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천재 반 고흐와 민중의 벗 빈센트 사이에서
2000/2000년 03월 :
2000/03/01 00:00
Vincent van Gogh. 그는 누구인가? 미술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조용필씨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도 등장하는 ‘고호’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게다. 지금 그는 ‘대중스타’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과 극적으로 엇갈리는 좌절과 고독의 삶이 힘없는 민중의 정서를 자극한 탓일까. 전문가들은 그 엇갈림의 발원지를 ‘광기의 천재’ ‘태양의 화가’ ‘정열의 화가’ ‘야성의 화가’ 등의 수사가 말하듯 ‘광기’와 ‘야성’에서 찾았다. 이런 평가는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고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그는 왜 고흐를 빈센트라 부르는가?
엄밀히 말해 그는 20세기 작가가 아니다. 1857년에 태어나 1890년 죽었으니 19세기 사람이다. 살았던 시대 뿐만 아니라 생전의 삶 또한 20세기 최고 화가로 꼽힌 피카소와 많이 다르다. 그는 평생, 아니 28살부터 죽기까지 10년동안 1천2백50여점의 유화와 1천점 이상의 소묘를 그렸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팔린 그림은 「의자와 담뱃대」 단 한 점뿐이다. 그것도 아주 헐값에. ‘저주받은 영혼’이 세상을 뜬 뒤 상황은 급반전했다. 이제 그의 그림은 ‘부르는 게 값’이다. 「해바라기」는 1987년 4억 달러에 팔렸고, 「의사 폴 가셰의 초상」은 1990년 경매사상 최고가인 8천2백50만달러에 팔렸다. 이런 극적 반전은 기적인가, 장삿꾼들의 사기인가.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국내 첫 평전이라 할 「내 친구 빈센트」를 쓴 박홍규 영남대 법대 학장이 긴 여행의 출발점으로 오베르 공동묘지를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학생 시설 빈센트 반 고흐에 매료됐던 한 소년은 30여년 동안 가슴 속에서 곰삭여 온 독특한 색채와 향으로 빛나는 ‘빈센트 반 고흐’론을 마침내 세상에 펼쳐놓는다.
지은이는 빈센트 반 고흐를 통상적인 약칭 ‘반 고흐’ 또는 ‘고흐’라 하지 않고 ‘빈센트’라 부른다. 왜? 빈센트 반 고흐 자신이 그렇게 불리길 원했기 때문에. “앞으로 카탈로그에 기록될 내 이름은 캔버스에 서명한 것처럼 반 고흐가 아니라 빈센트라고 해야겠다. 이곳 사람들은 반 고흐라는 발음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1888년 3월24일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나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약칭을 ‘빈센트’라 정한 게 ‘반 고흐’라는 발음이 어렵다는 이유뿐일까. 지은이는 자문자답한다. “무엇보다도 친한 사람끼리 첫 이름을 부르듯이, 그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그냥 빈센트라고 서명하지 않았을까?” 「내 친구 빈센트」의 빈센트 반 고흐 묘사가 지금까지 나온 100여종 이상의 평전과 상당히 다를 것임을 예고하는 부분이다.
지은이는 우선 빈센트 반 고흐 신화의 심원한 자양분으로 일컬어지는 ‘광기’와 ‘정열’과 ‘천재’라는 규정을 자신의 친구로부터 분리해낸다. 생전에 동생 테오 등 지인들에게 보낸 800여통의 편지에서 작품 구상·제작·평가, 동시대 미술계 조류에 대한 냉정한 평가 등을 펼쳐보인 빈센트를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한 화가는 일찍이 없었고 뒤에도 없었다”고 평가한다. 빈센트는 몹시도 이성적이었지, 대책없는 감성이나 정열, 광기와는 무관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빈센트를 ‘민중의 아픔을 담고자 한 소박한 사회주의자’이자 톨스토이식 비폭력주의를 선호한 ‘민중의 벗’이라 재규정한다.
빈센트는 왜 예쁜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가?
낯설기는 하지만 무리한 규정은 아니다. “사람들이 노동자나 농부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그만큼 더 기쁘다. 그리고 나 자신은 그 이상으로 흥미 있는 것을 모른다.” “부르주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100년 전 제3계급이 다른 두 계급에 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하다.” 빈센트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빈센트는 전도사로 목회활동을 펼쳤던 벨기에 보리나주 지방에서 「어깨에 삽을 메고 있는 사람」 「광부들」 「광부들의 귀가」 「석탄자루를 짊어진 광부들」 「절망」 따위의 그림을 그렸다. 화상과 교사, 서점상, 전도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최종적으로 화가의 삶을 살게 된 결정적 전환점이 19세기말 자본주의의 참상을 극적으로 드러낸 탄광촌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직공」(1884),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 「낡은 구두」(1886) 등도 이런 내면의 예술적 표현인 셈이다.
