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것은 통일이 아니다
2001/2001년 10월 :
2001/10/01 00:00
남측실무대표단 4인이 말하는 평양축전
“…행사대목에 와서까지 또다시 장소문제를 가지고 복잡성을 조성하는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측은 우리와 서로 손잡고 나갈 것을 희망하는 귀측 여러 단체들의 립장을 고려하여 첫째로, 이번 축전 개폐막행사는 우리측의 행사로 하고 남측은 지난해 조선로동당 창건55돐 경축행사 때와 같은 자격으로 참가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2001년 8월 13일 늦은밤 10시, 민화협 사무실로 한 장의 팩스가 밀려 들어왔다. ‘6?5∼8?5 민족통일촉진운동을 위한 북측준비위원회’(회장 김영대)가 2001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이하 추진본부, 단장 김종수) 앞으로 보낸 마지막 통지문. 두 차례 실무회담에서도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했던 축전행사 장소문제에 대해 북측은 여전히 변경불가를 통보했다. 다만 2000년 조선노동당 창건55돌 경축행사 때처럼 ‘참관’하라는 당부를 덧붙이면서.
북측은 지난 7월 18일 금강산에서 열린 제1차 실무접촉 때부터 8월 13일 밤에 보낸 통지문에서까지 2001민족통일대축전의 개·폐막 장소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측 추진본부는 북측이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고집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기서 행사를 치를 수 없다고 맞받았다. 남과 북은 어찌 보면 별 문제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장소선정을 둘러싸고 옥신각신 신경전을 벌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개막식을 지혜롭게 피해보자’는 포석이 깔린 늦은 출발
8월 14일 오전 남측 추진본부는 정부와 막판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처음부터 장소문제를 둘러싸고 방북불허 방침을 고수했던 정부가 쉽사리 응낙할 리 없었다. “허가하라”는 추진본부와 “그래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정부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실랑이가 오가던 14일 오후, 추진본부는 최종적으로 “3대헌장기념탑 앞에서 하는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고 ‘조건부 방북’ 승인을 받아냈다.
14일 밤 9시,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김종수 단장은 방북교육중 대표단에게 “3대헌장기념탑 앞에서의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천명하며 “만일 거기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책임을 지고 내가 감옥에 가게 될 테니 부디 그런 일 없기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8월 15일 아침 8시 인천공항, 14일 오후 급작스레 결정된 방북행인지라 인원파악부터 쉽지 않아 출발은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한편 집행부의 내심에는 개막식 행사를 ‘지혜롭게 피해보자’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추진본부 나름의 포석이 깔린 늦은 출발이었던 것. 변진흥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사무총장의 말을 들어보자.
“정부가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앞 행사를 불허했기에 우리는 최대한 시간을 벌어 개막식 시간대를 피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개막식 행사는 피하고, 3대헌장기념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펼쳐질 부문별 행사를 잘 치르면 자연스럽게 폐막식 행사 정도는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죠. 아, 그런데….”
2만여 명의 평양시민들이 아침 10시부터 3대헌장기념탑 앞에 나와 남쪽에서 올 동포들을 기다리며 땡볕에 4시간씩 도열해 있다는 전갈이 이어졌다. 북측은 마지막 통지문에 나온 대로 ‘그들측의 행사’로 치렀어야 할 개막식을 남측 인사들의 참관을 기다리며 늦추고 있었던 것.
15일 오후 2시, 순안공항에 영접나온 민화협 사무소장 리관익 씨를 비롯한 당 고위간부들은 대표단을 고려호텔로 안내했다. 그 다음, 김영대 민화협 회장과 허혁필 민화협 부회장을 비롯한 북측 인사들은 대표단에게 ‘개막식 참관’을 요청했다. 이때 대표단 일행 중 종교계 인사를 필두로 “잔치집에 온 손님의 예의가 아니”라며 “북측 안내원들의 뜻에 따르는 게 좋겠다”는 분위기를 잡았다. 오후 4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주석단회의’(행사 시 연단에 앉을 대표 20명 회의) 실무위원회가 열렸고, 그때부터 마라톤회의가 시작됐다.
