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속질주와 무단횡단
2000/2000년 04월 :
2000/04/01 00:00
난 요즘 무단횡단을 많이 한다. 저 멀리 있는 횡단보도 앞으로 걸어가 얌전히 푸른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건너는 게 아니라, 길가 가까운 곳 아무데서나 자동차보다 더 빨리 건널 자신만 있으면 냅다 뛴다는 말이다. 교통순경에게 걸리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는 더 위험한 사태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로 인한 모든 책임은 내가 져야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함부로 길을 건너는 이유는 간단히 ‘억하심정’이라는 말로 간추릴 수 있다.
자동차 없이 살기 때문에 나로서는 건너다닐 기회가 훨씬 많다. 자동차가 주는 편리함을 부정할 수 없지만 아직은 걸어다니는 게 훨씬 자유스럽고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걸어다니는 즐거움을 가장 맥빠지게 만드는 것이 횡단보도이다. 그 신호등 앞에 서서 기다리다 보면 걷던 즐거움의 맥이 탁 끊어지고 만다. 내 힘으로 걷던 나의 의지가 강압적으로 꺽여버렸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보행자 신호는 언제나 왜 그렇게 늦게 들어오나? 십자 방향과 좌회전 방향까지 모든 자동차들이 지나간 다음 겨우 파란 신호를 얻어 길을 건너려고 하는 찰나! 그것도 마음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신호를 읽을 수 있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예외없이 몇 대의 자동차가 쌩 횡단보도를 마구 달려가 버린다.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운전자는 얌체족이 아니라 더 강경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치를 떤다. 살인미수나 뭐 그런 말로. 게다가 파란불은 들어오자마자 깜박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기회를 줬으니 빨리 건너라고 등떼미는 식으로.
그러다가 결국 무단횡단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자동차가 신호를 지키지 않는데 내가 왜 생명을 걸고 신호를 비켜줘야 하는가. 횡단보도 앞에서 하 세월을 기다려본들 파란불이 보행자의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나를 처벌하려는 교통경찰에게 난 이렇게 퍼부어댈 작정이다.
사실 오랫동안 영국에 살면서 너무 보행자로서 떠받들여져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교외 한적한 동네는 물론이고 교통이 복잡하다는 런던 시내에서조차 보행자는 원하면 언제든지 자동차보다 미리 길을 건널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그런 장치도 있었다. 보행자가 엠비 신호등(전등불이 깜박거리면서 횡단보도임을 알려준다) 앞에 서있기만 하면 차들은 당연히 멈춰서기 마련이다. 혹은 버튼 장치가 된 신호등이 있어 보행자가 신호를 조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전자의 입에서 ‘엄청난 교통체증’ 운운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면서 거의 모든 도로는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를 위해 존재한다. 특히 우리나라 도로는 더욱 그러하다. 도시계획이 잘된 곳은 그 곳대로, 아니면 좁은 도로는 또 그대로 길의 주인은 보행자가 아니라 언제나 자동차라는 것이다. 눈치껏 길을 걸어가다 보면 자동차들이 ‘걸어다니기 불편하면 너도 차를 사라니까!’ 하고 소리치는 것 같다.
내가 비록 무단횡단 상습범이긴 하지만 초등학교 다니는 딸 아이 앞에서는 그럴 배짱이 없다. ‘꼭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고 신호를 잘 봐라’라고 타이르는 모범 학부형이니. 그 대신 꼭 한 가지를 덧붙인다. ‘운전자를 믿지 마라, 차가 멈춘 것을 본 다음 건너. 파란불이라고 그냥 건너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건널 때 따라 건너.’ 이 말을 잊고 아이를 길에 내보낸 날은 노심초사다. 아이가 푸른 신호를 맹신할까 봐. 난 정말 더 이상 스커트를 움켜 쥐고 길을 함부로 건너는 무법자가 되기 싫다. 아이에게 남을 믿지 말라는 소리도 하기 싫다. 그리고 운전자들을 증오하기도 싫다. 운전자가 자신의 푸른 신호를 지키는 일이 정녕 그다지도 힘들단 말인가?
자동차 없이 살기 때문에 나로서는 건너다닐 기회가 훨씬 많다. 자동차가 주는 편리함을 부정할 수 없지만 아직은 걸어다니는 게 훨씬 자유스럽고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걸어다니는 즐거움을 가장 맥빠지게 만드는 것이 횡단보도이다. 그 신호등 앞에 서서 기다리다 보면 걷던 즐거움의 맥이 탁 끊어지고 만다. 내 힘으로 걷던 나의 의지가 강압적으로 꺽여버렸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보행자 신호는 언제나 왜 그렇게 늦게 들어오나? 십자 방향과 좌회전 방향까지 모든 자동차들이 지나간 다음 겨우 파란 신호를 얻어 길을 건너려고 하는 찰나! 그것도 마음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신호를 읽을 수 있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예외없이 몇 대의 자동차가 쌩 횡단보도를 마구 달려가 버린다.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운전자는 얌체족이 아니라 더 강경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치를 떤다. 살인미수나 뭐 그런 말로. 게다가 파란불은 들어오자마자 깜박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기회를 줬으니 빨리 건너라고 등떼미는 식으로.
그러다가 결국 무단횡단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자동차가 신호를 지키지 않는데 내가 왜 생명을 걸고 신호를 비켜줘야 하는가. 횡단보도 앞에서 하 세월을 기다려본들 파란불이 보행자의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나를 처벌하려는 교통경찰에게 난 이렇게 퍼부어댈 작정이다.
사실 오랫동안 영국에 살면서 너무 보행자로서 떠받들여져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교외 한적한 동네는 물론이고 교통이 복잡하다는 런던 시내에서조차 보행자는 원하면 언제든지 자동차보다 미리 길을 건널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그런 장치도 있었다. 보행자가 엠비 신호등(전등불이 깜박거리면서 횡단보도임을 알려준다) 앞에 서있기만 하면 차들은 당연히 멈춰서기 마련이다. 혹은 버튼 장치가 된 신호등이 있어 보행자가 신호를 조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전자의 입에서 ‘엄청난 교통체증’ 운운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면서 거의 모든 도로는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를 위해 존재한다. 특히 우리나라 도로는 더욱 그러하다. 도시계획이 잘된 곳은 그 곳대로, 아니면 좁은 도로는 또 그대로 길의 주인은 보행자가 아니라 언제나 자동차라는 것이다. 눈치껏 길을 걸어가다 보면 자동차들이 ‘걸어다니기 불편하면 너도 차를 사라니까!’ 하고 소리치는 것 같다.
내가 비록 무단횡단 상습범이긴 하지만 초등학교 다니는 딸 아이 앞에서는 그럴 배짱이 없다. ‘꼭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고 신호를 잘 봐라’라고 타이르는 모범 학부형이니. 그 대신 꼭 한 가지를 덧붙인다. ‘운전자를 믿지 마라, 차가 멈춘 것을 본 다음 건너. 파란불이라고 그냥 건너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건널 때 따라 건너.’ 이 말을 잊고 아이를 길에 내보낸 날은 노심초사다. 아이가 푸른 신호를 맹신할까 봐. 난 정말 더 이상 스커트를 움켜 쥐고 길을 함부로 건너는 무법자가 되기 싫다. 아이에게 남을 믿지 말라는 소리도 하기 싫다. 그리고 운전자들을 증오하기도 싫다. 운전자가 자신의 푸른 신호를 지키는 일이 정녕 그다지도 힘들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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