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신년 희망가
2002/2002년 01월 :
2002/01/01 00:00
슬레이트 지붕에 어둠이 내리니 해발 650미터 폐석산엔 저녁달이 걸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는 지하노동 마치고 막 갱도를 빠져나온 광부의 뺨을 적신다. 입술마저 새까맣게 채색된 얼굴. 먹빛 하늘 아래로 내뱉는 긴 한숨엔 삶의 무게가 실려 더욱 고단해 보인다.
59년 탄전이 개발된 사북은 74년 태백선이 연결되면서 고한 일대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석탄 채굴지가 되었다. 석탄산업이 호황일 때 이 동네에선 강아지들도 입에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지만 지금은 여느 시골마을의 고즈넉한 읍내풍경과 다를 게 없다. 좁다란 차도를 끼고 일자로 들어선 ‘사북의 명동’엔 자줏빛 보자기 쟁반을 들고 커피 나르는 다방아가씨나 트럭을 세워놓고 ‘남싸롱’ 옷을 파는 노천의상실 주인들이 겨울바람을 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카지노 개장과 폐광노동자들의 실직
사북에는 참여연대 회원이 딱 둘 있다. 탄광지역 노동운동을 하다 정선지역발전연구소에 적을 두고 지역운동에 복무하고 있는 김창완 씨(정선지역발전연구소장)와 92년 10월 26일 사북 유일의 탄광 동원탄좌에 입적한 김선호 씨(45세)다.
둘은 가끔 만나지만 자주 보지는 못한다. 김선호 씨는 3교대 근무를 하기 때문에 24시간 중 8시간은 언제나 지하 막장에 있고, 김창완 씨는 연구소 일에다 광산지역의 고달픈 사람들을 위한 자활센터 운영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인 신문보급소 일까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사람인 것 같다. 필자가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 찾아간 날도 그의 핸드폰에선 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김선호 씨는 9년째 고향인 서울을 떠나 사북에서 광부로 살고 있다. 80년대 중반 석탄산업이 번성할 때는 4000명이 넘는 광부가 이 지역에 북적였다지만 지금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광부들이 마지막 갱도를 지키고 있다. 사북지역에 남아 있는 광부의 수는 하청업체 종사자까지 합쳐 총 300명 수준.
“석탄산업이 사양길이니까요. 걱정거리는 저 너머에 메인 카지노 건설이 시작되면서 느는 건 모조리 향락산업뿐이라는 겁니다. 그나마 몇 안 되던 서점도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구요. 느는 건 술집, 전당포, 유흥주점이에요. 청소년 교육환경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어요.”
그는 메인 카지노가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면 마약이나 매매춘, 조직폭력배 문제도 심각해질 거라고 우려했다. 옆 동네 고한에도 스몰 카지노가 들어선 이후 전당포가 늘어나 미관을 찌푸리게 한다고 걱정했다.
그가 이렇게 걱정을 늘어놓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카지노가 개장하게 되면 마지막 광업소인 동원탄좌도 문을 닫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카지노와 광산, 상상만 해도 너무나 안 어울리는 풍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카지노 건설은 대우가 맡아 시공 중이며, 해발 650미터 아래로 뻗은 수직갱도 너머엔 외형을 갖춘 카지노 건물이 시퍼런 천막을 너풀거리며 시야에 잡힌다. 카지노 건설 현장로와 동원탄좌 광산노동자들의 출근길은 통해 있다. 동원탄좌 노동자들은 출근길에 오르며 마지막으로 폐광될 동원탄좌 광업소의 운명을 매일 점치고 있으리라.
솔직히 말하면 광산에 남아 있는 광부의 80∼90%는 하루 빨리 광산 문이 닫히길 바란단다. 그 이유는 비록 일자리는 잃게 되지만 학자금 혜택과 퇴직금, 국가에서 주는 폐광대책비를 받으면 작게나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창완 씨는 섣불리 창업을 권하지 않는다. 평생 지하갱도에 몸바쳐온 사람들이 어느 날 사업으로 망하는 날엔 걷잡을 수 없는 상처가 남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쉽게 덤비지 말고 철저히 알아본 후에 창업해야 한다는 것.
