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아줌마 밥주걱 들고 거리로 나서다
2001/2001년 10월 :
2001/10/01 00:00
현대자동차 식당운영위원장 최종희
<사과 및 정정보도문>
10월호게 실린 '시대와 사람'<식당아줌마 밥주걱 들고 거리로 나서다-현대자동차 식당운영위원장 최종희> 기사내용 중 최종희 위원장의 주장과 상반되는 사실이 있어 그 기사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정하고 사과드립니다.
1.중간제목 '섭섭했던 노조,하지만 함께가야 할 사람들'이하에서 <아줌마들은 지난 1년간 복직싸음을 하면서 노조와 갈등도 있었지만 한배를 타고 가야 할 동지들이기 때문에 노조가 혹 나쁘게 비춰질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는 내용에 대해 최 위원장 자신은 그렇게 말한 바 없다며 오히려 "어떤 때는 회사보다 더 심했던 노조"라고 말한 대목을 누락시킴으로써 최 위원장의 생각과 다른 취지로 보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2.그 아래 기사내용중 <비디오상영 제안이 들어오자 아줌마들중 일부가 공식 상영전에 비디오를 보기를 원했다>는 대목은 최 위원장이 한 말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습니다.이는 사실과 다르고,공식상영전에 비디오를 보기를 원한 것은 울산인권영화조직위원회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이는 울산인권영화제와 관련한 논쟁과정에서 주장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소문으로만 돌고 있던 이야기로 현대식당운영위원회에서는 그 구체적 실체가 없다하여 이와 관련된 주장이 사실무근임을 알리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3.위에서 정정한 부분은 최 위원장이 말하지 않았거나,사실과 다른 것으로,필자의 판단에 따라 최 위원장이 주장하고자 한 취지가 잘못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최 위원장의 의견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거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된 부분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현대자동차 3만여 명이 넘는 식구들의 밥을 짓던 277명의 아줌마들이 갑자기 날아온 ‘정리해고’ 통보를 받고 밥주걱 대신 피켓을 들고 회사 내 텐트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1998년 7월 16일이었다.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태풍처럼 몰려와 전국을 강타하던 그 해, 노동자들은 난생 처음 들어본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고 앞으로 살아갈 고민보다 한솥밥을 먹던 놈들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분노와 슬픔 때문에 절망했다. 왜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줌마들은 더 기가 막혔다. 평생 회사사람들 밥해주며 일했지만 아무도 지금까지 이런 날이 온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다. 목돈 퇴직금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때론 지긋지긋하던 현장이었지만 어쩌랴! 밤낮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 청춘을 보내며 그나마 힘들 때마다 위로가 돼 주던 공장 앞 미포만 앞바다를 그냥 떠날 수는 없었다. 결국 2만 여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회사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만삭인 몸을 이끌고 잠자는 아이를 들쳐업고 회사 마당에 모인 가족들은 대책위를 만들고 텐트를 쳤다. 그 해 여름, 정리해고를 철회하라고 외치는 전 가족의 외침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회사의 심보에 울고 또 울었다. 그 대열 속에 277명의 어머니와 누이가 함께 있었다.
최종희 아줌마, 식판을 준비하는 식당 아줌마 중 59세의 최고령 조합원이다. 16년간 그가 일해온 식당은 젊은 새댁부터 나이 든 아줌마까지 사연 많은 여성들이 유난히 많은 곳이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한 사람, 병든 가족, 술만 먹고 돈은 벌어오지도 못하는 남편을 둔 여인네까지 사연도 구구절절이었다. 노조가 설립되던 87년 전까지 아줌마들은 월차, 생리휴가가 있어도 쉬지 못하고 2교대 맞근무를 꼬박 하며 식당을 지켰다. 밤이면 파김치가 된 몸뚱아리 구석구석이 쑤시고 아파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출근하는 동료아줌마들을 보며 그는 남들 하기 싫어하던 대의원을 세 번이나 했다.