남측 추진본부의 골간을 이루고 있는 7대종단·민화협·통일연대를 대표하여 김종수 단장, 변진흥 사무총장, 조성우 민화협 공동의장, 한충목 통일연대 집행위원장은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방북을 승인받기 위해 ‘3대헌장기념탑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14일 밤 방북교육 후 통일부에 제출하고 왔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김종수 단장은 “개막식 불참”을 고집했다. 그후 논쟁은 점점 가열화됐다. “설사 정부와의 약속이 있다 하더라도 수만 명이 땡볕 아래서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안 갈 수 있느냐”는 인정론에서 “남쪽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거기에 살점을 던질 셈이냐”는 방어론까지 무수한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예를 갖추지 못하고 우리 입장만 고수하면 무슨 교류가 가능하겠냐”는 주장과 “정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신중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장시간 회의가 계속되는 사이, 대표단 일부는 ‘소신껏’ 혹은 ‘북측안내원의 설득으로’ ‘남측 지도부의 결정 후 북측안내원이 안내하는 줄 알고’, 고려호텔에서 개막식장으로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 수는 120여 명 가량 된다고 변진흥 사무총장은 말했다.
김일성 유훈통치 끝내고 김정일시대 개막
하지만 남측 추진본부는 무엇보다 공식적으로 합의한 바 없이 방북단 일부를 버스에 태워 개막식 장소로 향한 북측의 일 처리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추진본부는 이에 대해 강력 항의하며 15일 밤 10시께 북측에 항의문서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북측은 항의서한을 고위층에 전달했다고 말했고, 대표단이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인 20일 오후 그에 대한 유감의 답신을 받았다. 그러나 북측은 이 문제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김창수 민화협 정책실장의 말을 들어보자.
“뭘 그리 비관적으로 생각하십니까? 낙관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북측은 시종일관 이런 말만 되풀이했어요. 3대헌장기념탑 앞에서 행사 못한다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조국강산 곳곳에 수령님과 장군님의 발자취가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하더군요. 무엇보다 북측은 6?5공동선언 당시와 달리 언론사 탈세고발사건 이후 남한 정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듯싶었어요.”
그러나, 긴박한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내부토론 중 방북단 일부가 빠져나가 개막식에 참여한 것은 남측 지도부를 무척 당혹스럽게 했다. 참가자 중 일부는 “결국 북측이 대기시킨 버스의 바퀴가 움직였기 때문에 개막식 장소로 갈 수 있었던 게 아니냐”며 북측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무엇보다 언론사 사주 구속 등으로 보수언론과 정치권이 가뜩이나 독이 올라 있는 남측 정세에 대해 누구보다 빠른 판단을 했을 북측이 이토록 ‘무리수’를 둔 까닭은 무엇일까. 조성우 민화협 공동의장의 얘기다.
“김일성 유훈통치를 마감하고 김정일시대의 서막을 열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북측 통일방안의 요체가 담긴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앞에서 남·북·해외 민족의 단합된 역량을 보이고, 그로써 김정일시대의 안정적 출발을 미국과 남측에 과시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김종수 단장에 따르면 북측은 첫 번째 실무회담 때부터 다른 문제는 다 제쳐놓고 유독 장소문제에만 매달렸다고 전달했다. 북측의 독특한 협상방식을 충분히 고려한다 해도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장소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건 뭔가 그들 나름의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김종수 단장의 말이다.
“북한에서는 새 천년 새로운 통일의 길은 김정일 위원장의 영도 아래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김일성 주석이 주창하던 통일논의가 집대성된 장소에서 남·북·해외 동포 모두가 그들의 통일방안에 지지를 보냈다는 의미를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보입니다.”
중단됐던 남북대화에 나서기 위한 발판
그러나 이번 2001민족통일대축전은 엄연히 ‘민족공동행사’로 추진됐기 때문에 어느 일국의 통일방안에 지지를 표명하는 방식은 곤란한 것이었다. 김창수 민화협 정책실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북한은 이번 통일축전을 계기로 ‘내부역량 다지기’를 시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초 6?5∼8?5까지를 ‘민족통일촉진운동기간’으로 선포하고, 이 기간 동안에 내부 통일의지를 결속시킴으로써 그 동안 단절됐던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에 새롭게 나서기 위한 발판을 만들려 했습니다.” 특히 북측 민화협 담당자들은 평양체류 기간 내내 북측의 태도에 불만을 갖고 있던 남측 추진본부 실무자들에게 “이번 8?5축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그 동안 냉랭했던 남북관계에 힘있는 추동력이 생길 것이라는 얘기를 책임있는 사람으로부터 전달받았다”고 말해 8?5 이후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 것이라는 언질을 줬다.