그를 흔히 세잔,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3대 거장으로 꼽곤 하지만, 그는 동시대의 인상파들과 많은 것이 달랐다. 인상파 화가들이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급부상하고 있는 도시의 첨단 인물들에 주목했던 반면, 빈센트는 주로 시골과 프롤레타리아층을 화폭에 담았다.
“한장의 그림을 보고 흥미를 느낄 때 나는 언제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진다. ‘이 그림을 걸어 효과가 있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어떤 집, 어떤 방의 어떤 장소일까? 또 어떤 사람의 가정일까?’” 빈센트의 편지에 실린 이 구절은 왜 그가 당대의 주류적 흐름이었던 ‘예쁜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지, 미인화나 역사화, 풍속화를 그리지 않았는지 짐작케 한다. 유럽 최고의 국제적인 화랑에서 화상으로 수년간 일했던, 그리하여 그림의 유통체계에 대해 어떤 화가보다 밝았던 그가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자화상을 그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화, 또는 일각의 오해와 달리 그는 인간미가 넘치는 따뜻한 사람이었고, 균형잡힌 이성의 소유자였다. 다음 편지글을 보자. “완전하고도 배타적인 인상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무엇인가에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밝은 색채는 인상파를 통해 진보했다. … 그런데 거의 색채를 갖지 않은 밀레는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남겼던가! 배타성을 없애주는 점에서 광기는 축복받아야 한다.” “만일 인상파 사람들이 스스로 원시인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분명히 그들은 그들에게 어떤 권리를 부여하는 칭호로서 ‘원시인’이라는 말을 제시하기 전에 좀더 ‘인간’으로서 원시인이 되는 것을 배우는 쪽이 더 좋을 것이다….”
이쯤되면 빈센트의 그림을 관통하는 하나의 뚜렷한 특징인 ‘화염’의 젓줄을 ‘광기’에서 찾을 수는 없게 된다. 지은이는 이와 관련해 “장담컨대, 자유정신이야말로 그의 삶과 예술의 핵심이다”라고 단언한다. 그 자유는 물론 삶과 역사와 진실과 체제와 민중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고, 빈센트의 삶의 화두이기도 했다.
인간 빈센트, ‘20세기 천재화가’ 반 고흐의 정신을 찾아가는 길이, 아다시피 박홍규 교수가 개척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사의 맥락에서 지은이의 길안내와 본인의 증언에 기대어 “언제나 모자랐고 약했으며 슬펐”던 그러나 무엇보다 (보통) 사람을 사랑했던, 빈센트를 만나는 일은 색다르고 즐겁다.
난, 평생 사랑을 갈구했으나 외롭게 살다 죽어간 빈센트의 이말이 특히 좋다. “친구가 되는 것, 형제가 되는 것, 그래, 사랑이야말로 감옥을 여는 열쇠이다.”
그는 왜 고흐를 빈센트라 부르는가?
엄밀히 말해 그는 20세기 작가가 아니다. 1857년에 태어나 1890년 죽었으니 19세기 사람이다. 살았던 시대 뿐만 아니라 생전의 삶 또한 20세기 최고 화가로 꼽힌 피카소와 많이 다르다. 그는 평생, 아니 28살부터 죽기까지 10년동안 1천2백50여점의 유화와 1천점 이상의 소묘를 그렸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팔린 그림은 「의자와 담뱃대」 단 한 점뿐이다. 그것도 아주 헐값에. ‘저주받은 영혼’이 세상을 뜬 뒤 상황은 급반전했다. 이제 그의 그림은 ‘부르는 게 값’이다. 「해바라기」는 1987년 4억 달러에 팔렸고, 「의사 폴 가셰의 초상」은 1990년 경매사상 최고가인 8천2백50만달러에 팔렸다. 이런 극적 반전은 기적인가, 장삿꾼들의 사기인가.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국내 첫 평전이라 할 「내 친구 빈센트」를 쓴 박홍규 영남대 법대 학장이 긴 여행의 출발점으로 오베르 공동묘지를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학생 시설 빈센트 반 고흐에 매료됐던 한 소년은 30여년 동안 가슴 속에서 곰삭여 온 독특한 색채와 향으로 빛나는 ‘빈센트 반 고흐’론을 마침내 세상에 펼쳐놓는다.
지은이는 빈센트 반 고흐를 통상적인 약칭 ‘반 고흐’ 또는 ‘고흐’라 하지 않고 ‘빈센트’라 부른다. 왜? 빈센트 반 고흐 자신이 그렇게 불리길 원했기 때문에. “앞으로 카탈로그에 기록될 내 이름은 캔버스에 서명한 것처럼 반 고흐가 아니라 빈센트라고 해야겠다. 이곳 사람들은 반 고흐라는 발음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1888년 3월24일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나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약칭을 ‘빈센트’라 정한 게 ‘반 고흐’라는 발음이 어렵다는 이유뿐일까. 지은이는 자문자답한다. “무엇보다도 친한 사람끼리 첫 이름을 부르듯이, 그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그냥 빈센트라고 서명하지 않았을까?” 「내 친구 빈센트」의 빈센트 반 고흐 묘사가 지금까지 나온 100여종 이상의 평전과 상당히 다를 것임을 예고하는 부분이다.