사북 주민들과 함께 전파사용료 폐지 서명운동 벌여
김선호 씨는 지난 99년 1월 참여연대에 가입했다. 94년 창립 이후 경실련, 환경연합과 함께 눈여겨보던 단체였다. 생계 때문에 직접 나서지는 못하지만 이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시민단체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조금 보태고 싶었다. 그래서 매월 1만 원씩 꼬박꼬박 회비라도 열심히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 참여연대 활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참여연대가 관심 갖는 폭이 예전보다 넓어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공직자 부패, 대기업의 부조리 그런 굵직굵직한 사안이었는데 점점 영역이 확대되어 가더군요. 물론 참여연대가 당연히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면 안 되죠. 참여연대가 못할 일도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대기업이 소화할 능력도 없으면서 문어발 식으로 기업을 확장하듯이 참여연대도 아직 역량이 미흡한데 너무 많은 분야로 일을 넓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해서 심도있고 집요하게 하느니만 못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들죠.”
한 분야로 집중하는 만큼의 열정과 능력이 여러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될 정도로 많다면 금상첨화이지만 아직 우리 시민운동의 단계는 그 만큼 충분치 않은 것 같다고 걱정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기를 당부하기도 한다. 그간 참여연대 사업의 베스트3를 꼽으면 이렇다.
첫째, 재계 1위 삼성그룹의 부당·편법 증여세를 집요하게 파고든 것. 둘째, 최순영 전 대한생명 회장의 외화도피혐의를 끝까지 물고늘어진 것. 셋째,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
“이 일들은 정말 속이 후련했어요. 인상깊은 일이지요. 삼성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국회의원들을 감히 누가…. 그런데 참여연대가 했잖아요. 정말 기분좋더군요. 전 개인적으로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심각한 무리들이 부패한 공직자들이라고 생각해요. 이 나라는 희망이 없구나, 하면서 절망에 빠져 이민 갈 생각만 하는 사람들에게 시민단체가 희망의 작은 씨앗을 틔워주고 있는 거죠. 시민단체는 불가능한 것도 희망으로 되살리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해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듣는 이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김선호 씨 같은 회원이 있기에 시민운동이 힘을 얻는 것 같다. 김선호 씨는 오지에 살고 있지만 회원으로서 성실히 시민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99년 8월 참여연대가 휴대전화 전파사용료 폐지운동을 벌일 때 그는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로 전화 한 통을 넣었다. 사북지역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운동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것. 그가 살고 있는 동원탄좌 직원아파트 주민들, 평소 잘 드나드는 생맥주집 주인, 시장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해 5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보내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낙선운동이 한창이던 2000년 4월, 낙천대상이던 K모 후보에 대해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상대당 후보이던 P모 후보가 워낙 지역민심을 잃었던 터라 대안이 없던 지역주민들이 할 수 없이 K모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이다.
“그럴 때 참 고민되더라구요. 지역주민들의 정서는 제 주장과 상반되는데, 그럴 때 참여연대 회원으로서 제 소신이 너무 약한 게 아닌가 생각되었어요. 소신대로 했다면 성과를 거뒀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 말이에요. 결국 제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라 생각하고 반성했습니다.”
사실 참여연대에서 6년째 일하고 있는 상근자도 동네주민에게 서명 한 장 선뜻 받기 어려운데, 그는 혼자서 주민들의 서명을 500장이나 받아놓고, 낙천후보에 대한 지역활동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앞에선 솔직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래도 그는 “여가시간 남을 때 짬짬이 하는 것뿐이에요. 하루종일 매달려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참여연대 분들과 어떻게 비교하겠어요?”라고 한다. 점점 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도록 하는 분이었다.
탄광의 하루
3교대 병반이 된 날, 그는 밤 11시에 출근한다. 갑반이면 아침 8시, 을반이면 오후 4시 출근이다. 병반일 때는 빵이나 우유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기지만 갑반이나 을반일 때는 꼭 도시락을 싼다. 막장에서 속을 든든이 채워줄 일용할 양식이다.
학교 교사 같은 큰 건물 3층. 실내는 어두컴컴하지만 계단을 성큼성큼 내딛는다. 회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마스크와 갯부(안전등), 안전 핼맷을 쓰면 준비 끝. 입갱할 때는 갱도의 엘리베이터(수갱도) 앞에 한 줄로 서서 들어간다. 20∼30명씩 인차에 올라타면 안전을 점검한 뒤 쇠문으로 고리를 채우고 땡땡땡! 하는 징소리와 함께 고속으로 내려간다.
