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소품을 더 럭져리어스한 걸로….”

(luxuarious: 솔직히 내 주위에서 이 단어의 발음을 정확히 구사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조금 싸 보이지 않니? 좀 있어 보이게 만들어 봐.”

(사람의 눈은 참으로 오묘하다. 적어도 가치를 보는 안목에선.)

대부분 충실한 갑근세 신봉자인 광고마케팅 업계 사람들이 오늘도 고급스러운(?) 소비자를 설득하고자 밤을 지새운다.

요즈음 광고마케팅계에서는 소수의 고소득층을 위한 귀족마케팅이라는 단어가 화두다. 귀족마케팅은 의류업체들이 같은 상표라도 디자인과 소재를 고급화하여 ‘블랙 라벨(black label)’이라고 이름을 붙여 비싼 값에 판매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오늘 ‘럭져리어스(?)’ 한 요즈음의 광고마케팅, 그 블랙 라벨을 들춰보자.

10:90 그의 이미지 전쟁

우선 마케팅 교과서를 펼쳐 보면, 귀족마케팅이란 고소득층 즉 상류층과 중상류층을 대상으로 마케팅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별표와 함께 소위 20:80 법칙, 즉 20%의 제품 구매자가 전체 제품 소비량의 80%를 소비한다는 요점정리가 적혀 있다. 그러나 요즈음엔 이런 20:80 법칙도 이젠 솔직히 낡은 버전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통계청의 2000년도 소득 10분위별 가구당 가계지수를 보면 소득상위 10%의 월평균소득은 605만3050원, 소비지출은 306만7300원인 데 비해 하위 10%의 소득은 68만3500원, 소비지출은 79만3500원으로 상·하류층 간 부의 분배구조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이들 최고 소득층의 범주를 보다 넓게 파악하여 소득 상위 5∼10%층을 귀족마케팅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사회계층을 5개로 분할하는 경우, 최상층(upper class)은 전 인구의 1.5%, 중상층은 12.5% 정도인 것으로 보고 있다고. 이들은 매체노출에서도 다른 소득층과 차이가 난다. 일반적으로 공중파TV보다는 케이블TV 시청 비율이 높으며, 일반적인 일간지보다는 특정 잡지 구독비율(해외잡지나 우리나라의 「오뜨」, 「노블레스」 등)이 높다.

먼저 이들은 높은 가처분소득으로 인해 각종 대형·고급 제품과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주로 VIP 금융서비스, 대형 아파트, 고급 승용차, 디자이너 의류, 골프용품, 고급 문화상품, 대형 전자제품, 고급옵션의 해외여행과 고급 리조트 시설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귀족마케팅의 매력은 이들 시장에서의 소비행동이 다른 소득계층에 주는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 즉 때론 모방으로 때론 큰 영향력으로 상류층의 소비행태는 그보다 아래 단계의 계층으로 확산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10:90의 새로운 이미지 전쟁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 ‘보보스’

그 동안 귀족마케팅에는 치유하기 힘든 지병이 있었다. 잊을 만하면 뉴스를 장식하는 고소득층의 소비행태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바다 건너 미국에서 온 신개념의 치료제(완치는 힘들지만 많은 효과를 보인다)가 있었으니 바로 보보스의 등장이다. 의류 브랜드 이름같이 들리는 보보스(Bobos). 보보스란 부유층을 일컫는 부르주아(Bourgeois)와 자유인의 대명사인 보헤미안(Bohemian)의 합성어로 디지털 시대의 신흥 엘리트 귀족층을 일컫는 말이다.

미국의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자신의 베스트셀러 『BOBOS in Paradise』에서 보보스라는 말을 만들어 낸 이후로 광고마케팅업계의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다. 문화사를 살펴보면 부보다는 예술 및 감성의 성취를 중요시하는 보헤미안 문화는 부의 상징인 부르주아 문화와는 그다지 편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디지털시대의 도래로 자본주의의 대변혁과 함께 아주 독특한 만남이 이뤄져 새로운 귀족층을 형성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보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돈 쓰는 재미로 사는 ‘생각 없는’ 오렌지족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보스는 대부분이 디지털시대의 리더로 사회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인 여유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격조 있는 소비감각을 즐긴다. 지갑 속에는 백화점 명품관의 수백만 원짜리 명품 핸드백을 살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동대문 시장에서 산 무명브랜드의 독특한 세무 가방을 애용할 정도로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즐긴다. 또 부모 세대들과 달리 자유로운 사고방식으로 때로는 사회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고 일과 놀이를 별도로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인생을 사는 방법을 판다

경쾌한 리듬이 흐르는 어느 재즈바. 말쑥한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가 여유롭게 저녁을 즐기다 와이셔츠 차림으로 무대 위에 올라간다. 그는 밴드와 함께 즉석에서 피아노를 치며 흥겨운 재즈곡을 연주하는 등 예술가적인 소양을 발휘한다. 이때 ‘자산 관리는 우리에게 맡기시고 당신은 인생에 투자하십시오’라는 자막이 흘러나온다. 바로 대우증권의 플랜마스터 광고. 촬영은 증권사 객장이 아니라 유명한 재즈바에서 진행됐으며, 실제 재즈 마니아로 알려진 서울치과 병원장 민병진 박사가 자신감 넘친 보보스역을 소화해냈다고. 이 광고에서 증권사다운 수익률 게임 식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주인공에게 부는 기본이고 이를 넘어서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알고 있음을 넌지시 이야기 해준다.

과감하게 ‘대한민국 1%’를 들고 나온 쌍용자동차의 렉스톤, 값비싼 재규어와 고가의 PDP TV를 ‘남자의 장난감’으로 소화한 LG전자의 엑스캔버스 PDP TV, 전자제품을 몽환적이고 예술적인 아트워크로 ‘아름다운 유혹’으로 묘사한 삼성전자의 파브 PDP TV 광고 등도 분명 기존의 광고와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를 보여준다.

예전의 귀족마케팅 광고는 경망스럽게 로고가 드러나는 옷차림이나, 인간미가 미흡함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이미지(예를 들어 바로크·코리안 스타일의 우리나라 예식장 건물을 살펴보자. 물론 돈을 꽤 들여 유럽의 왕궁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고급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드물다)였다면 요즈음 10:90 광고마케팅이 만들어 가고 있는 신귀족에 대한 보고서는 이렇게 쓰여지고 있다.

▲ 인공미보다는 자연친화적 이미지를 좋아한다 ▲남을 따라하기보다는 나름대로 소비철학을 가지고 있다 ▲비정치적인 분야에서 사회와의 좋은 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광고의 스토리라인도 단순히 부를 과시하기보다는 무엇이 진정한 성공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소비자들에게 넌지시 묻는다.

“인생을 여유롭게 사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하고 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위하여

중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한다. “군자는 재물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재물을 취하는 데는 도가 있다.” 바로 요즈음 이야기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그 지위에 맞는 ‘도덕적 의무감’ 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이 사람들의 높은 지위에 부합하는 도덕적 양심과 거기에 합당한 도덕적 행동을 이른다.

물론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문화는 아직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리 길지 않은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역사가 고급 매장에서 블랙라벨을 찾는 이들의 수를 많이 늘려 왔다. 아직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담긴 블랙 라벨을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광고가 걸려 있는 매장, 우리는 소비철학이 담긴 광고 속에서 진정한 블랙 라벨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승철
2002/01/01 00:00 2002/01/01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trackback/5577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