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남편을 둔 외국여성들의 모임" 초대회장 로웨나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가. 눈을 감고 들으면 30년 전에 결혼한 여자들의 얘긴지 3년 전에 결혼한 여성들의 하소연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더구나 상대방이 결혼한 지 6년째 되는 외국인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맞아요. 맞아요. 결혼한 여자들은 다 그런 얘기하더라구요”라고 맞장구 치며 웃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씁쓸한 기분은 감출 수 없다. 진정 우리나라에서 결혼이란 한 남성의 가족에 여성이 편입되는 것이란 말인가.

결혼과 시집살이 전문가

ISA(Intercultural Spouses Association·http://www.geocities.com/isakorea2000/)는 한국인 남편을 둔 외국인 여성들의 모임이다. 필리핀 여성인 로웨나 데라 로사 윤(Rowena dela Rosa Yoon·35세)은 이 모임의 지난해 회장. 그는 한국 남자와의 결혼 그리고 시집살이에 대한 전문가로 손색이 없다. 외국인 여성으로 한국에 살면서 늘어놓는 불평은 미장원이나 목욕탕에서 들을 수 있는 우리 시대 아줌마들의 목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단지 우리나라 여성은 익숙하거나 각오했던 일이라 덜 놀라면서 결혼생활을 유지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남편 어머니, 남편 아버지, 남편 누나. 남편 동생…. 가족들이 너무 많아요. 저는 너무 힘들어요. 한국에선 결혼하면 남편만 있는 게 아니에요.”

로웨나 씨는 결혼 뒤 갑작스럽게 늘어난 가족들과의 관계가 가장 힘들었던 점이라고 회고했다. 대부분의 외국 여성들에게 결혼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둘이 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가족까지 감당해야 하는 한국의 결혼문화가 무척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로웨나 씨가 ISA를 만든 이유도 한국인과 갓 결혼한 외국인 여성들이 독특한 우리의 결혼 문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외국인 여성들이 ISA를 알면 너무너무 기뻐해요. 서툰 한국말로 고맙다고 말하면서 서로 시어머니와 남편들에 관해 얘기해요. ISA에서 얘기를 나누면 속이 시원하대요. 혼자 답답해 하면 소용이 없어요. 같이 얘기하면 참 좋아요.”

ISA의 현재 회원 수는 13명. 회원들끼리 서로의 결혼생활 경험담을 나누는 게 주된 활동이다. 외국인 여성들이 한국 남성과 결혼했을 때 어딜 가도 자신의 얘기를 할 곳이 없기에 낯선 땅에 와서 눈물만 흘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누는 곳. 외국인 여성들의 안식처. 이것이야말로 ISA의 가장 중요하고도 큰 역할이다.

“와이프를 하루종일 불러요”

회원들이 겪는 공통적인 어려움은 한국말이나 요리보다 시부모나 남편과의 관계였다.

“처음엔 한국말 때문에 힘들었죠. 음식도 그렇구요. 하루에 세 번이나 밥을 해야 된다고 하는데. 더구나 빨리 만들고, 잘 만들라고 해요. 다행히 저는 음식이 입에 잘 맞았어요. 그렇지만 혼자 다 만들고 설거지하는 건 너무해요.”

시간이 지나며 한국말은 늘지만 가족들을 모두 관리해야 하는 문화에는 적응하기 힘들며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 남자는 왕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건 남자의 어머니들이 어릴 때부터 가르치지 않아서 그래요. 나중에는 남편이 설거지를 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소용이 없죠. 제가 다시 해야 해요. 너무 짜증이 나요. 결혼을 하니 아들만 낳으래요. 시부모님이 남자아기만 좋아해요.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스트레스예요. 요리도 하루에 세 번이나 해야 하고 빨리 잘 해야 했어요. 남편 가족에게도 잘하래요. 남편은 ‘와이프! 와이프!’하고 하루종일 불러요. 정말 피곤해요.”

가사 분담은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지켜지지 않는 과제라고 했다. 로웨나 씨는 현재 문화관광부에서 제작하는 영문 홈페이지 관리 등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주부들처럼 집안 일은 모두 그녀의 차지라고 한다.

이런 일상 속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터에 결혼 후 겪는 비자 발급과 같은 법적인 문제들까진 신경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다행히 로웨나처럼 ‘가족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한 경우도 있지만 결국 이혼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시부모 문제 때문에 이혼을 많이 해요. 스트레스 때문이죠. 남편 가족들은 아주 복잡해요. 이혼한 이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절대로 돌아오지 않아요. ‘나는 절대 돌아보지 않을 거다’라며 큰소리를 치고 떠나요. 어떤 남편은 답답하다고 아내를 때리는 경우도 있어요. 심지어 임신했는데도 때렸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경찰에 신고하면 집으로 돌아가라고. 남편한테 잘해야 한다고 말한대요. 너무 이상해요.”

로웨나 씨가 늘어놓는 얘기들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다. 해결 방법도 다 아는 얘기였다. 그래서 애처롭다. 가정폭력이나 남아선호 사상, 가사분담 등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선택하는 방법은 세상이 요구하는 역할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혹은 예방차원에서 폭력을 만들 상황을 없애거나 수없이 낙태를 해가며 아들을 낳는다. 가사는 아내가 모두 맡아버리면 된다. 일상의 작은 변화를 위해 희생할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도 많을 때 많은 한국 여성들은 조용히 사는 방법을 택한다.

더구나 이런 스트레스를 하소연할 사람도 없고 평생 겪어보지도 못한 외국인 여성들에게 권리를 요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로웨나 씨와의 대화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대화하라는 충고보다 “한국이 원래 그렇죠 뭐” 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답답하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에게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동지가 늘었으니 힘을 모으자고 손을 잡아야 하는가.

“한국이 원래 그렇죠, 뭐”

이러한 외국인 여성들과 더 깊은 대화를 해줄 여성단체들이 늘어난다면 순응하는 방법보다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길 바랄 뿐이다.

로웨나 씨와 같은 여성들이 우리나라에 와서도 아내와 며느리라는 이름보다 ‘로웨나’라는 이름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결혼은 신성하지만 결혼이란 이름으로 주는 구속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름답지 않다.

취재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던 길. 아직 미혼이라는 말에 로웨나 씨가 큰 목소리로 당부를 한다.

“한국 여성들 외국인 남자와 결혼하세요. 그럼 그 순간 프리덤이에요.”

대한민국 딸들이 누구나 한번씩 듣는다는 말. “엄마처럼 살지 말라”가 떠올랐다. 결국 현명한 선택은 무얼까. ‘한국 남자와의 결혼’을 피하는 길일까. 허한 웃음이 새어나올 뿐이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2002/04/10 00:00 2002/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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