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 인형을 묻은 빈 무덤


“우리 애들 아부지는 아침을 묵고 나락을 비러 갔는디 새참을 해서 가본께 사람이 안 보입디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님시롱 물어본께 친구들이 웃당머리 주막에서 술을 한잔하러 가잔께 같이 같다가 거기서 여수로 반란군 잡으러 온 군인들을 만냈던 모양입디다. 그 질로 잡혀갔어요!”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을 왜 묻냐며 한사코 입을 열지 않던 이봉임(가명) 할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할머니의 남편 주씨는 당시 28세, 할머니는 25세.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남편은 순박하기만 한 농부로 글도 몰랐기 때문에 사상논쟁에는 끼지도 못했는데 사상범으로 잡혀갔다. 인천형무소를 거쳐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국의 모든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닥치는 대로 처형해버릴 때 남편을 잃고 말았다. 주검도 찾지 못했다. 무덤도 없는 남편이 불쌍해서 1997년에야 밤나무로 인형을 만들어 넣고 묘를 만들었다.

빨치산으로 변장한 국군이 마을 습격

제주 4?항쟁을 진압하려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며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 사병들에 의해 일어난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를 시작으로 순천, 구례, 광양의 경찰서를 습격, 치안권을 장악하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와 군통수권을 쥐고 있던 미군사고문단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일주일 만에 진압되었다. 반란을 일으켰던 14연대 군인들과 동조세력은 광양의 백운산과 순천의 조계산 등지로 흩어져 숨어버렸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한다고 내려온 군과 경찰은 텅 비어버린 시가지에서 부역자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죄 없는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시작하였다. 정찰기와 현대식 정보로 무장된 미군의 작전을 바탕으로 성공리에 진압작전을 마치기까지는 전주곡에 불과했고, 죽음의 공포는 그 후에 찾아왔던 것이다. 혼란스러운 사회적 환경에서 정치적인 기득권을 장악하려던 이승만 정부의 음모와 맞물려 사건을 이용하려던 정치권의 욕심은 여수와 순천 인근 민간인 1만여 명을 무차별 처형하는 여순학살 사건을 낳았다. 현대사를 비극으로 물들인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과 계엄법이 만들어진 것도 여순사건 직후의 일이었다.

필자는 1997년부터 여수와 순천의 농어촌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여순사건 와중의 민간인 학살사례를 조사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내 고향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단순한 호기심에서 이 일을 시작하였다가 여순사건의 진실규명에 발 벗고 나선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여순사건 분과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제는 조금씩 벗겨지는 사건의 실체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명감이 앞서 몇 년째 휴일도 없이 곳곳을 돌아다닌 끝에 지금까지 3,000여 명의 여순사건 관련 사망자를 확인하였다.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디를 가보아도 사정은 비슷했다.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는 피맺힌 하소연이 이어졌다.

반란군이 숨어 들어간 백운산에서 가까운 순천 서면의 흥대마을에도 이상한 차림의 군인들이 들어와 주민들에게 밥을 짓게 하고 쌀과 부식을 요구하였다. 총부리를 들이대고 요구하는 군인들에게 주민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요구를 들어주는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들은 빨치산으로 변장을 하고 마을을 습격한 국군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던 산골마을 주민 20여 명은 빨치산을 돕는 부역자로 몰려 총살되었다.

흥대마을과 가까운 지본마을 입구에는 하얀 해골이 그려진 모자를 쓴 군인들이 빨치산을 소탕한다며 주둔했다. 주변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와 자신이 묻힐 구덩이를 파고 총살되었다. 잡혀온 이들 중 한 부자(父子)가 있었다. 군인들은 산으로 도망간 아들이나 형제를 신고하지 않으면 이렇게 처형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죽음을 앞둔 이들 부자를 마음껏 조롱했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서로 상대방의 뺨을 때리도록 하면서 희희낙락하였다. 군인들의 총부리 앞에서 공포에 질려 서로의 뺨을 때리다 지친 부자는 결국 총살되었다. 맞뺨치기와 같은 반인륜적인 만행이 주민간, 형제간은 물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도 강요되었다.

빨치산 소탕작전이 한창이던 49년 9월 광양군의 ‘어치’ 마을회관 앞에는 주민들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었다. 무장 군인들 앞에 아기를 업은 만삭의 아낙과 그의 가족이 사시나무처럼 떨며 끌려나왔다. 잠시 후 이 아낙은 고춧가루를 풀어놓은 커다란 물통 속으로 아기를 업은 채 처박혔다. 군인들의 대검이 사정없이 물통 안을 찔렀다. 산으로 들어간 한 사람 때문에 남은 가족 7명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다.

마을마다 이어지는 죽음의 증언

이러한 사례는 끝없이 많다. 찾아가는 마을과 골짜기마다 온통 죽음의 증언이 이어진다. 그 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이다. 가까운 이웃에게도 꺼내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남 몰래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였다. 그러나 억울한 죽음만으로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자녀들과 친인척까지 영문도 모른 채 연좌제의 끈에 묶여 좌절해야만 했다.

최근 한 전직 여수 시의원이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장인의 결백을 증언하려고 찾아왔다. 장인은 사건 초기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가족들이 며칠 뒤 행방을 수소문하여 면회를 가니 재판도 없이 이미 어디론가 끌려가 처형되어 버린 후였다. 그가 가져온 장인의 호적등본에는 1953년에 자연사한 것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외동딸인 그의 처는 큰아버지의 딸로 등재되었고, 장모는 혼인조차 하지 않은 미혼녀로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때 끌려가 여수와 순천 인근의 산, 바다, 들에서 총살되고 수장되었지만 집에서 자연사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가족들은 빈 무덤에 밤나무로 만든 나무인형을 매장하고 그들의 영혼을 달랬다.

세월이 이토록 흘렀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50년도 더 된 그 때의 공포가 아직 뚜렷하고 크게 변하지 않은 우리 사회 현실에서 바른 말을 하면 손해를 보고 진실을 이야기하면 피해를 입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족이 그렇게 죽임을 당했는데도 슬퍼하지도 못하게 억누르고 있는 우리 사회는 중병에 걸려 있는 환자가 아닌가? 이를 치료하지 못하고 정의에 침묵하는 다수가 있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가슴 속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한 맺힌 절규들을 감추면서 침묵이 삶의 지혜라고 아들 딸에게 대물림할 것인가?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건을 보고 겪었던 증인들도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하루 빨리 민간인 학살을 조사할 통합입법이 제정되고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실시되어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다시는 같은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박종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여순사건조사연구팀장
2002/03/01 00:00 2002/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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