“대의원 되기도 정말 힘들었어요. 회사의 방해공작뿐만 아니라 회사 편을 들고 나와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식당 조합원들도 많았어요. 아줌마들의 90%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알기도 전에 회사 눈치 보면서 살아야 했어요.”
왜 그랬을까? 전국 최고의 투쟁력을 과시하던 현대중공업과 함께 중요한 시기마다 전국의 태풍이 되어 노동자들을 결집하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식당아줌마들의 삶은 왜 그리도 주눅들어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알았을까? 바로 일 년 후 자신들이 전국을 거지처럼 떠돌며 원직복직을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여성투사로 변할 줄을….
“식당일, 정말 무식하게 해대야 합니다. 일은 많아도 여유인력이 없어서 조퇴하는 동료가 미워 보일 정도로 하루하루가 힘들어요. 사람이 살다보면 아프기도 하지만 우리는 병원에 갈 수도 없었어요. 조금 잘 먹고 아이들 잘 키워보자고 한 일이지만 눈물로 식당밥 짓기 일쑤였지요.” 주는 밥만 먹는 사람들이 그 밥 속에 섞인 눈물과 애환을 짐작이나 했을까? 공장 밖 양정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고 담 너머 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올 때 운동회에도 한번 참석할 수 없는 엄마들의 마음을….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소풍 한번 따라 가보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돌이켜 생각해도 목이 메어오는 인생살이지만 내색도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여성가장들이 무너지면 가족 모두가 무너진다는 현실 앞에서, 오직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 도리가 없는 삶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래서 싸워서라도 되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 없는 벼랑 끝에 선 여인들이었다.
정리해고가 강한 여자, 겁날 것 없는 엄마로 만들었다
작년, 먹거리 식판만 돌리던 아줌마들이 무섭게 변했다. IMF 외환위기로 나라도 망하고 다들 거덜난다고 믿었는데 1년 후 회사는 너무 잘 나갔다. 차고에 쌓이는 차도 없이 수출이 늘어갔다. 올해 들어 현대자동차 총매출은 현대그룹보다도 높았다. 60%의 임금만 받고 노조가 운영하는 식당 계약에 동의했을 때도 “회사에 속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문을 통해 회사가 승승장구한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줌마들은 원직복직을 위해 ‘겁 없이’ 정문 앞 7시 아침저녁 투쟁부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최종희 씨가 깃발을 들었다.
“처음에는 징계해고자들이 나서서 어설픈 우리를 대신해 선동도 해줬어요. 우리가 언제 이런 투쟁을 앞에서 주도해 본 적이 있나요. 98년 정리해고 투쟁 때도 회사가 모든 설비를 끊었을 때, 사수대 밥 해주기 위해 양은통 걸고 국 끓이며 파업에 동참한 게 태어나 처음 싸워본 경험이었어요. 당시 노조밖에 믿을 게 없다보니 열심히 싸우라고…. 우리가 낸 조합비 아끼기 위해 비가 오는 날 농수산물 시장에서 우거지 주워와 반찬 만들어 파업기간 내내 밥 해먹이곤 했는데 우리만 정리해고 되어 쫓겨나니 어디 가서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노조에 대한 섭섭한 마음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당사자들이 싸우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식당운영위원장이 된 그는 가장 고령의 나이에 다른 아줌마들과 똑같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 7시면 정문 앞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원직복직을 외쳤다. 어디 그뿐이랴.
아들 같은 나이의, 80명이나 되는 건장한 경비들에게 온몸을 밟히고 얻어맞으면서 ‘이 놈들한테 오늘도 내 손으로 밥해줘야 하나’ 생각하면 억울하고 기가 막히지만 식당에 돌아가 밥주걱을 들었다. 현장에서도 조합원들은 “아줌마들 복직되겠나”하는 심정으로 반신반의했다.
다 하는 같은 노동자들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그것도 식당아줌마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였다. 끝까지 가보는 것, 자식새끼 낳는 고통만큼 이 싸움이 힘들어도 길거리에 나앉지 않으려면 다시 신나는(?) 투쟁을 통해 똘똘 뭉치는 것말고 다른 선택이 없었다.
