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석학이 본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일시 │8월 16일 저녁 6~9시

참석자│이정옥(대구가톨릭대 사회학 교수), 폴 로저스(영국 브레드포드대 평화학 교수),

마르쿠 하이스카넨(핀란드 외무부 정책기획국장), 엘마 알트바터(베를린대 정치학 교수), 롤랑 바인(베를린대 한국학 연구원), 윌버트 반 더 자이덴(네덜란드 세계화연구소 연구원)

8월 13, 14일 양일 간에 연세대 새천년기념관에서 열렸던 ‘세계평화를 위한 한반도 화해와 통일 국제회의’에 참석차 내한한 평화학자 및 평화운동가들과 회의일정을 마칠 무렵,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국제회의가 끝나고 8?5 행사에 참가한 다음 철원의 비무장지대를 다녀와 한반도 분단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하고 난 뒤 서울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식사 자리였다.

이날 식사를 하면서도 화두는 당연히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라는 주제였다. 한반도 화해와 통일을 위해 지혜와 우정을 나누면서도 치열한 고민이 묻어나는 얘기들이 오고갔다.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다하지 못했던 말들을 보다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비록 비공식 대화이긴 했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아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하였다. 서툰 젓가락질만큼이나 낯선 한반도 문제에 대해 이들이 던지는 조언이 냉전으로 갈라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면을 조명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부통합 이루면 분단은 막을 수 있다

이정옥 로저스 교수님, 오랫동안 평화문제를 연구해 오셨는데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우선적으로 노력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점일까요?

폴 로저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중국, 베트남, 심지어는 쿠바까지 시장경제를 수용하면서 북한은 자신의 체제와 위치에 대한 고립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것은 불안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북한이 느낄 고립감과 불안감을 해소하고 안심시켜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외부로부터 차단되고 고립될 때 안으로 다지는 방어본능은 평화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북한을 안심시키자는 남한사람들 내부의 합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는 아주 위태롭다고 봅니다. 특히 유럽과는 달리 탈냉전 이후 국가 간의 경쟁이 고조되고 있고 평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동북아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봅니다.

이정옥 저희에게 핀란드는 남달리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핀란디아’라는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요. 저희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소련과 서유럽의 접경지대에 있으면서 냉전기를 거쳤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를 보는 입장이 남다를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마르쿠 하이스카넨 핀란드 역시 이곳 한반도처럼 분단될 뻔했지요. 저희는 협상과정에서 국토의 일부를 소련에 내주기로 하고 그곳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정책 대응을 했기에 다행히 분단을 면했지요. 정든 고향을 등진 사람들에 대한 나머지 사람들의 배려, 전체를 위한 일부 희생의 과감한 결단과 내부의 의견통합이 분단을 막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이었지요. 국제정세가 아무리 나빠도 민족 내부의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면 분단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핀란드는 한반도의 분단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극동의 우리나라와 다름없으니까요. 물론 극동의 냉전이 유럽의 냉전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대해 저는 유럽 68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일조하고 싶습니다. 스웨덴과 함께 핀란드는 국가 차원에서 남북한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점에서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을 위한 과정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반도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철도 부설이 동북아와 유럽의 연대를 강화하고 탈 냉전기에 유라시아 대륙의 평화를 구체화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경의선 철도 부설 문제가 원만하게 타결될 수 있도록 외교적인 지원을 하고 싶습니다. 이 곳 회의가 끝나자마자 북경에서 다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낮에 비무장지대를 방문하였는데 과연 분단이 실감나더군요.

폴 로저스 핀란드뿐 아니라 오스트리아도 분단될 뻔했지요. 그런 의미에서 유럽의 냉전기와 극동의 냉전기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유럽이 현재 택하고 있는 탈냉전 질서로서의 지역 통합이 동북아에 적용되기에는 이곳의 역사적 배경과 경험이 다르겠지만요. 어쨌거나 유럽과 아시아의 냉전기와 탈냉전기는 서로 배울 점이 많다고 여겨지네요.

