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9일부터 10일 양일간 시민단체, 노동단체, 환경단체 중 각 하나의 단체를 선정하여 기록관리 실태를 조사했다. 단체 실명을 거론할 경우 각 단체의 이미지 손상 우려가 있어 ‘가’, ‘나’, ‘다’로 약칭한다.

문서번호, 원칙이 없다

기록을 생산하는 데 유의할 점은 어떤 원칙에서 문서번호를 부여하는가 하는 점이다. 문서번호는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그 안에는 기록을 생산한 출처의 명시, 문서의 내용을 담은 주제, 혹은 기능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체로 각 단체의 문서번호는 ‘실·국명+년도(혹은 실·국에 부여한 번호)-일련번호’로 구성돼 있었다. 단순히 기록을 생산한 출처와 그 해에 생산된 일련번호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관리에 있어서는 걸음마 수준인 셈이다.

문서의 생산과 처리과정을 제어할 수 있는 목록 대장의 경우, ‘가’를 제외한 나머지 두 단체는 일정한 원칙 속에 시행되고 있었다. 즉 ‘나’와 ‘다’는 총무부 담당자의 통제 아래 문서의 수신과 발신이 이뤄지고 있고 각 파일의 첫 면에 생산목록대장을 작성하고 있어 부분적으로 양식만 수정하면 될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나’의 경우 총무국의 작은 책상 위에 수·발신 목록대장을 비치해놓고, 필요시 작성토록 하고 있었다. 바쁜 업무와 적은 인력으로 전담자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름대로 기록의 유통과정을 통제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의 경우, 생산목록은 극히 부분적으로 작성되고 있으며, 발송과 수신문서의 경우에는 목록대장이 작성되는 경우를 볼 수 없어 문서의 작성과 접수·발송이 모두 담당자에 의해 무작위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생산 접수된 문서의 파일링은 상당히 불량한 편이다. 특히 각 파일의 규격이 통일되지 못하고, 파일의 이름표인 라벨도 ‘가’만이 통일되어 있으며, ‘나’와 ‘다’는 새로운 라벨 양식을 통일해야 하는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문서관리의 전반을 통제할 수 있는 관련 규정의 경우, ‘가’와 ‘나’는 독자의 규정을 가지고 있지만, ‘가’의 경우 문제가 제기되면 관련규정을 만들어 내는 정도이고, ‘나’는 정관 가운데 문서의 생산, 접수·발신, 편찬, 보존기간, 폐기에 관한 6개항의 간략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다. 반면에 ‘다’의 경우 현재까지 관련규정조차 제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창고에서 귀중한 자료가 썩는다

생산된 문서의 정보 재활용은 중간보존 단계에서부터다. 주로 독립된 공간의 확보, 이관 및 분류와 정리의 원칙여부, 그리고 영구 보존 대상 기록에 대한 평가선별 기준의 확립여부가 주요 점검 대상이었다.

모든 단체가 독립된 공간은 아니지만, 활용이 끝난 기록을 보관하기 위한 캐비넷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시기, 즉 사업종료 직후나 매년 연말, 혹은 연초에 문서관리 담당부서의 주관 아래 총무국으로 이관한다. 그러나 이관된 기록에 대한 분류와 정리를 위한 기준은 물론 영구기록의 평가선별 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실정이다. 특히 오랜 활동기간을 가지고 있는 ‘가’와 ‘다’의 경우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중요 기록이 상당량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평가 선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영구보존단계는 더 이상 활용되지 않는 기록을 대상으로 하며 기록이 지닌 역사적 가치 때문에 적절한 시설을 갖춘 독립공간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가’와 ‘다’의 경우, 중요기록은 1년간의 활동백서 혹은 CD에 저장된 형태로 보존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이제 영구기록에 대한 평가선별의 필요가 제기되고 있는 단계였다. 그러나 보존된 기록을 손쉽게 이용하기 위해 검색을 위한 색인목록이나, 관리 시스템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활용의 가능성이 제한된 죽은 기록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또한 기록의 체계적 관리를 담당하는 전담자를 둔 단체는 하나도 없었다. 물론 ‘다’의 경우 단체의 성격과 관련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실을 확보하였고, 그 곳에서 일부 영구 기록을 관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학적 기록관리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조사를 통해 드러난 시민단체의 기록관리 시스템은 아주 열악한 상태다. ‘정보화 시대’라는 말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 쌓아두고 있는 자료와 재활용되지 않고 방치된 정보들이 시민운동의 선진화를 가로막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18세기 정치 ∙ 경제 ∙ 사회상 담긴

기록문화의 정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義軌)


“서울에 사는 김차봉은 540일 반나절을 장안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북동돈대, 배수문에서 돌을 다듬었다. 김중세는 296일 동안 남수문에서 돌을 다듬었다…이들에게 조비(지출 비용 명세)로 지출된 곡물은 쌀이 4632石 9斗 2升 8合 6夕. …큰돌 한 개의 무개가 1만 2천근인데 불과 30명 밖에 안되는 장정으로도 아차하는 사이에 쉽게 힘이 쓰여 한사람이 400근의 무게를 들어올린다”『화성성역의궤』

조선후기 르네상스의 주역이었던 정조는 즉우 13년인 1789년 7월 양주 배봉산(현 시립대 뒷산)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지 영우원을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 일컬어지던 수원 화산 아래에 이장하고 화성 새도시를 건설하였다. 새도시 건설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794년 1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80만냥이라는 막대한 재정을 들여 전장 6km의 성곽을 완공하였다.

한편 성곽 축조가 끝난 뒤 정조는 ‘또 하나의 성곽’을 남겨놓았다. 1796년부터 5년간에 걸쳐 성곽 축조과정을 상세히 담은 9편의 『화성성역의궤』를 편찬, 정조 사후인 순조 원년에 총 9권의 책으로 간행 ∙ 반포되었다. 2년 반 걸린 성역 기간에 두배에 달하는 시간을 투자하여 기록했던 것이다.

책에는 중요 시설물의 내 ∙ 외부 설계도, 각종 석재, 기와, 나무 등 건축자재, 공사 책임자와 노동자의 수, 공사경비 등은 물론 성곽건축 과정에서 생산된 모든 기록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즉 성역에 관한 보고서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18세기의 정치, 경제, 사회상을 상세히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의 역할도 하고 있다.

1800년 정조의 갑작으런 죽음으로 그가 품었던 원대한 이상은 물거품이 되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 화성성곽은 옛 영화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러나 지난 1972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세계인이 함께 보존해야 할 대표적 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리고 성곽 복원 과정에서 『화성성역의궤』가 얼마나 정교한 기록인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라창호 성균관대 박사수료, 한국기록관리학 교육원 졸업
2000/03/01 00:00 2000/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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