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남가주 한인노동상담소의 저녁 풍경은 어수선하다. 어느덧 퇴근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직원들은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있다. 직장인들의 퇴근에 맞춰 홍보전단을 돌리고 사무실에 돌아온 회원들, 자원봉사를 하러온 UCLA 학생들로 시끌벅적하다. 그 중 가장 활기 넘치는 곳은 아씨마켓 노조설립 모임이 열리고 있는 회의실. 방 한쪽 벽에는 아씨마켓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한 명도 빠짐없이 적혀 있다.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밤을 하얗게 새우던 70, 80년대 우리 노동운동이 떠오른다.

분주한 사무실 한켠에서 ‘그’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어찌나 정답게 말을 하는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온다. 그는 필자가 LA에 머무는 동안 자기 집을 숙소로 제공하는 엄청난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 이유는 단지 ‘한식구’이기 때문이란다(우린 이제 겨우 두번째 만나는 사이인데…).

필자가 점심 약속시간을 훌쩍 넘겨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도 그는 ‘아이구 이런 웬수, 연락 좀 하지…’ 라고 했다. 또 그는 쉽게 필자에게 ‘언니’라고 불렀다. ‘한식구’나 ‘웬수’, ‘언니’라는 호칭은 남녀사이에서 평범하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사람을 참 편하게 대하시네요”라는 말에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만만히 봐서 탈이라고 위악을 부린다. ‘그’가 바로 LA에 하나뿐인 한인노동상담소의 박영준 소장이다.

재미 한인들의 노동현실, ‘남청여봉’

하지만 그는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 구세군 사관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온 그는 고등학교 때 이미 정당한 싸움은 이긴다는 아무나 얻을 수 없는 진리를 체득했으니 말이다. 한인을 비롯해 이민자들의 비율이 미국 어느 곳보다 높은 샌프란시스코의 시 당국이 이중언어교육을 실시하겠다고 공언해놓고도 정작 박 소장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예산부족을 핑계로 한인 시간강사를 내쫓았다고 한다.

교장 면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 그는 친구들의 서명을 받아 교육청 앞에서 시위를 했고 그 임시교사는 전임교사가 되어 돌아왔다. 어떻게 고등학생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대신 80년대 북가주 한인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철수 사건’을 들려주었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고 나면 갈 데가 없었던 이철수는 자연스레 중국인 갱 조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데 이 조직이 관광객 살해사건에 연루되었다. 중국인 지역사회의 힘 덕분에 중국인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이철수만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뒤늦게 동포사회는 이철수 대책위원회를 꾸렸는데 어린 나이의 박 소장도 여기에 가담하면서 사회의식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광주항쟁으로 미국에 망명해 온 윤한봉 선생으로부터 체계적인 역사학습과 우리말 교육을 받으며 한국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84년엔 한국에 들어가 넉 달 동안 전남대에서 탈춤, 북, 장고 등 전통문화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낮은 곳으로 향하게 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광주’였다. 그 역시 광주항쟁 직후 교내에 걸린 학살 사진을 보며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떳떳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남청여봉’이란 말이 있었다. 남자는 청소, 여자는 봉제란 말을 줄인 것으로 재미 한인들의 노동 현실을 대변해주는 조어다. 그는 청소일을 하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미국노총 서비스노조(SEIU)에서 자원봉사활동과 재미한국청년연합활동을 하다가 교포사회의 규모가 제일 큰 LA로 이주해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나 8가 갈 거예요”

노동상담소를 열고 활동을 시작하는 데에는 만만찮은 장벽들이 있었다. 한국인 이민자 대부분이 ‘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한인사회에 팽배한 ‘성공한 소수민족 모델’은 노동자나 노조를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한인 사회에도 ‘노동자’가 있다는 소박한 외침마저 외면당할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창립 초기에는 동포들의 자잘한 고민들을 해결해주는 봉사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LA폭동 이후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면서 상담소는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LA폭동 이후 파괴된 코리아타운을 복구하기 위해 많은 돈이 모금되었는데 이 성금이 대부분 가게를 가진 사업주들에게만 분배되었던 모양이다. 상담소를 찾아온 50여 명의 종업원들은 ‘직장도 잃고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왜 우리들에게는 성금이 배분되지 않느냐’고 울분을 터트렸다.

상담소는 곧바로 한인사회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배분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하여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모금액의 일부를 종업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 또 불법체류자란 약점을 잡고 종업원에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월급으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거나 팁마저 갈취하는 한인타운의 몇몇 식당을 대상으로 강력한 불매운동을 펴고 이를 승리로 이끌면서 한인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한인타운에서 일하는 남미의 이민노동자들도 한인 업주에게 부당노동행위를 당하면 “나, 8가에 갈거예요”라고 응수한단다. 8가는 상담소가 있는 거리 이름이다.

상담소 창립 10주년을 앞두고 있는 요즈음 그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사람’이다. 이곳의 사회운동도 한국의 사회운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대학마다 한국 혈통의 미국인(Korea-American)들의 학습모임, 풍물모임 등이 활발해 사회운동에 활동가를 대주는 구실을 해왔는데 90년대 들어 점차 쇠퇴하더니 요즈음에는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일반 기업이나 정부기관처럼 월급을 많이 줄 수도 없어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 게 여간 힘들지 않다는 얘기다.

“정치의식이 무척 중요해요. 창조적인 아이디어나 열정은 돈(benefit)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힘주어 얘기하는 ‘사람’이야기를 듣다보니 문득 우리들은 ‘정치의식’이란 걸 갖고 살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더불어 한국사회 역시 갈수록 늘어나는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소박한 진실에 다시금 생각이 미치게 된다.

박영선
2002/01/01 00:00 2002/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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