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에서 여성활동가로 산다는 것
2000/2000년 04월 :
2000/04/01 00:00
책임자 없어? 없으면 남자직원 바꿔!
하루에도 몇십 통씩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거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점잖은 목소리로 공동대표를 찾거나 아니면 사무실에서 제일 높은 사람(?)사람을 찾는다.
공동대표는 상근을 하지 않고, 사무처장도 부재중일 경우가 많으니 용건에 대해 말씀을 하시라고 하면 곤란한 목소리로 주저하며 “저, 그러면 남자직원은 없나요?” 이쯤은 점잖은 편이다. 여성 실무자가 전화를 받으면 이야기중 반은 반말이고, 직책을 이야기해도 매번 ‘아가씨’ 아니면 ‘○양’이다.
“아가씨하고는 할 얘기가 아니고, 책임자 없어? 없으면 남자직원 바꿔!”
“제가 책임잡니다. 저한테 말씀하세요.” 라고 좋게좋게 전화를 끝내고 난 후에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거꾸로 솟아오른 혈압이 영 삭지를 않는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실무자의 비율을 보면 여성실무자가 반 이상이다. 어떤 곳은 80%를 넘어서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100% 여성일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보여질 때는 남성실무자가 훨씬 많은 것으로 보인다. 소위 말하는 주요부서는 거의 남성실무자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요부서에 대한 의견의 차이도 있을 수 있으며, 각 단체별로 똑같은 기준이 적용될 수도 없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간에 신체적 차이 이외의 특수한 성질의 차이가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개개인의 자질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여자’라는 조건 때문에 고려되어진다면 그것은 과히 기분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2~3년 전에 전국단위로 조직되어 있는 모단체에서 여성간사 모임이 있었다. 초기단계에만 전해 들어서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여성간사 모임에서 주장했던 내용 중 하나가 ‘한 명의 여성사무국장 만들기’였다. 물론 실력있는 여성실무자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기존의 일하고 있던 실무자는 배제되고 외부에서 사무국장이 영입되는 사례가 대부분인 시민단체의 사정으로 볼 때 이런 주장이 영 터무니없는 주장만은 아닌 듯 싶다.
여성실무자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나 자신만 보더라도 과다한 업무를 핑계로 정치적 사안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하지 못한다. 행사가 있을 때도 뒷전으로 스스로 물러나 뒷치닥거리를 한다거나 수줍음을 핑계로 남성실무자의 등을 떠다 밀 때가 많다.
하지만 생활의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함께 보내고 있는 동료 남성실무자들조차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 때는 ‘여성실무자들이여, 단결하라!’ 깃발이라도 꽂고 싶은 심정이며, ‘시민단체마저도’ 라는 회의감이 든다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내가 근무하고 있는 단체에서는 ‘주번제’를 실시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명씩 돌아가며 주번을 정하고 그 주번은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손님접대도 한다. 청소, 설거지, 커피타기 등의 일은 업무 이외에 부가된 여성실무자의 또 다른 업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성을 배려(?)하는 남성실무자의 제안으로 주번제를 실시한 지 벌써 2년을 넘어선다.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서로 협력하고 배려한다면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우리의 구호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먼나라 이야기인가? 멀리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 주 주번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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