‘밥꽃’들의 전국 행진
몇 달 동안 정문 앞 투쟁을 했지만 해결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는 아줌마들을 고소고발하며 8700만 원의 임금을 가압류하였다. 집회금지가처분도 떨어졌다. 식당운영위원들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노동조합 임원 5명이 대출을 받아 법원에 해방공탁을 걸고 가압류를 풀어주었지만 끝날 투쟁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제 거리로 나서야 할 판국이었다. 최종희 위원장을 중심으로 아줌마들은 국회의원 사무실 앞 집회를 비롯,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정몽준 회장이 동구 선거에 나왔을 때는 “니 집안일도 해결 못하면서 남의 집일 신경 쓰냐”고 항의하며 시장통 선전전에 직접 나섰다.
가족들이 있는 여자들이 투쟁과 일을 병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야간식당 근무조가 들어올 때 아침조는 퇴근 후 야간버스를 타고 부산과 대구를 비롯 전국을 돌기 시작했다. 단 한 명을 만나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계속된 투쟁은 이 땅의 여성노동자이자 어머니가 아니면 불가능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의식이요? 당연히 없었지요. 남성조합원들이야 현장 재조직(활동가 중심의 정치조직을 말한다)을 통해 공부도 하지만 우리야 밥주걱 하나로 10∼20년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나가면 누가 우리 새끼들 밥 먹이고 공부시키겠어요? 생각할수록 억울하기 때문에 끝까지 싸운거예요. 회사가 잘 나가면서 왜 우리들 임금은 60%만 줍니까?”
최종희 위원장은 단호했다. 현장의 남성조합원들도 아줌마들의 투쟁에 혀를 찼다. 아줌마들이 너무 과격하다고 뒤에서 수근대는 소리도 들려왔다. 웬만하면 포기할 듯도 싶은데 시간이 지나도 기세가 흔들리지 않자, 함께 싸우지 못하는 조합원들은 아줌마들을 피하기조차 했다. 그래도 일부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성금도 모아주며 지지했다. 어느새 거지꼴을 한 아줌마들의 10개월 간의 정문투쟁으로 회사의 이미지가 말이 아니었다. 공장 앞을 지나가는 버스속 학생들도 아줌마들이 왜 매일 싸우는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자녀들도 깨달아갔다. 엄마들이 왜 힘든 투쟁을 그렇게 오래 하고 있는지…. 그러나 2000년 임금단체협상에서도 아줌마들의 원직복직은 해결되지 못했다.
머리를 삭발하고 여자의 수치심도 버렸다
회사의 묵무부답에 최종희 위원장은 10명의 운영위원들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가 이제 마지막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 삭발하자. 그리고 옷을 벗고 사무실 앞에서 농성을 하자.”
더 이상 창피할 것도 없었다. 최선을 다하자는 그의 결단에 모두들 흔쾌히 동의했다. 아줌마들은 서로 머리를 깎겠다고 나섰다. 예상보다 많은 19명이 지난 5월, 눈물의 삭발식을 거행하며 회사를 향해 ‘원직복직’을 외쳤다.
