주는 것은 물론 한발도 움직이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수많은 책 목록을 그와 관련한 평문 등 소개글까지 훑어보고 주문해 배달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난 아직 이런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본 적이 없다. 디지털 문화에 둔감한 ‘아날로그형 인간’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선 개인정보보호가 부실한 전자상거래를 100% 신뢰할 수 없는 현실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책방을 어슬렁거리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책방에 책이 진열되는 방식, 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건 책읽기 못지 않은 흥미거리다. 그래서 한 주에 한 차례는 책방에 간다. 책방은 세상의 변화를 읽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더군다나 난 기자 아닌가? 가끔은 책방에서 기사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대체로 내가 사려는 책은 책방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이 안팔리는 책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내 중심가의 큰 책방에서 실용서나 이른바 베스트셀러를 잘 보이는 곳에 중복 진열하는 건 당연한 일인 듯 싶다. 사람이 수련이 부족해서인지 조갑제 씨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사가는 사람과, 구석에 처박힌 『혁명의 시대, 1980년대』 같은 책을 사는 사람을 같은 느낌으로 대하기가 어렵다. 솔직히 그 사람이 그 책을 왜 사가는지도 모르는데…. 지독한 편견이다.

각설하고, 이달에는 계간 『역사비평』 통권 50호(2000년 봄호) 발간 기념 별책으로 나온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역사비평사 펴냄, 9000원, 이하 ‘논쟁100년’)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한반도-한민족의 지난 20세기 100년을 56건의 논쟁점을 화두 삼아 재정리하고 있다. 책은 △일제식민지 시기 △해방~1960년대 △1970년대 이후 등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선 ‘개화파 사상과 근대국가 건설론’에서 시작해 △‘대한제국’ 평가 논쟁 △을사조약 ‘불성립’론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 원칙이 미친 파장 △일제시기 단군논쟁 △신사참배와 우상숭배 등 모두 20건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2, 3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성이 탄탄하다. 2부에선 △우익의 반탁 주장과 좌익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지지 △한국전쟁기 도강파와 잔류파 △북한에서의 노동조합 독자성 논쟁 △이승만과 한글간소화 파동 △베트남 파병 △고속도로와 지역불균등 발전 등 21개 논쟁을 재조명한다. 3부에선 △‘한국적 민주주의’와 유신체제로 시작해 ‘박정희 신드롬’으로 끝날 때까지 15건을 소개하고 있다.

중견·소장학자는 물론 현장 운동가까지 각 분야의 전문가 52명이 필자로 참여한 『논쟁 100년』은 각 논쟁마다 평균 원고지 35장이라는 한정된 분량만을 제공하고 있지만, 글은 밀도가 무척 높다. ‘해방직후 민족문학 논쟁’을 집필한 홍정선 인하대 교수는 규정 분량의 두배에 가까운 원고지 60장을 써놓고는 일주일 동안 글을 줄이려다 포기했다니, ‘책장 뒤켠에 처박혀 있던 문건들을 구태여 뒤적여야 하는 번거로운 수고’를 감내하며 아픈 기억을 곱씹었을 필자들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책을 꼼꼼히 읽는 게 좋겠다.

난 70년대 이후를 다룬 3부부터 읽었다. 1985년 대학에 입학했던 나로선 어쩌면 이런 선택은 본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난 경험주의자는 아니지만, 체험의 무게가 실로 엄청나다는 점은 인정한다. 대학이라는 곳이 고교시절 영화 <얄개시대>에서 본대로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미팅하고 돈생기면 술마시고 노는 그런 곳으로 알던 내게 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와 한국의 대학사회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6월 항쟁 시기 NL-CA 논쟁’을 읽는다. ‘남한사회의 괴뢰정권은 직선제를 받아들일 만한 개량의 물적 토대가 없기 때문에 직선제 슬로건을 이용해 미국의 식민지 재편음모의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는 NL파의 정세인식과 운동전략이나, 87년을 ‘혁명을 예고하는 시기’로 규정하고 ‘파쇼하의 개헌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를 외쳤던 CA파의 그것은, 지금 되돌아보면 얼마나 낯설고 조악한가? 그러나 난 학교와 거리에서 ‘데모’를 하고, 밤새 술마시며 무엇이 옳은지 토론했던 20대의 한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필자인 이용기씨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현실의 모순을 깨뜨리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논쟁하고, 또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NL-CA 논쟁”기의 그 모든 벗들을 사랑한다. 87년 겨울 그 뜨거웠던 비판적 지지·후보단일화·독자후보론의 논쟁을 거쳐 구로구청 한 구석에서 전해들었던 대통령 선거 결과. 그때의 처참했던 심정과 함께 역사의 냉혹함에 대한 뒤늦은 자각은 여전히 힘겹다.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이라지만, 책을 읽을수록 ‘지난 100년 동안 한국사회에 논쟁은 있었던가’, ‘한국사회에서 논쟁이라는 게 가능했었던가’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논쟁은 때로 죽음을 의미했다.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은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던 진보당수 조봉암 선생만은 아니었다. 50년대 북한에서 노동조합 독자성과 균형발전론을 주장했던 이들은, 주장의 합리성 여부와 무관하게 어느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곤 김일성 주석의 ‘유일사상’이 한반도 북쪽을 지배했다. 남이나 북이나 비주류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논쟁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걸어야 했던 시대, 그게 바로 우리의 지난 100년이었다.

또 하나 책에 담긴 56건의 논쟁은 모두 ‘근대(국가) 구성’의 과제와 밀접히 연결돼 있는 것들이다. 탈근대와 포스트모던, 개인의 다양성이 운위되는 ‘문화폭발의 시대’이자 ‘정보통신혁명의 시대’인 지금, 이건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점에서 『논쟁 100년』이 ‘박정희 신드롬‘으로 끝맺고 있는 건 상징적이다.

복잡다단하고 곡절 많았던 지난 100년을 56건의 논쟁으로 재조명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않아도, 책에는 해방 후 남한사회의 우울한 진로를 예언했던 ‘반민특위와 친일파 청산’ 문제나, 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사회구성체 논쟁’ 같은 굵직한 쟁점들이 빠져 있다. 그럼에도 『논쟁 100년』은 20세기 한국사회 논쟁을 최초로 종합 정리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각별하다.

3월 16일 현재 『논쟁 100년』은 교보문고 등에서 3주째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4,5위에 올라있다. 초판 2500권이 다 팔렸다. 10만 단위를 훌쩍 뛰어넘는 그 흔한 베스트셀러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편집진은 조금 흥분한 상태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일도, 3주 만에 초판이 다 나간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논쟁 100년』은 1만 권 이상 팔릴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독자들은 더 많은 20세기 역사가 담긴 『논쟁 100년』 개정 증보판이라는 ‘편집진의 선물’을 곧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훈 『한겨레』기자
2000/04/01 00:00 2000/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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