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만능주의에서 생명의 윤리로

이승은(모피코피반대캠페인)

“이제 모피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부끄러워 해야합니다. 모피가 더 이상 품위의 상징이 아닌 야만과 허영의 상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 말입니다.”

롯데백화점에 보낸 이승은(대원여고 2) 학생의 편지이다. 이전까지 먹고, 입고 하던 것까지 바꿔야한다고 한다. “내 돈을 내가 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던 황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을 야만과 허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일축한다. 왜? 자신의 품위를 갖추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말이다.

모피코트반대캠페인에 참여하게 된 동기?

“백화점에서 붙인 모피 바겐세일 광고지를 봤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그쳐선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환경연합에 전화를 해 동참하게 되었다.”

앳띤 얼굴. 수줍음을 탄 듯한 웃음. 그러나 신중한 한 마디, 한 마디는 아이의 말이라고 치부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재미환경운동가 대니 서가 쓴 책을 보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최근의 생활은 어떤가, 물어봤더니 명동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모피반대캠페인이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승은은 매일 가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나면 어김없이 간다고. 앞으로도 모피반대운동은 꾸준히 계속 할 생각이다.

앞으로 개학하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학교에서 환경동아리를 만들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하겠다. 학교에서 친구 한 명이 자기도 환경에 관심이 있노라고 찾아오기도 했었다. 캠페인에 친구들도 많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빈부격차.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복지정책도 미흡하다고 본다.”

승은은 모피반대캠페인을 하면서 빈부격차를 더욱 많이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모피코트를 사지 말자고 외칠 필요도 없다. 한편에서는 생존권 문제도 절실한 사람도 많은데 무언가 사회 구조 자체가 아구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학생이다 보니 자신이 받는 교육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심지어 친구들조차 “너는 매스컴도 타서 서울대 특차는 문제 없겠다”고 해서 너무 황당했다고. 한국 교육은 도대체 왜 대학입학에 목숨을 거는가? 답답함을 토로했다.

“얼마 후에 뉴질랜드로 공부하러 갈 예정이다. 수능시험을 준비하려고 보내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그 시간에 필요한 영어 교육과 뉴질랜드의 환경정책 및 운동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환경운동단체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한계를 많이 느꼈다. 모피 생산과 유통과정에 대한 지식 없이 모피를 사지말자고 외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나 치밀한 조사에 근거해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계란으로도 바위 깨뜨릴 수 있다

김민수(서울대 미대 전교수)

다음에 만날 사람은 서울대 김민수(미대 산업디자인과) 전교수이다. 바꿔의 화제자들을 만난다는 빌미로 기자도 모든 것을 다 바꿔라는 생각으로 한 마디 하려 하니 잠시 참아주길. 교수재임용, 그 허구에 대해선 이미 여러 차례 봐왔지만 대학당국의 일방적인 힘의 논리를 더 이상은 못참겠다. 누누히 스승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학문적 정직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자가 다른 스승을 짓밟아버리는, 말도 안되는 작태를 보아왔다. 누구는 서울대를 상대로 한 김교수의 17개월 남짓한 법정싸움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한다. 바위를 부수려 아무리 계란을 던져봐도 소용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계란을 던지면 바위도 깨진다”는 말도 있다. 팔힘으로만 불가능하다면 그런 기계를 발명한다는 생각으로 그의 외로왔지만, 이긴 싸움을 봐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학생들이 쓴 “김민수 교수의 연구실이 강제로 철거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길”이라는 대자보가 붙어진 그의 연구실로 함께 가보자.

“재임용탈락의 근거? 첫째 나는 디자인 평론과 이론을 주로 하는 학자이다. 디자인은 응용학문이다. 그러다보니 철학, 과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학문을 오가며 중첩된 영역으로, 학제간 연구를 해왔는데 50년동안 쌓여온 미대의 학문 풍토와 충돌한 것 같다. 둘째 96년 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초기원로 교수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했었다. 거론하고 싶지 않더라도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그후 그는 학장실까지 불려가서 반성을 하라는 지시까지 받았다. 그는 “이런 방법이 아니라 동일한 심포지엄을 열어 문제제기와 비판을 하라”며 거부했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재임용탈락의 근거이다. 학교측 입장은 3차례의 심사에서 모두 연구실적 미달이었다는 것이 이유. 이것은 심사가 객관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태주는 증거이지 탈락의 근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재임용에 필요한 연구실적물의 4배인 8편의 논문을 제출했었다. 또한 그의 논문은 세계학계에서 인정받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래도 연구실적 미달? 미달된 사유는 없었다. 오로지 학교측에서는 미달되었다고만 할뿐. 누가 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 대목에서 재판부마저 “심사위원들은 재임용 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평가했다는 점만을 주장할 뿐, 구체적인 탈락이유를 대지 못했다”고 학교의 재임용제도의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학교에선 이번 행정소송에서 패했음에도 항소를 하겠다고 나섰다.

