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행동리뷰3 숲 보전 약속받기 전엔 못 내려가!
2001/2001년 10월 :
2001/10/01 00:00
대지산살리기운동 전말기
환경정의시민연대(이하 ‘환경정의’)가 경기 용인의 난개발 문제에 뛰어든 것은 2000년 4월부터다. 환경정의가 용인지역 주민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이미 몇 년째 이 지역의 난개발에 반대하여 싸우고 있었다. 용인지역 주민들과 환경정의는 용인 서부지역 택지개발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2000년 6월 용인 서부지역의 4개 택지개발지구 주민들과 환경정의 그리고 용인YMCA가 연대해 ‘용인지역 자연환경보전을 위한 공동대책위’(이하 공대위)를 만들고 용인 서부지역 4개 택지개발지구의 근본적인 재조정을 요구하였다.
‘땅 한 평 사기’운동으로 대지산을 살리자
용인 택지개발 반대운동에서 가장 중심이 된 것은 사라져가는 녹지를 보전하는 일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용인과 분당이 회색 콘크리트로 맞닿는 것을 막아주고 주변 아파트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녹지를 확보하기 위한 대지산살리기운동이다. 공대위는 대지산의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와 서명작업, 인근 아파트 단지의 부녀회를 통한 설명회 등을 펴나갔다. 다행히 경주 김씨 종중을 중심으로 한 대지산의 일부 토지 소유자들도 녹지를 보전해야 한다는 데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이에 힘입어 7월 18일 경주 김씨 종중 2개 종회와 다른 지주 2명, 그리고 공대위는 국내 최초로 민간 소유의 땅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지정해달라는 청원을 건설교통부에 제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난개발의 오명을 쓴 용인을 자발적 녹지보전운동으로 되살릴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그린벨트 지정 청원이 국민적 성원을 받으면서 대지산살리기운동은 힘을 얻어갔다. 대지산 보전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땅 한 평 사기’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방송인 백지연 씨의 라디오 무료광고 출연 등으로 큰 호응을 얻어 대지산 일대 100평의 땅을 시민의 이름으로 사들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외에도 용인지역 주민들과 함께 대지산 맨발걷기대회, 공청회, 토론회, 집회, 녹지자연도 조사를 통한 환경영향평가 왜곡 고발 활동 등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다양한 시민참여 캠페인과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건교부와 토지공사는 택지개발사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들은 계속 토지를 수용하는 한편, 그린벨트 지정을 청원했던 경주 김씨 종중을 분열시켰다.
이와 더불어 토지공사는 대지산 벌목을 시작했다. 공대위가 여러 차례 택지지구 내 산림의 식생조사를 실시해 대지산 주변 숲이 개발을 할 수 없는 녹지자연도 8등급 이상인 지역이 거의 절반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고 환경영향평가의 재실시를 요구하였으나 협의를 맡은 경인환경청의 미적거리는 태도를 틈탄 것이다. 공대위는 기자회견과 항의방문 등을 통해 벌목을 중지시킨 뒤 벌목을 계속 감시하면서 숲 가꾸기와 나무심기 행사 등을 통해 대지산살리기운동을 이어갔다.
5시간 걸린 나무 위 텐트 치기
그러나 이것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토지공사가 마음만 먹으면 대지산 일대는 단 며칠이면 모조리 벌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정의는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전체 회의를 열어 벌목을 저지하면서 대지산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나무에 몸을 묶고 시위를 하자거나 대지산에 천막을 치고 시위를 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방안은 토지공사가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해산시키는 간단한 대응만으로 허사가 돼버릴 것이 뻔했다. 그 순간 내 뇌리에 미국의 한 환경운동가가 떠올랐다. 캘리포니아의 삼나무 숲을 지키기 위해 나무 위 시위를 통해 결국 숲을 보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던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 나무 위 시위라는 나의 제안이 통과됐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무 위에서 버티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뒤진 끝에 나무 위에다 천막을 치기로 했다. 나무를 고르기 위해 다시 대지산에 올라갔다. 사람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큰 나무여야 했고, 벌목을 감시할 수 있으며, 외부의 지원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큰 나뭇가지 중간에 V자형 가지가 뻗어나와서 텐트 받침대를 설치하기 쉬운 나무가 발견돼 그걸로 정했다.