그가 일하는 갱은 지하 11편이다. 1편당 50m. 탄광사람들은 4자를 싫어해 4편은 없다. 그래서 그가 일하는 곳은 지하 500m이다. 언제나 생각되는 것이지만 어두움에 비례해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2분 남짓…. 항사무실에 도착하면 모노레일 같은 인차가 기다린다. 인차를 타고 작업장이 있는 곳까지 3km 정도 들어가면 감독이 오늘 하루의 작업을 배치해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하세계는 영화 <인디아니존스>처럼 어두워 자칫 길을 잃으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단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아 막장에선 누구나 긴장한 채로 같이 행동한다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연장은 곡괭이, 삽, 톱, 도끼, 긴 장대를 닮은 노미다. 탄을 캐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공구다. 돌을 깨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공기를 동력으로 해서 풍력으로 구멍도 뚫고, 커다란 돌덩이도 기계로 뚫는다. 그렇게 뚫린 길에서 그는 채탄작업을 하는 것이다.
막장에서 물은 필수다. 밥은 한 끼 굶어도 일할 수 있지만 탄가루로 깔깔한 목을 축일 수 있는 물 없이는 단 한순간도 일할 수 없다. 그래서 광산노동자들은 1년 열두 달을 매일같이 냉동실에 물을 얼려둔다고.
9년째 지하갱도에서 일하다보니 사고로 인한 죽음을 자주 목도했다. 때로는 동료의 사체를 함께 인양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제 그는 막장에서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어졌다.
마흔다섯이지만 그는 아직 미혼이다. 하지만 슬하에 딸 같은 조카가 있다.
처음 사북에 왔을 때 하숙하던 집의 딸이다. 그 집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며 일수놀이를 했는데 그게 잘못되어 야반도주하게 됐다.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딸을 홀로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허물어져가는 집안에 덩그러니 있던 그 아이를 데려다 기른 게 인연이 되어 삼촌 조카 사이가 됐다. 지금은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매일 도시락도 싸주고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명절 때가 되면 요즘도 그를 찾아온다.
마지막 남은 동원탄좌 문을 닫으면 그는 다시 서울로 갈 생각이란다. 9년 간 땀흘려 벌어놓은 돈과 폐광대책비, 퇴직금을 받아 작은 사업을 다시 시작할 작정이다. 아직 무엇을 할지는 정해놓지 않았다. 다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게 고마울 뿐이다.
사북을 떠나던 날 밤, 첫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눈비가 오는 날엔 강원도는 쥐약이라며 그는 내내 걱정했다. 여성 둘이서 이 깜깜한 밤길을 어떻게 헤쳐가려 하느냐며 사북에도 깨끗한 여관이 있으니 자고 가라 했다. 그러나 일정이 바빠 서둘러 올라왔고, 그런 여행길이 너무 고단했던지 몸살이 났다. 끙끙 앓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북까지 오시느라 너무 무리하셨군요.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그는 출발 이후 아직까지도 내내 이쪽만 걱정하고 있었다.
59년 탄전이 개발된 사북은 74년 태백선이 연결되면서 고한 일대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석탄 채굴지가 되었다. 석탄산업이 호황일 때 이 동네에선 강아지들도 입에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지만 지금은 여느 시골마을의 고즈넉한 읍내풍경과 다를 게 없다. 좁다란 차도를 끼고 일자로 들어선 ‘사북의 명동’엔 자줏빛 보자기 쟁반을 들고 커피 나르는 다방아가씨나 트럭을 세워놓고 ‘남싸롱’ 옷을 파는 노천의상실 주인들이 겨울바람을 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카지노 개장과 폐광노동자들의 실직
사북에는 참여연대 회원이 딱 둘 있다. 탄광지역 노동운동을 하다 정선지역발전연구소에 적을 두고 지역운동에 복무하고 있는 김창완 씨(정선지역발전연구소장)와 92년 10월 26일 사북 유일의 탄광 동원탄좌에 입적한 김선호 씨(45세)다.
둘은 가끔 만나지만 자주 보지는 못한다. 김선호 씨는 3교대 근무를 하기 때문에 24시간 중 8시간은 언제나 지하 막장에 있고, 김창완 씨는 연구소 일에다 광산지역의 고달픈 사람들을 위한 자활센터 운영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인 신문보급소 일까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사람인 것 같다. 필자가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 찾아간 날도 그의 핸드폰에선 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김선호 씨는 9년째 고향인 서울을 떠나 사북에서 광부로 살고 있다. 80년대 중반 석탄산업이 번성할 때는 4000명이 넘는 광부가 이 지역에 북적였다지만 지금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광부들이 마지막 갱도를 지키고 있다. 사북지역에 남아 있는 광부의 수는 하청업체 종사자까지 합쳐 총 300명 수준.
“석탄산업이 사양길이니까요. 걱정거리는 저 너머에 메인 카지노 건설이 시작되면서 느는 건 모조리 향락산업뿐이라는 겁니다. 그나마 몇 안 되던 서점도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구요. 느는 건 술집, 전당포, 유흥주점이에요. 청소년 교육환경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어요.”
