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건의 변화와 문화정치
2002/2002년 01월 :
2002/01/01 00:00
현대 경제의 특징은 기술개발을 촉진시켜 생산성을 높이고, 범지구적인 경쟁체제를 유지하면서 자본과 부를 매우 선택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보자본주의’라고도 한다. 이는 자본 자체에 의존하기보다는 문화와 경제발전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새로운 경제체제다. 여기서 기술은 필수적이다. 기술은 새로운 문화 생산에 큰 몫을 하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부를 창조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신경제와 사회변화
이렇게 다가온 신 경제체제는 시장을 변화시키고 노동과정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미 시장은 국내에서 국제무대로 연장·확대되어 국내적 경제현상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전지구적으로 맞물려 있는 실정이다. 이제 더 이상 국가경제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다. 특히, 한국과 일본 등의 태평양 경제가 세계경제로 편입되면서 국제경제 규모는 점점 커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노동과정 또한 컨베이어벨트에서 단순 작업으로 제품을 생산하던 방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다방면에 익숙한 노동인력이 필요한 체제로 변하고 있다. 일의 형태도 변해 하루 8시간 이상을 한 회사 안에서 생활하던 방식에서 이제는 시간제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약화도 이런 거시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기술을 중심으로 자본, 노동, 정보 그리고 시장이 하나의 망을 이루고 있는 경제체제,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은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한편으로는 자본과 시장이 지구화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범 지구적 자본주의에 한푼의 값어치도 보탤 수 없는 지역은 영원히 낙후되어 슬럼으로 변하고 있다. 따라서 인구의 일부는 경제적으로 항상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사회의 중심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새로운 경제체제는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사회를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누어 사회적 불평등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다. 결국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지는 것이다. 세상은 이제 스스로 알아서 계획하고 행동하는 생산적인 노동자와 전통적인 방식에 젖어 있는 쓸모 없는 노동자로 구분된다. 정보사회는 1인 노동자 제도를 탄생시켰고, 집단노동 방식을 몰아내는 계기가 된다. 여전히 조직에 속해 있는 전통적인 노동자들은 언제 구조조정의 희생자가 될지 몰라 불안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
노동운동의 쇠퇴와 정체성의 정치
기술혁신이 생산성을 높이고, 지식과 정보가 새로운 생산 과정의 필수 요소며, 교육이 곧 노동의 질을 결정한다면,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계층, 즉 경영자와 기술전문가들이야말로 신경제의 핵심 노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에 불과한 이들 그룹을 제외하면 나머지 인력은 모두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노동력이다. 결국 노동력의 질적 차이가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강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20대 80의 사회로, 어쩌면 10대 90의 사회로까지 말이다.
문제는 정보와 지식을 독점한 소수의 전문가들이, 그렇지 못한 나머지 인구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구조를 정보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노동과정의 파편화가 산업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계급적 연대를 무의미한 개념으로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근로자들에게 분명한 사회·정치적 위치와 의미를 제공했던 계급의 개념은 불안정해질 뿐만 아니라, 계급이 지역, 교육, 성차와 같은 다른 사회적 정체성을 총괄하고 대표하는 지배적 정체성의 역할을 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대 사회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가늠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근로자들 대부분이 가졌던 뚜렷한 계급의식과 연대의식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것 못지않게 지역, 성, 학력이나 혈연을 중심으로 더 심하게 분열되어 있다. 정보자본주의 자체가 지식과 정보의 유무로 사회 구성원이 나뉘는 사회인 것을 감안하면, 계급의 전통적 의미는 쇠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구성요소끼리 서로 충돌하고, 서로를 대체하면서 모순적으로 정체성이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노동운동에 앞장선 노조의 간부가 근로자로서의 계급적 정체성을 앞세운 진보적 정치성향을 나타내기보다 지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도 페미니즘과 환경운동에 동참할 수 있으니, 바로 이런 복잡한 정체성의 정치가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이렇게 파편화된 정체성들이 서로 경합하는 양상을 보인다. 만약 지금 모든 노동운동을 불합리한 것으로 몰고 가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면, 그것은 보수정치가 시민들을 그렇게 묘사하는 데 잠정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인 것이지, 노동운동 자체가 반사회적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정치는 얼마나 시민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일종의 ‘의미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과 언론개혁ㅠ>
