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됐으며 좋겠어, 정말
2001년 1월 1일 새해 아침. 명동성당 들머리에서는 단식농성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칼바람 추위 속에서 이어지는 단식농성이었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그 자리는 또 다른 인권활동가와 시민들에 의해 채워졌다. 그렇게 13일 간 110명의 단식농성이 이어졌다. 인권법 제정을 위한 눈물나는 투쟁이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근거로 하는 인권법이 통과되었고, 지난 8월 21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김창국 인권위원장 내정자를 중심으로 기획단이 출범했다. 법제 운영반과 행정 지원반으로 나뉘어져 있는 기획단은 사무처 기구·정원안 준비 및 직원 충원 지원, 예산 확보, 시행령 및 규칙 시안 준비, 업무처리절차 및 지침 시안 준비 등 국가인권위의 주요 뼈대를 만들게 된다. 기존의 인권단체들이 개별적으로 벌이던 사업들을 국가기구의 이름으로 더 강력하고 체계적으로 진행하게 될 국가위원회. 첫발을 내딛기까지 치러온 노고가 큰 만큼 기대 또한 남다르다.

먼저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정말 무조건 잘 됐으면 좋겠다. 일부 아쉬움은 있지만 여하튼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은 시민단체의 쾌거이자 국민의 승리다. 인권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에 국제적인 인권기준을 근거로 하는 인권위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뜻깊은 일임에 틀림없다”라는 말로 벅찬 기대를 나타냈다.

인권위에 바라는 각계의 목소리

이런 바람은 각 분야별 시민단체들도 마찬가지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출범을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 중의 하나는 여성계이다. 실제로 지난 4월 통과한 인권법에 따르면 인권위원 11인 중 최소 4인 이상은 여성이 선임되어야 한다. 그만큼 여성 인권문제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윤인순 사무총장은 국가인권위원회가 해야 할 일로, “여성 인권사안 중 여성폭력이나 여성차별에 관한 처리는 현행 법률에 의거하여 처리하되 기존 법률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그 구제수단이 미약한 경우, 특히 국가기관에 의한 수사과정에서의 여성 인권침해 사안, 국가기관과 유착관계가 있어 수사가 어려운 사안은 우선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또한 검찰, 사법부 등에게 가정폭력범죄와 성폭력범죄에 대한 교육지침을 제정하고 교육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최근 사법부가 연이어 두 번씩이나 돈 거래가 없었다 하여 10대 성매매 피의자를 무죄 선고한 것은 사법부의 여성 인권의식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소수자들도 인권위 시대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 남성동성애자 인권운동모임 ‘친구사이’ 박철민 사무국장은 인권위에 대한 기대를 이렇게 나타낸다.

“아직 우리 사회는 동성애에 대한 테러, 폭행, 차별 등이 구체적으로 정의된 경우가 적다. 또 피해 당사자도 적극적으로 맞서기보다는 피해를 혼자 감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어떤 것이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 행위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동성애 인권침해가 무엇인지, 그 범위부터 규정지어야 한다는 것인데, ‘인권’에 대한 정의조차 국민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우리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런 기초작업을 하기 위해서 인권위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인권 조정만이 아니라고 박 사무국장은 강조한다.

“장애 차별금지 법령처럼 성적 지향을 근거로 한 구체적인 차별금지 조항을 담은 법률이나 지침이 필요하다. 또 동성애자들이 안심하고 인권위에 진정할 수 있게 개인신상 보호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꾸준한 교육과 홍보를 통해 사회적으로 소수자를 용인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법무부 인권송무국 신설은 또 하나의 해결과제

이 밖에도 인권위가 담당해야 하는 분야는 많다. 어린이, 청소년, 노인 등의 인권침해는 물론이고, 최근 김인규 교사 사이트 폐쇄와 같은 표현의 자유 문제라든가, 1인시위마저도 처벌하는 우리 사회의 집회·시위의 대한 자유보장까지 인권위가 해야 할 일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런 개별적인 분야의 업무들이 잘 진행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전국민적인 ‘인권의식화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국장은 강조한다.

“인권교육을 초등학교 때부터 정식 교과과정으로 실시해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고 무엇이 인권을 침해하는 것인지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인권교육을 할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교사들에 대한 인권교육, 이것이 인권교육의 시작이다. 인권위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인권위를 설립하기까지 고통이 컸던 만큼 그에 대한 기대 또한 크다. 이런 기대 탓일까? 최근 인권위를 둘러싸고 적지않은 잡음도 있었다. 지난달 인권위 기획단 선정 문제를 제기하면서 인권운동사랑방의 서준식 대표가 대표직을 사임했다. 인권운동사랑방 이광길 간사에 따르면 “기획단 설립 관련 정보조차 주지 않으며, 상당수 인권단체들을 배제하는 등 인권위 관련 진행이 파행적으로 치닫고 있다”고 비판했다.

서 대표의 사임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태가 커지면서 지난 9월 7일엔 인권위원회와 인권단체들 간의 간담회가 진행됐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간담회 이후 인권단체들은 “기획단이 더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실질적으로 시민사회의 힘을 받아야 한다”며 “인권위 설립 준비과정을 독점하지 말고, 정보공개와 논의과정의 민주주의를 보장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런 내부갈등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을 제기하고 있다. 인권위 탄생에 주도적으로 참가했고 인권공대위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곽노현 교수(방송대 법학과)는 최근의 이런 움직임을 ‘찻잔 속의 태풍’ 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것은 법에 보장된 인권위 출범 날짜인 11월 25일이 두 달여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아직까지 인권위원 11명이 선임되지 않았고, 또 인권법 제정 때부터 갈등을 빚어온 법무부가 최근 ‘인권송무국’을 신설하는 등 인권위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권침해 행위의 대부분이 공권력 횡포와 수사권 남용에서 비롯되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법무부와 인권위가 어떤 관계로 나아가느냐는 인권위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권의 불모지라고 불리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딛은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의 탄생은 시민운동진영의 노력의 결실이자 전 국민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을 지켜보고 비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 또한 시민단체가 맡아야 할 중요한 몫이다.

김정은 본지 객원기자
2001/10/01 00:00 2001/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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