실제 9월 8일자 북측 민화협에서 남측 민화협으로 보낸 성명을 보면 “…통일의 리정표인 6?5공동선언을 철저히 리행해 나가며 북남당국 사이에 대화와 협상의 재개를 원하는 축전 참가대표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는 북남당국 사이의 대화를 조속히 개최할 때 대한 립장을 천명하였으며 마침내 북남상급회담이 재개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번 개막식 참가를 둘렀싸고 북측이 취한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김종수 추진본부 단장은 말했다.
“통일은 북을 지지하는 남의 세력과 북이 통일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북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화해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통일이 가능한 거라고 생각해요. 한 쪽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는 방식은 옳지 못하죠. 이번 8?5행사는 ‘민족공동행사’의 일환으로 준비됐습니다. 북쪽 통일방안에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 이유 때문에 3대헌장기념탑 앞에서 하는 행사에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 민간통일운동진영에서도 단지 ‘구경’만 하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고 말하지만 사실은 단순한 구경이 아니라는 겁니다.
북에서 문제삼을 만한 돌출행동도 많았다
16일 저녁 8시 폐막식이 있었지만 북측에서는 한 차례 홍역을 치러서 그런지 개막식 때처럼 적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폐막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대표단이 충성의 다리까지 마중을 나갔지만 행사는 이미 끝난 후였다. 이번 평양축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 중 하나는 북의 언론이다. 6박7일 동안 무수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언론은 남측의 언론처럼 비이성적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북측에서 문제삼으려 들면 얼마든지 문제삼을 만한 것도 그냥 넘어갔다. 김이경 통일연대 사무처장의 말이다.
“북쪽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돌출행동’들이 평양에서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를테면 애국열사릉은 북쪽사람들이 가장 경건하게 여기는 장소 중 하나인데 거기서 아무데나 소변을 보고, 그들 앞에 서서 ‘장군님은 무슨 장군님이야’ 하는 등 대놓고 야지를 놓았죠. 국제친선전람관에 가서는 ‘이거 다 돈 주고 사 온 거야’라거나 ‘이런 돈 있으면 굶는 아이들 밥이나 먹여라’ 등등 북이 맘먹고 억류시켜야겠다,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도 북측은 『로동신문』 등을 통해 큰 틀에서 민간교류의 많은 성과가 나왔다고 보도했어요. 우리는 성과의 평가는커녕 말도 안 되는 시빗거리로 사람들을 감옥에까지 보냈지만 말입니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이룩하자”고 방명록에 써 현재 수감중이지만 사실 이 문제도 알고보면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벌어진 일이다. 실제 방명록에 서명한 이들은 많다. 문제를 삼으려 했다면 더 심한 것도 찾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해석하면 실제 방명록에 서명한 사실 자체보다 평양발 서울보도에서 과도하게 부풀려 지면서 문제가 확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창수 민화협 정책실장은 “현지 기자들의 판단과 관계없이 데스크에 의해 부풀려진 보도를 접하면서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고 말했다.
북은 변하고 있다
분단 이후 최초로 337명이나 되는 대규모 민간진영의 평양방문 6박7일. 21일 발표된 공동보도문에 따르면 정부간 교류에 못지않은 성과를 이루어낸 것으로 보인다. 종교간 대화의 장, 언론·문화·예술의 교류 등은 오는 10월부터 본격적인 실무협상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뿐 아니라 구두로 합의한 서울과 백두산 삼지연 직항로 개설, 추석때 생사확인된 이산가족 선물교환, 김정일 위원장 답방 환경 조성을 위한 노력 등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큰 결실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축전을 계기로 남측의 ‘다양성’이 전달되면서 북측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남측 협상주체들은 입을 모았다. 김종수 추진본부 단장의 말이다.
“북 사람들은 ‘저렇게 다종다기한 인간들이 모여 어떻게 사회를 이끌고 갈까?’ 생각 많이 할 겁니다. 제가 ‘330명 왔는데 한 3000명은 온 것 같죠?’ 했더니 ‘3000명이 뭡니까? 한 30만 명은 온 것 같습니다’ 합디다. 그 만큼 남측의 다양성을 자꾸 보여주면 그들도 나름대로 창조적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일 거라 생각해요. 무엇보다 북은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 안의 남남갈등이든 남북갈등이든 갈등해소를 통한 화해와 평화정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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