여기서 의미투쟁은 지배그룹들이 현 체제를 정당화해서 그것을 피지배그룹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상식의 차원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문화과정을 일컫는다. 지배그룹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상식체계를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짜맞추는 일이다. 반면에 피지배그룹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지배그룹과 맞서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서로가 양보할 수 없기 때문에 투쟁의 목소리 또한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다양한 사회그룹들이 벌이는 사회적 갈등은 실제로 문화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노동운동조차도 궁극적인 목적은 경제적인 이익과 직결되어 있지만, 일차적인 전선은 경제와 무관한 문화적인 영역에 형성되어 있다. 투쟁의 성공여부가 길거리에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라, 언론에서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언론의 논조에 따라 노동운동의 정당성이 다르게 평가되고, 승패가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운동은 언론을 통해 상징조작을 일삼는 문화정치로 대체되고 있다. 여기서 언론은 현실을 재현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한다. 권력은 복지정책을 펼 수 없는 정부나 세계 자본에 휘둘리는 국가의 전유물이 더 이상 아니다.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 이익집단의 교섭기관으로 추락한 국회 역시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정치제도 자체가 권력을 갖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권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산업사회에서의 방식과 다르게 권력이 생산되고 있을 뿐이다. 정보사회의 권력은 문화적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이란 언어와 담론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현실은 힘 있는 사회 그룹이 힘이 실린 언어로 정의해 놓은 담론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한국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언론보도는 단순히 하나의 언어적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의미투쟁의 중심에 있는 언론의 개혁이 모든 사회운동에 선행되어야 한다. 신 경제체제에서 낙오된 80%가 정당한 제 몫을 확보하는 문제는, 언론이 얼마나 현실을 사실대로 재현하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언론이 지배적 의미만을 생산하면서 지배그룹의 일원으로 행동한다면, 이에 맞서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안적 의미를 생산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의미투쟁은 물질적 자원을 놓고 벌이는 또 다른 투쟁이기 때문이다.
신경제와 사회변화
이렇게 다가온 신 경제체제는 시장을 변화시키고 노동과정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미 시장은 국내에서 국제무대로 연장·확대되어 국내적 경제현상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전지구적으로 맞물려 있는 실정이다. 이제 더 이상 국가경제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다. 특히, 한국과 일본 등의 태평양 경제가 세계경제로 편입되면서 국제경제 규모는 점점 커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노동과정 또한 컨베이어벨트에서 단순 작업으로 제품을 생산하던 방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다방면에 익숙한 노동인력이 필요한 체제로 변하고 있다. 일의 형태도 변해 하루 8시간 이상을 한 회사 안에서 생활하던 방식에서 이제는 시간제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약화도 이런 거시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기술을 중심으로 자본, 노동, 정보 그리고 시장이 하나의 망을 이루고 있는 경제체제,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은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한편으로는 자본과 시장이 지구화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범 지구적 자본주의에 한푼의 값어치도 보탤 수 없는 지역은 영원히 낙후되어 슬럼으로 변하고 있다. 따라서 인구의 일부는 경제적으로 항상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사회의 중심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새로운 경제체제는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사회를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누어 사회적 불평등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다. 결국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지는 것이다. 세상은 이제 스스로 알아서 계획하고 행동하는 생산적인 노동자와 전통적인 방식에 젖어 있는 쓸모 없는 노동자로 구분된다. 정보사회는 1인 노동자 제도를 탄생시켰고, 집단노동 방식을 몰아내는 계기가 된다. 여전히 조직에 속해 있는 전통적인 노동자들은 언제 구조조정의 희생자가 될지 몰라 불안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
노동운동의 쇠퇴와 정체성의 정치
기술혁신이 생산성을 높이고, 지식과 정보가 새로운 생산 과정의 필수 요소며, 교육이 곧 노동의 질을 결정한다면,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계층, 즉 경영자와 기술전문가들이야말로 신경제의 핵심 노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에 불과한 이들 그룹을 제외하면 나머지 인력은 모두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노동력이다. 결국 노동력의 질적 차이가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강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20대 80의 사회로, 어쩌면 10대 90의 사회로까지 말이다.