그는 메인 카지노가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면 마약이나 매매춘, 조직폭력배 문제도 심각해질 거라고 우려했다. 옆 동네 고한에도 스몰 카지노가 들어선 이후 전당포가 늘어나 미관을 찌푸리게 한다고 걱정했다.
그가 이렇게 걱정을 늘어놓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카지노가 개장하게 되면 마지막 광업소인 동원탄좌도 문을 닫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카지노와 광산, 상상만 해도 너무나 안 어울리는 풍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카지노 건설은 대우가 맡아 시공 중이며, 해발 650미터 아래로 뻗은 수직갱도 너머엔 외형을 갖춘 카지노 건물이 시퍼런 천막을 너풀거리며 시야에 잡힌다. 카지노 건설 현장로와 동원탄좌 광산노동자들의 출근길은 통해 있다. 동원탄좌 노동자들은 출근길에 오르며 마지막으로 폐광될 동원탄좌 광업소의 운명을 매일 점치고 있으리라.
솔직히 말하면 광산에 남아 있는 광부의 80∼90%는 하루 빨리 광산 문이 닫히길 바란단다. 그 이유는 비록 일자리는 잃게 되지만 학자금 혜택과 퇴직금, 국가에서 주는 폐광대책비를 받으면 작게나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창완 씨는 섣불리 창업을 권하지 않는다. 평생 지하갱도에 몸바쳐온 사람들이 어느 날 사업으로 망하는 날엔 걷잡을 수 없는 상처가 남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쉽게 덤비지 말고 철저히 알아본 후에 창업해야 한다는 것.
사북 주민들과 함께 전파사용료 폐지 서명운동 벌여
김선호 씨는 지난 99년 1월 참여연대에 가입했다. 94년 창립 이후 경실련, 환경연합과 함께 눈여겨보던 단체였다. 생계 때문에 직접 나서지는 못하지만 이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시민단체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조금 보태고 싶었다. 그래서 매월 1만 원씩 꼬박꼬박 회비라도 열심히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 참여연대 활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참여연대가 관심 갖는 폭이 예전보다 넓어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공직자 부패, 대기업의 부조리 그런 굵직굵직한 사안이었는데 점점 영역이 확대되어 가더군요. 물론 참여연대가 당연히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면 안 되죠. 참여연대가 못할 일도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대기업이 소화할 능력도 없으면서 문어발 식으로 기업을 확장하듯이 참여연대도 아직 역량이 미흡한데 너무 많은 분야로 일을 넓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해서 심도있고 집요하게 하느니만 못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들죠.”
한 분야로 집중하는 만큼의 열정과 능력이 여러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될 정도로 많다면 금상첨화이지만 아직 우리 시민운동의 단계는 그 만큼 충분치 않은 것 같다고 걱정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기를 당부하기도 한다. 그간 참여연대 사업의 베스트3를 꼽으면 이렇다.
첫째, 재계 1위 삼성그룹의 부당·편법 증여세를 집요하게 파고든 것. 둘째, 최순영 전 대한생명 회장의 외화도피혐의를 끝까지 물고늘어진 것. 셋째,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
“이 일들은 정말 속이 후련했어요. 인상깊은 일이지요. 삼성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국회의원들을 감히 누가…. 그런데 참여연대가 했잖아요. 정말 기분좋더군요. 전 개인적으로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심각한 무리들이 부패한 공직자들이라고 생각해요. 이 나라는 희망이 없구나, 하면서 절망에 빠져 이민 갈 생각만 하는 사람들에게 시민단체가 희망의 작은 씨앗을 틔워주고 있는 거죠. 시민단체는 불가능한 것도 희망으로 되살리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해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듣는 이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김선호 씨 같은 회원이 있기에 시민운동이 힘을 얻는 것 같다. 김선호 씨는 오지에 살고 있지만 회원으로서 성실히 시민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99년 8월 참여연대가 휴대전화 전파사용료 폐지운동을 벌일 때 그는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로 전화 한 통을 넣었다. 사북지역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운동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것. 그가 살고 있는 동원탄좌 직원아파트 주민들, 평소 잘 드나드는 생맥주집 주인, 시장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해 5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보내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낙선운동이 한창이던 2000년 4월, 낙천대상이던 K모 후보에 대해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상대당 후보이던 P모 후보가 워낙 지역민심을 잃었던 터라 대안이 없던 지역주민들이 할 수 없이 K모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이다.