이날 현대자동차 노동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삭발에 나서자 노동조합 상임집행위원들이 달려와 여성이 삭발하는 것은 여성임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완강히 반대했지만 아줌마들은 강행했다. 결국 노동조합 임원들이 연대 삭발을 단행했다. 아줌마들의 무서운 행동에 회사도 놀랐는지 원직복직이 아닌 전환배치를 요구하며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식당아줌마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20년 동안 밥만 해온 사람들이 나이 사십이 넘어 생산현장에 가서 젊은이들과 일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더러 현장으로 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회사와 마지막 협상을 앞두고 140명의 아줌마들은 저마다 가위를 들고 본관 로비로 향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한번 전원 삭발을 강행할 작정으로 본관 로비로 갔지만 경비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역부족이었다. 경비들이 밖으로 들어내려고 하자 조합원들은 그 자리에서 겉옷을 벗었다. 더한 것도 벗어서 싸워야 한다 해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우리는 몸뚱아리 하나로 버텨온 인생인데 이 몸뚱아리가 버려지는 마당에 뭐가 두렵습니까?” 어차피 나 혼자 잘 되자고 시작한 투쟁도 아니었다. “아줌마들 정말 심한 것 아니냐”는 비난도 몰아쳤다. 그러나 이런 끈질긴 아줌마들의 투쟁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관심이 높아지더니 지난 3·8 여성대회 때는 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들을 주변노동자로만 생각하던 현장 남성조합원들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마침내 회사는 ‘밥꽃’과 ‘밥주걱’ 여성의 투쟁에 두손들었다. 완전한 원직복직은 아니지만 대다수 아줌마들은 IMF 이전 월급을 보장받기로 하고 식당으로 돌아왔다. 비슷한 나이의 여성들이 편하게 놀러다닐 때, 가족들의 밥줄이 되어 늦은 나이에 무서울 것 없이 달려든 투쟁 속에서 식당은 그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 할 현장이었다. 마침내 노조식당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총회를 통해 최종희 아줌마는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렇게 노동자들을 우습게 아는 사회에서 눈살 찌푸리지 않는 반듯한 투쟁으로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지킨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요? 대기업보다 더 힘든 하청노동자,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할 까닭도 내가 중심이 아닌 주변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노동조합이 이제라도 연대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뒤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이런 일들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 동료들이 없었다면, 자식 딸린 에미 심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투쟁이었다.
섭섭했던 노조, 그러나 함께 가야 할 사람들
최근 울산인권영화제를 준비하며 아줌마들의 투쟁을 담은 비디오 상영을 두고 제작자와 지역단체 사이에 작은 마찰이 생겼다. 비디오 상영 제안이 들어오자 아줌마들 중 일부가 공식상영 전에 비디오 보기를 원했다. 아줌마들은 지난 1년 복직싸움을 하면서 노조와 갈등도 있었지만 한 배를 타고 가야 할 동지들이기 때문에 노조가 혹 나쁘게 비춰질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곧바로 ‘사전검열’이라는 이유로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이쯤 되면 ‘사전검열’의 정당성 문제를 두고 논쟁이 되어야겠지만 서로의 처지를 헤아리는 노동자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고기를 보고 바다는 보지 못한 꼴이 될 수 있다.
“배포를 하느냐 시사회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운영위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조합원들의 모습도 담겨 있기 때문에 제기된 문제였어요.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못 봤다고 상영 못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자 한다면 갈등이 빚어질 문제도 아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왜 투쟁을 하는지 이해하는 만큼 서로의 처지를 가깝게 이해하려고 했다면 생기지 않을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식당 운영위원들이 ‘무서운 철의 아줌마’들만은 아니었음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맺으려 한다. 98년 정리해고 마지막 싸움에서 위원장이 총회를 통하지 않고 회사와 협상을 했을 때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식당아줌마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에 분노해 노조사무실에 올라가 노조 집기를 다 부셔버리고 내려왔지만 정작 노조위원장이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던 날, 아침이라도 먹여서 보내야 한다고 모인 아줌마들은 가슴 아픈 밥을 만들어 노조 사무실에 있는 위원장에게 보냈다. 남동생 같고 자식 같은 모습으로 위원장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옳은 생각과 대의를 가지고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바꾸려는 사람들의 삶도 서로 다른 일로 부딪칠 때 아량과 너그러움이 바탕이 되어 승화되지 못하면 오히려 가까운 동지들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척박한 땅에서 운동가로 살아가는 현실과 행동이 항상 옳기만 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런 현실은 최 위원장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산이다. 그래서 아직은 양정동 산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식당 노동자의 길을 떠나고 싶지 않다. 60의 나이를 앞둔 할머니(?)답지 않게 그는 씩씩하다. 더 이상 두려움도 없다. 돋보기를 끼고 식당의 자율적인 운영을 고민하는 그의 깊은 마음이 세상에 활짝 펼쳐질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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