서로의 차이 인정하지 않는 통일은 위험

이정옥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을 보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크게는 외부의 거대 중심이 강한 원심력으로 작용하여 분단될 수밖에 없었다는 외인론이 있고요. 다른 하나는 근대국가 건설에 필수적인, 합의된 국민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내부 분단이 그대로 남아 분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내부 분단론으로 이어집니다. 유럽의 얘기, 특히 핀란드의 사례를 듣고 보니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우리의 옛 속담이 그대로 맞는 것 같군요. 아무리 외세의 개입이 있어도 내부 통합을 이루면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태는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의미에서 비슷한 경험을 가진 유럽 국가들과의 비교연구나 비교 워크숍을 한번쯤 가진다면 생산적 논의가 될 것 같군요.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교훈의 면에서 핀란드와 오스트리아가 우리에게 시사적이라면 이제 막 분단을 넘어 통일을 이룬 독일의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훨씬 직접적일 것 같은데요. 롤랑 바인 박사님은 한국말을 참 잘 하시고 한국학을 전공하신다고 하셨는데 동독 시절에 한국말을 공부하셨나요?

롤랑 바인 저는 한국의 민속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데요. 동독에서도 배웠고 그 이후에도 계속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데 아직 멀었습니다. 한국에 관한 연구는 하면 할수록 독특한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문화적 섬세함이랄까, 얼핏 보면 중국과 일본 문화가 동북아를 대표하는데 한국 고유의 독자성이 강한 것 같아요. 제가 한국말을 하고 동독 출신이기 때문에 이번 회의말고도 몇 차례 서울에 왔습니다. 제가 만난 한국 사람들은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요. 저는 사실 부란덴부르그의 벽이 무너지는 그 날까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우리 동독 주민들은 아무도 통일 얘기를 한 적도 없고 통일이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어느 날 갑자기 자고 나니 통일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통일에 대해 한마디 거든 적도 없고 통일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데요. 그래서 부란덴부르그의 벽은 무너졌지만 우리 내부의 벽은 무너지지 않았어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만 보아도 동독 출신인지 서독 출신인지를 사람들은 한눈에 가려내지요. 내부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은 위험한 것 같아요.

윌버트 반 더 자이덴 독일 국민이 통일에 대해 무심했다니요? 우리가 보기에는 독일은 통일을 위한 내외부의 여건 조성을 위해 정부당국자와 국민 모두 총력을 모으는 것으로 보았는데요. 물론 내부에 있는 사람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았겠지만요.

엘마 알트바터 독일통일 직전에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그 때도 같은 분단국으로서의 관심사를 토론하는 과정에서 동독에서 온 쿠진스키 박사와 저는 입을 모아 통일 이전의 성숙한 민주시민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는데 제게도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통독과정을 거치면서 말하는 '통일의 십계명'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독일 통일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통해 한반도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즉, 통일과정에서 명심해야 할 ‘십계명’이라고 표현했다. 무엇보다 분단과 통일의 경험을 거친 사람들이 전하는 고언이라 같이 앉아 있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이곳 극동의 분단국가인 한반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첫째는 통일과정에서 경제는 잊으라고 주문하고 싶습니다. 통일은 무엇보다 정치적 임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 통일은 국제 환경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통일과정에서 경제적 실수는 일어나게 마련인데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행착오를 받아들이면서도 가급적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네 번째는 통일과정에서 민영화작업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특히 국유재산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사유재산화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일정기간 놔두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는 평화를 기반으로 한 통일이 체제통합을 앞당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섯 번째는 적응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일곱 번째는 제도의 이전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덟 번째는 통일과정을 상호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홉 번째는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해 있는 양국의 통일은 새로운 국제환경을 만들어 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열 번째는 통일과정은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한반도 화해와 통일문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진지한 관심을 통해 한반도의 화해와 통일이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평화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유럽과 아시아, 미국의 시민사회의 입장에서 본 한반도 화해와 통일을 국제평화라는 맥락에서 살펴본 이틀 간의 열띤 논의가 우리 내부의 장벽을 넘어 널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뒤늦게 비공식 만찬에서의 이야기를 모아 보았다.

이정옥 대구 가톨릭대 사학과 교수
2001/10/01 00:00 2001/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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