지은이는 우선 빈센트 반 고흐 신화의 심원한 자양분으로 일컬어지는 ‘광기’와 ‘정열’과 ‘천재’라는 규정을 자신의 친구로부터 분리해낸다. 생전에 동생 테오 등 지인들에게 보낸 800여통의 편지에서 작품 구상·제작·평가, 동시대 미술계 조류에 대한 냉정한 평가 등을 펼쳐보인 빈센트를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한 화가는 일찍이 없었고 뒤에도 없었다”고 평가한다. 빈센트는 몹시도 이성적이었지, 대책없는 감성이나 정열, 광기와는 무관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빈센트를 ‘민중의 아픔을 담고자 한 소박한 사회주의자’이자 톨스토이식 비폭력주의를 선호한 ‘민중의 벗’이라 재규정한다.
빈센트는 왜 예쁜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가?
낯설기는 하지만 무리한 규정은 아니다. “사람들이 노동자나 농부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그만큼 더 기쁘다. 그리고 나 자신은 그 이상으로 흥미 있는 것을 모른다.” “부르주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100년 전 제3계급이 다른 두 계급에 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하다.” 빈센트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빈센트는 전도사로 목회활동을 펼쳤던 벨기에 보리나주 지방에서 「어깨에 삽을 메고 있는 사람」 「광부들」 「광부들의 귀가」 「석탄자루를 짊어진 광부들」 「절망」 따위의 그림을 그렸다. 화상과 교사, 서점상, 전도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최종적으로 화가의 삶을 살게 된 결정적 전환점이 19세기말 자본주의의 참상을 극적으로 드러낸 탄광촌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직공」(1884),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 「낡은 구두」(1886) 등도 이런 내면의 예술적 표현인 셈이다.
그를 흔히 세잔,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파’의 3대 거장으로 꼽곤 하지만, 그는 동시대의 인상파들과 많은 것이 달랐다. 인상파 화가들이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급부상하고 있는 도시의 첨단 인물들에 주목했던 반면, 빈센트는 주로 시골과 프롤레타리아층을 화폭에 담았다.
“한장의 그림을 보고 흥미를 느낄 때 나는 언제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진다. ‘이 그림을 걸어 효과가 있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어떤 집, 어떤 방의 어떤 장소일까? 또 어떤 사람의 가정일까?’” 빈센트의 편지에 실린 이 구절은 왜 그가 당대의 주류적 흐름이었던 ‘예쁜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지, 미인화나 역사화, 풍속화를 그리지 않았는지 짐작케 한다. 유럽 최고의 국제적인 화랑에서 화상으로 수년간 일했던, 그리하여 그림의 유통체계에 대해 어떤 화가보다 밝았던 그가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자화상을 그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화, 또는 일각의 오해와 달리 그는 인간미가 넘치는 따뜻한 사람이었고, 균형잡힌 이성의 소유자였다. 다음 편지글을 보자. “완전하고도 배타적인 인상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무엇인가에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밝은 색채는 인상파를 통해 진보했다. … 그런데 거의 색채를 갖지 않은 밀레는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남겼던가! 배타성을 없애주는 점에서 광기는 축복받아야 한다.” “만일 인상파 사람들이 스스로 원시인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분명히 그들은 그들에게 어떤 권리를 부여하는 칭호로서 ‘원시인’이라는 말을 제시하기 전에 좀더 ‘인간’으로서 원시인이 되는 것을 배우는 쪽이 더 좋을 것이다….”
이쯤되면 빈센트의 그림을 관통하는 하나의 뚜렷한 특징인 ‘화염’의 젓줄을 ‘광기’에서 찾을 수는 없게 된다. 지은이는 이와 관련해 “장담컨대, 자유정신이야말로 그의 삶과 예술의 핵심이다”라고 단언한다. 그 자유는 물론 삶과 역사와 진실과 체제와 민중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고, 빈센트의 삶의 화두이기도 했다.
인간 빈센트, ‘20세기 천재화가’ 반 고흐의 정신을 찾아가는 길이, 아다시피 박홍규 교수가 개척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사의 맥락에서 지은이의 길안내와 본인의 증언에 기대어 “언제나 모자랐고 약했으며 슬펐”던 그러나 무엇보다 (보통) 사람을 사랑했던, 빈센트를 만나는 일은 색다르고 즐겁다.
난, 평생 사랑을 갈구했으나 외롭게 살다 죽어간 빈센트의 이말이 특히 좋다. “친구가 되는 것, 형제가 되는 것, 그래, 사랑이야말로 감옥을 여는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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