“(피식 웃음)반성은 커녕 지금 학교 안팎으로 갖은 루머와 모함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인간성이 어떻다느니, 논문을 표절했느니. 홍세화 씨가 예전에 서울대에서 강연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회는 뻔뻔하면서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라고.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서울대를 상대로 한 싸움을 두고 다들 비관적 전망을 했다고 들었다.

“중이 절간이 싫으면 떠나라고 하는데 이젠 절간을 고쳐야될 때가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의 민주화 단위가 더욱 촘촘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 윗층의 부조리도 극에 달했지만 일상생활 속엔 더 많은 부조리가 감춰져있으면서 더욱 견고하다.”

냉소를 넘어 비판적 대안 제시해야

김정환(총선시민연대 청년참가단)

정치권 관행을 바꾸고자 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크다. 총선시민연대라는 극약적인 처방에 국민들의 박수소리도 요란했다. 호응하는 것을 넘어서 격려 전화 및 직접 성금을 전달하는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들은 직접 참여하겠다고도 모여든다. 청년참가단의 임시대표를 맡고있는 김정환(고려대 정경학부 2)씨를 만났다.

실제로는 대학 2학년이라는 학년보다는 나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원래는 93학번으로 성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었다. 그때 학생운동을 하면서 한계를 많이 느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느낌. 그래서 제대로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군에 다녀와서 다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총선시민연대에서는 어떻게 자원활동을 시작했는가?

“처음에는 참여연대 활동을 위해 왔다. 그때가 1월 2일쯤이었을 것이다. 참여연대 내에 의정감시국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정감시국 일이 총선시민연대 일과 맞물려있어서 자연스럽게 총선시민연대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청년참가단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여러 부류가 있는데 총선시민연대 참가 단체에서 온 학생들도 있고, 많은 수는 총선시민연대 홈페이지에서 대학생 자원활동가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개인적으로 찾아온 경우이다.” “현재는 총선시민연대에서 보조업무를 하고 있다. 앞으로는 청년참가단의 독자적인 사업계획을 가질 것 같다. 우리가 스스로 안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총선시민연대에서 지원을 받을 생각이다. 장점이라면 젊은 유권자층에게 우리가 조금 더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어 부담감은 없는가?

“자료조사팀에서 자원활동을 했다. 물론 자원활동이고 지시된 자료만 모으면 되는데 그 자료를 바탕으로 낙천자 명단을 만든다는 생각에 부담이 있었다. 잘못된 정보를 제공해서 사람들이 검토하고 명단을 만들 때 전체의 누가 되지않을까 많이 긴장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을텐데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에 대해 나름대로 역사적인 의미부여와 개인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두고있다면?

“우리 윗세대는 복잡한 정치환경과 생활고를 경험하면서 정치에 대한 환멸과 염증을 느끼고, 젊은 세대들은 냉소와 비난만 남아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에 인터넷이 보급이 되고 시민운동이 확산되면서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이 유권자의 정치 참여를 호소하는 역사선상에 있는 것 같다. 술자리에서의 정치가 한 걸음 나간 참여의 정치로 바뀌고 있다고 할까? 기존의 냉소는 날카로운 비판이 되고, 그 비판은 긍정적인 비전제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귀에 걸린 귀걸이가 반짝였다. ‘나이가 되면 적당히 따라야 할 규범’의 암묵적인 틀을 깨뜨리고 싶은 바람에서 귀를 뚫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보다 유연하게 사고하고 다른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인생 철학? 있다면 나 자신이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떳떳해야 자신감이 생기고 남을 진정으로 배려할 수 있을 것이다.”