나무에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암벽 타기나 등산용 자일 사용을 거의 경험해보지 못했다. 나무에 오르기 이틀 전,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나무에 오르는 방법은 등산이 취미인 한 선배 회원의 조언을 들었다. 나무 오르기 하루 전. 선배의 도움으로 몇 가지 필요한 물품을 더 사들인 뒤 사무실 2층에 자일을 묶어놓고 아래층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자일 타기에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 했다. 나무 오르기 연습을 하는 동안 목공소에 주문해 놓았던, 텐트를 설치할 발판이 도착했다. 더 이상 나무 오르기를 연습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빠졌을 때 짐을 챙겨 용인으로 갔다.
그날, 모두들 잠을 설쳤지만 새벽 3시 30분에 눈을 떠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토지공사 직원의 눈에 띄게 되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어 새벽시간을 택했다. 시위에 필요한 물품을 산으로 옮기고, 나무 위에 텐트를 설치하는 데만 5시간이 넘게 걸렸다.
대지산, 다시 평화를 얻다
본격적인 나무 위 시위는 2001년 4월 29일 낮 12시경 산신제를 지낸 뒤 시작됐다. 비밀리에 동원된 지역주민들과 환경정의 회원들의 환호 속에 시위는 시작되었다. 이제 나는 대지산지기가 된 것이다.
첫날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무 위의 생활이 주는 어색함과 색다른 시위에 대한 긴장감, 그리고 예상치 못한 추위로 밤새 떨어야 했다. 산 속이라 4월 말인데도 마치 초겨울처럼 추웠다. 다음날부터는 일일통신을 발행했다. 대지산지기의 일기를 기본으로 그날그날 지지방문자 명단과 격려문, 메일로 받은 격려문, 주변 정황 등을 담은 일지를 날마다 작성하여 환경정의 회원과 다른 환경사회단체, 그리고 사회 각계 인사들에게 보냈다.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나무 위에 머물렀던 17일 동안 언론사 취재나 인터뷰가 없었던 날이 이틀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농성장에는 날마다 50∼60명의 지지방문자가 찾아왔고 쏟아지는 격려전화로 핸드폰 전지를 하루에 두 번씩 바꿔넣어야 했다.
나무 위 시위는 올라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매일 두 번씩 지원팀과 함께 토지공사 규탄시위를 벌였다. 시위모습은 일일통신에 담겨 회원과 환경단체들, 그리고 사회 각계에 보내졌다. 그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어린이날에는 ‘어린이 환경그림그리기 대회’를 열었고, 대지산에 금줄을 치는 행사도 했다. 이 행사준비를 위해 지지방문자들은 지역주민들이 마련한 짚으로 일주일 동안 새끼줄을 꼬아 왔으며 사이사이에 대지산을 살리자는 염원을 담은 쪽지를 꽂아 넣었다. 지역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토론마당을 마련하기 위해 저녁에는 환경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기도 했다.
2001년 5월 15일. 굴삭기의 삽날에 살이 뜯기고, 뼈가 깨져 나가던 대지산이 드디어 영원한 평화를 얻게 됐다. 나무 위로 올라간지 17일 만에 건교부와 토지공사로부터 대지산 보전의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대지산살리기운동은 무엇보다 지역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난개발 지역의 녹지보전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주민조직과 시민환경단체가 함께 조직을 구성하여 활동함으로써 지역공동체 유지와 자연환경 보전에 뜻이 있는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것이다. 따라서 대지산살리기운동은 나무 위 시위 한 가지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기반을 다졌기 때문에 마침내 성공했던 것이다. 비폭력 운동의 또 다른 상징이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전 과정을 간과하고 나무 위의 시위만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