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1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시민사회 발전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경실련 이석연 전 사무총장과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 사이에 독기 어린 설전이 오간 이후 시민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논의가 분분하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선일보』, 『월간 조선』에서 최근 논란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먹이가 걸려들었다는 만족스러운 눈빛이 눈에 선하다. 예전에도 환경연합 최열 사무총장의 사외이사 파문을 비롯, 시민운동 진영에게서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을 걸 발견하면 우악스럽게 달려들던 『조선일보』 집단이므로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논란은 이후 시민운동의 전략적 행보와도 연관된 중요한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기에 이전의 일회성 시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석연-박원순 논쟁의 세 논점

이석연 경실련 전 사무총장이 시민운동 내의 ‘합리적 보수’세력을 대변한다면서 제기한 문제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법 절차주의 문제다. 율사 출신인 이석연 씨는 시민운동이 자유민주주의의 실정법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 테두리 안에서 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로 제기된 사안은 지난 16대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가 벌인 낙천낙선운동인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이 총선시민연대의 ‘과도함’을 질책하는 대목도 대개 이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에 반해 박원순 사무처장은 헌법정신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하는 그릇된 실정법은 시민불복종운동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시민불복종운동이 시민운동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라고 반박한다.

두번째는 시민운동의 정치참여 문제다. 최근 환경연합 등에서 지방자치선거에 참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석연 씨는 이를 시민운동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선거에 직접 참여하려는 최근의 계획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 했던 총선시민연대 활동까지 사정권에 넣은 것이다. 이 역시 보수언론으로부터 익히 들어오던 내용이다.

세번째는 시민운동단체 간의 상설적 연대기구를 만드는 게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다. 이석연 씨는 연대기구는 필요하지만 이를 상설화하는 것은 시민운동의 다양성과 자발성을 그르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박수받는 운동만 해라?

경실련 대 참여연대 논쟁이라고들 하지만, 막상 이석연 씨의 논조가 경실련의 공식 입장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더 많았다. 더구나, 그 후 경실련 사무총장직은 다른 분에게로 넘어갔다. 상당 부분, 시민운동 ‘내부’의 논쟁이었다기보다는 일부 시민운동계 인사가 총선시민연대 활동 이후 시민운동을 강도 높게 비판해온 보수언론의 나팔수 역할을 한 논쟁이었다고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그래서 소속 단체의 공식 입장과도 상관없는 개인의 목소리가 휘황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논지의 한쪽 당사자는 사실상 보수언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수언론의 논지는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너희 시민운동은 모두로부터 박수 받는 운동만 하라”는 것이다. 우선 법 절차주의의 문제. 아직 시민운동 세력과 보수언론 사이에 밀월관계가 존재했던 90년대 초반처럼 법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상층 언론 플레이에만 치중하는 활동, 거기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것 이상의 무엇을 시도하는 순간, ‘시민운동’은 ‘시민운동’이 아니다. 보수언론의 만년 천덕꾸러기인 ‘민중운동’과 같은 뭔가 불순한 세력이 되는 것이다.

다음, 정치 참여 문제. 사실 시민운동 단체에 이름 하나 걸어놓았다가 보수정당으로 입신양명하여 소위 그 ‘시민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데 한몫 한 사람들도 있었다. 과거에도 이런 행태에 대해 다소 도덕적인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뭇 정치적인 차원의 비판이 가해진다. 즉 시민운동측의 정치 참여가 좀더 조직적이고 운동적인 양상을 취할수록 보수 지식인들은 더욱더 의혹의 촉각을 곤두세운다. ‘비정치적인’ 시민운동이 ‘정치’를 농단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바람직한 시민운동이 아니다. 시민운동은 시민의 공동선을 위한 것이고 정치는 세력과 세력이 맞부딪치는 이전투구 판인데, 시민운동이 특정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겠다니.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대기구 문제. 이는 앞의 정치세력화 문제와 직결된다. 상설 연대기구가 비판받는 것은 이것이 정치세력화의 한 수순으로 보인다는 점에서다. 아무튼 시민운동은 ‘세력화’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비판 논리를 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전교조가 출범할 때 수구 세력이 동원한 공격 논리다. “어떻게 ‘선생님들’이 노조를 만들 수 있는가?” 그림자도 밟을 수 없다는 그 선생님들이 어찌 천한 노동자들이나 만드는 노동조합을 만드시겠다는 겁니까? 그러면서 저들은 선생님들을 개 패듯이 팼다. 오늘날 이는 시민운동 단체들에게 돌려진다. “어떻게 ‘순수한 시민운동’이 정치라는 것을 하려 드는가?” 이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고상하고 순수한 활동을 벌여야 할 시민운동이 어찌 천한 정치라는 데 신경을 쓰시겠다는 겁니까? 그러면서 강철 펜대의 몽둥이질이 시작된다.

과감한 시민불복종운동을 해야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보수세력에게 이러한 비판의 여지를 만들어준 데는 시민운동 자신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없다. 여기에 시민운동 주체들이 직시하고 극복해야 할 현실이 있다.

시민운동이 특정한 사회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운동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대변하는 운동이라는 이미지는 누구보다도 시민운동의 대변자들이 가장 즐거이 받아들여온 것이었다. ‘시민사회’라는 장이 계급과 계급이 맞부딪치는 장이라기보다는 그런 투쟁으로부터 벗어난 보편적 선을 형성하는 장인 것처럼 다뤄지던 때가 언제부터였던가?

하지만, 현실이 과연 그러할까? 낙천낙선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직면하면서 우리가 확인한 사실은 적은 시민사회 ‘내부’에 있다는 것, 그것 아닌가? 또한 시민운동의 보편타당한 개혁적 요구들을 관철시키는 과정에서조차 우리는 특정한 정치 세력들과의 대결 혹은 연합이 관건임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결국 누군가와는 싸워야 하며, 그들이 지금 당장은 결코 우리 사회의 소수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는 박수를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이들에게는 ‘공동선’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들지 않는 게 좋다.

말하자면, 이제 더 이상 시민운동은 “모두로부터 박수받는 운동”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환상이 보수세력에 의해 자승자박이 되어 돌아오는 일은 2001년 가을로 끝나야 한다. 시민운동은 더욱더 과감히 시민불복종운동에 나서야 하고, 더욱더 적극적으로 정치세력화해야 하며, 더욱더 대담하게 민중운동 진영과도 연대의 틀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할 만큼 충분히 이 사회는 나락을 향해 가고 있고, 노동자와 서민의 적들도 많다. 그 적들로부터는 이제 박수 대신 돌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저들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장석준
2002/01/01 00:00 2002/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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