타성과 관성에 빠진 자기 채찍질

최준영(바꿔 노래 작사·작곡)

최준영(33세) 씨는 바꿔 노래의 작품 사용 허가권을 한국대중음악작가연대에 일임하고 잠적했다. 핸드폰 번호까지 바꾸고 언론과의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겠다며 선언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는 인터뷰를 응했다.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있는 ‘바꿔’ 노래를 만든 그의 진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이번에 작가연대에 소속했다고 들었다.

“사회적인 파장이 이렇게 커질 줄 예상하지 못했다. 갑자기 언론과 정치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다보니 혼자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 어가 다르듯이 일이 너무 커져 잘못했다간 큰 실수를 범하거나 오해를 낳을 것 같아 작가연대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연대나 총선시민연대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작가연대가 지향하는 바를 믿었고, 그것이 곧 시민의 힘과 연결된다고 봤다.”

거의 신문지상에 알려지지 않아 그의 소개를 덧붙이자면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난 뒤 김건모의 ‘스피드’, 룰라 ‘날개 잃은 천사’, 디바의 ‘왜 불러’, 코요테 ‘순정’ 등 다수의 히트곡을 대중앞에 선보인 바 있다.

히트의 비결이라도 있나?

“대중음악이란 사람들이 쉽게 접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이어야 한다. 대중음악이 대중들에게 외면되고, 불려지지 않는다면 논리에 맞지 않는다. 대중가요가 깊이가 없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높인 다음에 의지를 가지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재즈에 심취해있다. 그러나 직업적으로 음악을 하다보니 하고싶은 것만 할 순 없다. 음악에 대한 공부도 독학으로 했다. 대중음악은 이론이라기 보다는 감각이고 경향이다.”

대체로 창작의 소재는 어떻게 찾는가?

“우리 나라에서는 모든 창작물에 대한 사전심의제도가 있다.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음악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알게 모르게 있는 사회적인 제약이 많다. 심의에 걸려 방송을 못한다면 대중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한다. 그러다 보니 그 소재에서 맴돌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한 다음에 평가를 해야하는데 모든 것을 제한해두고서는 잣대질만 하려드니 안타깝다. 또한 물리적인 가위질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테두리 안에서 묵시적으로 용인되는 제약들이 있다. 그런 압박감에서 보다 자유로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낙선대상자만 아니면 로고송으로 사용할 수 있고, 개사도 직접 해줄 예정이라고?

“물론 내 음악을 사용해준다면 좋지만 그래도 내가 만든 것인데 지역감정에 악용되거나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들고 싶진 않다. 예를 들어 지금 정권을 빗대어 ‘전라도 다 바꿔‘라는 식으로 악용된다면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차원 나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도움을 주려하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책임이기도 하죠.

“물론 내 음악에 대한 책임이다.”

바꿔라는 가사는 어떻게 쓰게 되었는가?

“첫 번째는 이정현이라는 가수의 프로듀서를 하면서 가수가 지닌 카리스마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세지를 담은 정서와 이정현 가수가 지닌 카리스마를 접목시키고 싶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곡을 준비할 무렵 만드는 곡마다 히트를 하자 나 스스로 나태해진 경향이 있었다. 나부터 반성하면서 무언가를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으로도 IMF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치품 수입도 많아지고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정치인들은 서로 남의 탓으로 돌리는 걸 보니 좋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강하게 바꿔라고 사회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새천년인데 달력만 바꿀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도 바꿔보자는 생각에서 바꿔라는 제목부터 정해놓고 가사를 썼다. 의도는 나부터 바꾸어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고, 그것이 의미가 커져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왔다.”

마지막으로 자기관리가 철저한 것 같다고 얘기해줬더니 그는 “그런 편이다”라고 대답했다. 항상 아침 6시나 7시에 일어난다는 그는 자기에게 붙여진 “딴따라”라는 꼬리표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보다 공공성과 공인이라는 자각이 있어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기 안의 관성에 빠지지않으려는 그의 반성이 바꿔라는 곡을 쓰게 된 것이다. 그것이 만인의 공감을 얻고 사회적 의미로 다가온 비결이었다.
윤정은(참여사회 기자)
2000/03/01 00:00 2000/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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