문제는 정보와 지식을 독점한 소수의 전문가들이, 그렇지 못한 나머지 인구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구조를 정보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노동과정의 파편화가 산업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계급적 연대를 무의미한 개념으로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근로자들에게 분명한 사회·정치적 위치와 의미를 제공했던 계급의 개념은 불안정해질 뿐만 아니라, 계급이 지역, 교육, 성차와 같은 다른 사회적 정체성을 총괄하고 대표하는 지배적 정체성의 역할을 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대 사회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가늠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근로자들 대부분이 가졌던 뚜렷한 계급의식과 연대의식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것 못지않게 지역, 성, 학력이나 혈연을 중심으로 더 심하게 분열되어 있다. 정보자본주의 자체가 지식과 정보의 유무로 사회 구성원이 나뉘는 사회인 것을 감안하면, 계급의 전통적 의미는 쇠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구성요소끼리 서로 충돌하고, 서로를 대체하면서 모순적으로 정체성이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노동운동에 앞장선 노조의 간부가 근로자로서의 계급적 정체성을 앞세운 진보적 정치성향을 나타내기보다 지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도 페미니즘과 환경운동에 동참할 수 있으니, 바로 이런 복잡한 정체성의 정치가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이렇게 파편화된 정체성들이 서로 경합하는 양상을 보인다. 만약 지금 모든 노동운동을 불합리한 것으로 몰고 가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면, 그것은 보수정치가 시민들을 그렇게 묘사하는 데 잠정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인 것이지, 노동운동 자체가 반사회적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정치는 얼마나 시민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일종의 ‘의미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과 언론개혁ㅠ>
여기서 의미투쟁은 지배그룹들이 현 체제를 정당화해서 그것을 피지배그룹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상식의 차원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문화과정을 일컫는다. 지배그룹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상식체계를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짜맞추는 일이다. 반면에 피지배그룹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지배그룹과 맞서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서로가 양보할 수 없기 때문에 투쟁의 목소리 또한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다양한 사회그룹들이 벌이는 사회적 갈등은 실제로 문화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노동운동조차도 궁극적인 목적은 경제적인 이익과 직결되어 있지만, 일차적인 전선은 경제와 무관한 문화적인 영역에 형성되어 있다. 투쟁의 성공여부가 길거리에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라, 언론에서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언론의 논조에 따라 노동운동의 정당성이 다르게 평가되고, 승패가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운동은 언론을 통해 상징조작을 일삼는 문화정치로 대체되고 있다. 여기서 언론은 현실을 재현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한다. 권력은 복지정책을 펼 수 없는 정부나 세계 자본에 휘둘리는 국가의 전유물이 더 이상 아니다.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 이익집단의 교섭기관으로 추락한 국회 역시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정치제도 자체가 권력을 갖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권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산업사회에서의 방식과 다르게 권력이 생산되고 있을 뿐이다. 정보사회의 권력은 문화적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이란 언어와 담론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현실은 힘 있는 사회 그룹이 힘이 실린 언어로 정의해 놓은 담론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한국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언론보도는 단순히 하나의 언어적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의미투쟁의 중심에 있는 언론의 개혁이 모든 사회운동에 선행되어야 한다. 신 경제체제에서 낙오된 80%가 정당한 제 몫을 확보하는 문제는, 언론이 얼마나 현실을 사실대로 재현하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언론이 지배적 의미만을 생산하면서 지배그룹의 일원으로 행동한다면, 이에 맞서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안적 의미를 생산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의미투쟁은 물질적 자원을 놓고 벌이는 또 다른 투쟁이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