“그럴 때 참 고민되더라구요. 지역주민들의 정서는 제 주장과 상반되는데, 그럴 때 참여연대 회원으로서 제 소신이 너무 약한 게 아닌가 생각되었어요. 소신대로 했다면 성과를 거뒀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 말이에요. 결국 제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라 생각하고 반성했습니다.”
사실 참여연대에서 6년째 일하고 있는 상근자도 동네주민에게 서명 한 장 선뜻 받기 어려운데, 그는 혼자서 주민들의 서명을 500장이나 받아놓고, 낙천후보에 대한 지역활동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앞에선 솔직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래도 그는 “여가시간 남을 때 짬짬이 하는 것뿐이에요. 하루종일 매달려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참여연대 분들과 어떻게 비교하겠어요?”라고 한다. 점점 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도록 하는 분이었다.
탄광의 하루
3교대 병반이 된 날, 그는 밤 11시에 출근한다. 갑반이면 아침 8시, 을반이면 오후 4시 출근이다. 병반일 때는 빵이나 우유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기지만 갑반이나 을반일 때는 꼭 도시락을 싼다. 막장에서 속을 든든이 채워줄 일용할 양식이다.
학교 교사 같은 큰 건물 3층. 실내는 어두컴컴하지만 계단을 성큼성큼 내딛는다. 회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마스크와 갯부(안전등), 안전 핼맷을 쓰면 준비 끝. 입갱할 때는 갱도의 엘리베이터(수갱도) 앞에 한 줄로 서서 들어간다. 20∼30명씩 인차에 올라타면 안전을 점검한 뒤 쇠문으로 고리를 채우고 땡땡땡! 하는 징소리와 함께 고속으로 내려간다.
그가 일하는 갱은 지하 11편이다. 1편당 50m. 탄광사람들은 4자를 싫어해 4편은 없다. 그래서 그가 일하는 곳은 지하 500m이다. 언제나 생각되는 것이지만 어두움에 비례해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2분 남짓…. 항사무실에 도착하면 모노레일 같은 인차가 기다린다. 인차를 타고 작업장이 있는 곳까지 3km 정도 들어가면 감독이 오늘 하루의 작업을 배치해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하세계는 영화 <인디아니존스>처럼 어두워 자칫 길을 잃으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단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아 막장에선 누구나 긴장한 채로 같이 행동한다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연장은 곡괭이, 삽, 톱, 도끼, 긴 장대를 닮은 노미다. 탄을 캐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공구다. 돌을 깨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공기를 동력으로 해서 풍력으로 구멍도 뚫고, 커다란 돌덩이도 기계로 뚫는다. 그렇게 뚫린 길에서 그는 채탄작업을 하는 것이다.
막장에서 물은 필수다. 밥은 한 끼 굶어도 일할 수 있지만 탄가루로 깔깔한 목을 축일 수 있는 물 없이는 단 한순간도 일할 수 없다. 그래서 광산노동자들은 1년 열두 달을 매일같이 냉동실에 물을 얼려둔다고.
9년째 지하갱도에서 일하다보니 사고로 인한 죽음을 자주 목도했다. 때로는 동료의 사체를 함께 인양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제 그는 막장에서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어졌다.
마흔다섯이지만 그는 아직 미혼이다. 하지만 슬하에 딸 같은 조카가 있다.
처음 사북에 왔을 때 하숙하던 집의 딸이다. 그 집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며 일수놀이를 했는데 그게 잘못되어 야반도주하게 됐다.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딸을 홀로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허물어져가는 집안에 덩그러니 있던 그 아이를 데려다 기른 게 인연이 되어 삼촌 조카 사이가 됐다. 지금은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매일 도시락도 싸주고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명절 때가 되면 요즘도 그를 찾아온다.
마지막 남은 동원탄좌 문을 닫으면 그는 다시 서울로 갈 생각이란다. 9년 간 땀흘려 벌어놓은 돈과 폐광대책비, 퇴직금을 받아 작은 사업을 다시 시작할 작정이다. 아직 무엇을 할지는 정해놓지 않았다. 다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게 고마울 뿐이다.
사북을 떠나던 날 밤, 첫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눈비가 오는 날엔 강원도는 쥐약이라며 그는 내내 걱정했다. 여성 둘이서 이 깜깜한 밤길을 어떻게 헤쳐가려 하느냐며 사북에도 깨끗한 여관이 있으니 자고 가라 했다. 그러나 일정이 바빠 서둘러 올라왔고, 그런 여행길이 너무 고단했던지 몸살이 났다. 끙끙 앓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북까지 오시느라 너무 무리하셨군요.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그는 출발 이후 아직까지도 내내 이쪽만 걱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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