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성 세상을 향한 발설의 욕구
2002/2002년 03월 :
2002/03/01 00:00
동물성 세상을 향한 발설의 욕구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바늘』이라는 흥미로운 작품으로 등단한 신예작가 천운영이 첫 작품집을 냈다. 등단작을 표제작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집을 통독한 독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동물성의 욕망’에 대한 작가의 높은 관심에 한번쯤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이 동물성의 욕망은 작품 속에서 흔히 ‘식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숨」의 작중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할머니는 “모든 병을 육식으로 치료한다.” 「등뼈」에 등장하는 여자는 “생선과 닭을 유난히 좋아했다.” 심지어 작가는 「행복고물상」에서 부부싸움중인 한 여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까지 한다. “질긴 고깃점이라도 물어뜯듯 두 손으로 어깨를 움켜쥔 채 사납게 으르렁대더니 어느 새 내 머리끄덩이를 잡아챈다.” 이 동물성의 욕망들과 이미지들은 작중인물의 꿈에도 여지없이 등장하곤 하는데, 가령 「월경」에서의 다음과 같은 부분을 참고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그녀의 얼굴과 젖가슴에도 초승달이 뜨고 피가 솟구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지며 그녀의 피가 내 다리 사이로 흘러오는 것을 보았다.”
삶의 황폐함을 그리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동물성의 욕망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는 점과 함께 또 한 가지 특성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묘사나 서술의 정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바늘」에서 화자는 “그러나 부모에게 결정적으로 거부당한 사람이 그렇듯 나는 곧 냉정해졌다”는 서술을 통해 혼란을 잠재우는 화자의 냉정성을 간명하게 표현한다. 이런 표현도 보인다. “엄마가 바늘을 가지고 수를 놓았다면 나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에 수를 놓겠다.” 바늘이라는 소재를 통해, 엄마와 자신의 삶을 간명하게 이분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천운영의, 묘사에 대한 열망이 가장 정교하게 드러난 작품은 아마도 「숨」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천운영은 소의 머리를 해부하는 장면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다. “윗입술과 앞니 사이에 첫칼을 꽂는다. 앞니를 중심으로 왼쪽 볼따구니와 오른쪽 볼따구니의 살을 안쪽에서 발라낸다. 눈과 콧등으로 이어지는 안면근육을 따라 조심스럽게 칼을 쑤시고 손대중으로 눈앞과 연결된 근육을 끊는다. 머리가죽을 위로 들어올려 뼈가 잘 드러나게 한다. 머리가죽을 손상시키지 않고 한 덩이로 분리해야만 나중에 털 벗기는 작업이 쉬워진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과 함께 천운영의 소설에 나타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작중인물들이 지극한 소외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가족은 해체 직전에 있거나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며, 연인과의 관계 역시 ‘친밀성’과는 거리가 멀고, 대개는 발작에 가까운 싸움을 지속하거나, 심지어는 결혼을 앞두고 실종되어 버리는 모습까지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타인에 대한 공격성과 자기모멸의 성향을 남성이 아닌 여성인물들이 지니고 있다는 점이며, 그것이 삶의 ‘황폐함’이라는 이미지를 길어올린다는 점에 있다. “저 기리빠시들, 다리 없는 자전거… 달려들어… 나는 이렇게 황폐한데, 뭐가 더 빨아먹을 게 있다구…내 몸에 뿌리내리려구, 더러운 것들을, 도망가고, 싶어…”(「행복고물상」)
이러한 세 가지 특성들을 고려해 보건대, 작가 천운영은 분명 이전의 여성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그 개성의 내용에 대해 약간의 생각을 밝히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천운영의 소설을 문예학적인 차원에서 규정한다면, 우리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괴기스러운 육체의 혼란을 통해 세계의 혼란상을 묘파해 내는 소설적 경향을 일컫는 바흐친의 용어이다. 천운영에게 세계는 동물성의 욕망으로 충만한 그로테스크한 세계, 즉 문명 속의 야만이다. 인간의 욕망은 문명화된 세계의 질서를 넘어서고, 극단에서는 그것을 파괴할 정도의 충동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문명은 욕망을 승화된 형태로 관리 보존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활용하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병적인 양상을 종종 보여주곤 한다. 천운영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욕망의 내용물이라는 것은, 문명 안에서, 문명과 싸우며, 결국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을 통해서 그 허구성을 보여주려는 소설적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욕망의 병적인 자가발전은 소설 속에서 뚜렷한 문제의식이나 기획을 내포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많은 부분 분열증이나 편집증의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징후’의 차원에서 판독할 수 있을 것이다.
무책임한 평론가들의 무차별적인 발언들
이러한 관점에 서게 될 때, 우리는 가령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을 포함한 일련의 소설들이나, 김이태의 『식성』, 『궤도를 이탈한 별』 등의 소설들을 참고항으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의 소설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발견되는 사실은, 그들의 삶을 형해화하고 있는 현실이 운명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힘센 독수리처럼 그들의 삶을 압살한다는 느낌을 주며, 성난 사자들의 집단적인 포효처럼 그들의 삶을 정체불명의 공포로 내몰곤 한다. 삶의 구속성을 극복할 합리적인 대안이나 방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현대인은 자신을 내던져진 존재로 규정하면서, 세계를 불가해한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로 이해하는 관성을 작동시키는데, 그것의 미학적 돌파구가 혼란을 혼란으로 대응하는 방식, 그러니까 동물성의 욕망을 무차별적으로 발산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운영의 소설이 보여주는 충만한 동물성의 욕망은 동일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 그들에게 삶은 ‘운명’으로 제시되고, 거의 엽기에 가까운 동물적 욕망의 발산은 운명과 충돌하는 대응의 한 방식이다. “내가 곱사등이인 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운명이었다. 아버지의 정자가 엄마의 자궁으로 들어와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곱사등이었다.” 「포옹」에서는 이러한 운명론적인 현실진단이 선명하게 노출된다.
이것은 많은 젊은 소설가들이 내면화하고 있는 ‘공통감각’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개성의 전면적인 개화로 규정하기는 아직 힘들다. 천운영의 탁월한 작품들, 가령 「바늘」, 「숨」, 「당신의 바다」 등이 보여준 놀라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미숙한 작위성은 불안하게 보인다. 그의 가능성이 화려하게 꽃필 수 있을지는 전자의 작품들의 세계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지만, 몇몇 무책임한 평론가들의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그가 얼마나 지혜롭게 소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다.
가령 이광호. “그녀가 부여하는 동물적 관능의 미학은 매우 극단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한국소설에서 경험하지 못한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수준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황종연. “천운영 소설은 한국소설에서 좀처럼 보지 못한 욕망의 포르노그라피이다.” 전형적인 ‘미학적 사기’에 속하는 이러한 발언들 때문에 (‘한국소설’ 운운하는 과장법을 보라!), 많은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의 샘은 일찌감치 말라버렸다. 대개의 좋은 작가들이 비평을 읽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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