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진영에 던져진 두 가지 고민


양대 선거 등 중요한 정치적 변환기를 맞은 진보진영은 몇 가지 고민에 부딪혔다. 강력한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표명하며 추진하던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통합은 ‘조선노동당’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지지부진한 상태다. 87년 이래로 김대중을 중심으로 계속되던 비판적 지지 논쟁은 운동사회 내에서 ‘노무현’이라는 옷으로 바꿔입고 다시 등장했다. 과연 우리시대 진보인사들은 이 두 가지 화두, 진보정당의 통합과 노무현 대세론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대표적인 진보인사들을 전화로 연결했다.

진보정당 통합, 찬반 의견 갈려

민주노동당(대표 권영길)이 지난해 12월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회당에 양당 통합을 제안한 이후 두 당은 1월 18일 양당 대표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두 당은 강력한 사회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같이 했으나, 사회당은 반자본주의·반조선노동당 입장을 전제조건으로, 민주노동당은 전제조건 없는 통합을 각각 요구해 의견조율에 실패했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2월 22일 상무집행위원회를 열고 “우리 당은 조선노동당을 ‘통일에 있어 또 하나의 주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반조선노동당’ 노선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기자가 전화로 만난 진보인사들은 이러한 통합 움직임에 대해 진보진영의 외연을 확장하고 진보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필요한 수순이라는 의견과 선거국면에 쫓긴 통합논의는 의미가 없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한편, 두 당의 통합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는 이도 더러 있었다.

양대 정당간의 통합과는 별도로 민주노동당과 연대를 추진하고 있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오종렬 상임의장은 “양당은 하루라도 빨리 통합돼야 하며, 사회전체의 혼란상(정치, 경제, 외교 등)과 지방선거·대선 등이 목전에 있는 지금 통합을 위한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당의 반조선노동당 정책으로 인해 진보진영의 통합논의에 차질이 있는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사회진보를 위해 대립적 전제논의를 자제하고, 통합 전제하에서 다양한 의견조율 노력으로 통합의 어려움을 극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정치 지배체제 하에서는 진보정당의 대동단결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반자본주의, 반조선노동당이 통합의 걸림돌이 돼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반부시의 입장을 견지하더라도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가진 비민주적 요소 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반조선노동당 그 자체가 강령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통합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는 “양당이 통합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나을 수 있지만, 솔직히 양당의 통합이 대선에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며 진보정당의 통합이 현실정치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교수는 “차라리 서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나름의 입지를 넓혀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오세철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재 진행되는 통합논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진보진영의 통합논의는 일시적, 현상적 논의로 접근하면 안 된다”며 “진보진영의 통합논의는 원칙과 정체성의 상실이 없는 가운데 거시적이고, 포괄적이며,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시기나 상황만을 쫓아 막연한 진보성을 명분으로 한울타리 안으로 모으는 데만 급급하면 진보진영의 진정한 통합 및 사회진보에 전혀 도움이 안 되며 과거의 과오만을 답습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경계했다.

노무현, 상대적 진보성 인정

진보인사들은 기성 정치인들 중 노무현 씨가 상대적 진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민주당 경선 주자 가운데 진보적 색채가 가장 강한 것은 사실이며, 노무현 씨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적 지지 논의가 일고 있는 것도 이러한 노무현 씨의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보수정당 내에 몸담으며 신자유주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 한계라고 지적했다.

김동춘 교수는 노무현 씨에 대한 지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현실적으로 민주노동당이 대선에서 두각을 나타낼 가능성은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진보진영이 노무현 씨를 지지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막을 수 없는 대세”라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는 진보진영이 노무현 씨를 지지하는 것을 일단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노무현 씨에 대한 지지는 진보진영에 있어 전술적 차원의 문제다. 전략적 차원에서 양대 정당의 통합논의처럼 진보세력의 독립된 정치세력화를 이뤄야 한다”며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에 앞서 독립적 정치집단화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종렬 상임의장은 “현 시점에서는 진보진영의 대 통합과 정치세력화가 가장 절실한 문제로,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 논의는 진보진영의 혼란을 부추길 우려가 있으므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보수정당 내 개혁후보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것이며 신자유주의 및 신제국주의 틀 안에 있는 것이 그 한계”라는 기본적 원론을 제시했다.

한편 그는 “후보자(노무현)가 과연 현 구조적 틀을 바꿀 수 있는 의지와 역량, 신념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논의의 가능성이 생겨날 수 있다. 다만 진보진영의 통합과 강한 결속력이 전제돼야 할 것”이라고 상황변수를 말했다.

오세철 교수는 “비판적 지지 논의가 현재와 같이 선거를 의식한 단순한 현상적 논의로 이뤄지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논의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오 교수는 “이 문제는 선거 때만 나타나는 진보진영 내의 단순한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큰 흐름 안에서 하나의 명제로 접근해야만 그나마 논의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씨에 대한 지지가 진보진영의 입지를 고립시키고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을 더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김동춘 교수는 “이는 진보의 범위를 너무 축소해 생각하는 소수의 의식화된 논리”라는 의견을 밝혔다.

조희연 교수는 “한나라당을 보수정당, 민주노동당 등을 진보정당으로 본다면 민주당은 리버럴 정당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같은 민주당 내에서도 노무현의 상대적 진보성은 인정된다. 이인제가 대선 후보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노무현이 되는 것이 진보진영을 침체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이해되지만, 사회적 진보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무현 지지는 전술적으로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진보진영의 노무현에 대한 고민은 ‘그에 대한 지지가 진보세력의 독립적 정치세력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것으로 해석된다.

“민주당 경선이 치러지는 등 지금의 상황에서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씨를 지지한다. 하지만 이후 정치구도의 변화를 지켜보며 대선에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영의 통합후보가 출마하게 되면 그때는 누구를 지지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다”는 김동춘 교수의 말은, 보수세력의 집권을 저지할 대안으로서 노무현 씨와 진보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진보인사들의 고민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태욱(참여사회 기자)
2002/04/10 00:00 2002/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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