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과 사익


2000년 가을, 서울에서 갈등해결 워크숍을 할 때였다. 한 시민단체 간사가 울먹이며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의약분업 문제로 의사-약사-정부-시민단체 4자간 갈등이 심각하던 당시, 그 간사가 속한 단체에서는 의사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 간사가 맡고 있는 일도 그 분야였다. 어느날 고향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신의 딸이 이름있는 시민단체에서 뜻있는 일을 한다고 좋아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면서 몹시 서운해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 간사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주민들의 신망을 받으며 평생 작은 의원을 운영해 왔다고 한다. 그동안 의사들로부터 항의-비난성 전화를 숱하게 받았어도 별 동요 없이 넘겨온 그녀였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자신이 소신껏 하는 일에 대해 다른 사람도 아닌, 존경하는 아버지가 그렇게 서운해 하신다는 사실이 그녀를 상심케 한 것이었다. 사회적 갈등상황에서 시민단체의 활동가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케 하는 얘기였다.

공익을 정의하는 세 가지 방법

우리 사회 대부분의 시민단체는 공익을 추구한다. 그런데 공익이란 무엇인가? 한약분쟁이나 의약분업 문제의 경우처럼 집단간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시민단체는 어떻게 해야 공익에 기여할 수 있을까? 소비자단체라면 별 고민 없이 의료소비자인 일반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참여연대 경실련 지역단체 등 일반 시민단체는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회원 중에 의사도 있고 약사도 있고 한의사도 있을 터이니 정책이나 입장을 정할 때 그들의 입장을 고루 반영할 필요가 있을 터이다. 비단 회원이라서가 아니어도 어쨌든 그들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 아닌가. 공익을 표방하는 시민단체를 난처하게 하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난제를 풀려면 우선 공익이 어떻게 정의되고 구현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익을 정의하는 데는 세가지 학설(또는 기준)이 있다.

먼저, 다수이익설(Interests of the Majority)이다. 그 사회의 구성원 중 다수에게 이로운 것이 공익이라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수결 제도는 이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수적인 기준만 가지고 공익을 규정하는 데는 문제가 많다. 가장 큰 위험이 바로 ‘다수의 횡포’다. 다수의 이익만을 앞세우다 보면 소수나 약자의 권익이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 한 예가 장애인 편의시설 문제다. 도로 빌딩 대중교통시설 등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지 않은 데 대해 정부나 기업측이 흔히 내놓는 변명이 ‘예산부족’이다. 이 얘기는 무슨 뜻인가. 한정된 예산으로 공익을 구현하는 방법은 대다수의 비장애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이란 주장이다. 소수의 장애인들은 공익을 위해 참아달라는 얘기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곧잘 소수의 권익을 간단히 무시하고 지나치는 이면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이러한 ‘민주주의적’ 공익개념이 깔려 있다.

둘째, 절대가치설(Absolute Value) 또는 자연법설(Natural Law)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 또는 자연법상의 원칙을 공익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자유와 인권, 생명존중, 차별금지, 환경보호 등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공익이다. 지금까지 국내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대체로 이런 차원에서 펼쳐진 경우가 많았다. 그 활동방식이 다분히 투쟁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절대가치나 자연법적 원칙은 타협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만 가지고 공익을 정의하기엔 현대사회가 너무 복잡다단해졌다. 한약분쟁이나 의약분업 문제처럼 절대가치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사회적 이슈도 갈수록 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서로 다른 절대가치가 충돌할 때이다. 예컨대, 그린벨트 문제의 경우, 환경을 중시하는 측에서는 그린벨트 해제를 반대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희생당해 온 해당지역 주민들에게는 환경보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평등권, 행복추구권이다. 상충되는 두 가치 사이 어디쯤에 공익이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다수이익설과 절대가치설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균형협약설이다. 한 사회 내 여러 집단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상태(A Negotiated Balance of Interests)가 공익이라는 것이다. 사회 각 집단의 대립되는 이해관계는 당사자간 직접협상 혹은 사회적 조정과정을 거쳐 조화와 균형을 이뤄간다. 이렇게 사회 구성원간 묵시적 또는 명시적 협약을 통해 공익이 구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 각 집단이 서로 긴밀히 맺어져 공동체를 튼튼히 하는 유기적 결속력도 이 과정에서 다져진다.

시민단체, 이해관계 조정으로 공익 추구

이런 관점에서 공익을 구현해 나가려면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사회 각 구성원(집단-지역)의 욕구분출이나 이익추구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명확히 드러나야 조화로운 균형을 꾀할 수 있다. 국어사전에는 공익의 반대말이 사익이라고 나와 있다. 실제로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잘못된 상식이다. 사익 없는 공익이 어디 있는가. 공익은 사익을 다 연소시킨 뒤 남은 무색의 증류수가 아니다. 여러 가지 사익들이 부딪치며 화학작용을 일으켜 단단하게 결합된 알록달록한 화합물이다.

그 다음 필요한 것은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조화시켜 나갈 수 있는 협상-조정능력이다. 이러한 합리적인 문제해결 능력은 우선 문제의 당사자들이 갖춰야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요청되는 것이 공익을 추구하는 정부나 시민단체의 조정능력이다. 시민사회 내 집단간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또는 정부와 특정집단 또는 지역주민이 충돌할 때, 시민단체는 공익을 위해 조정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의약분업 분쟁이나 한약분쟁 당시 참여연대와 경실련의 중재는 이런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시민단체에 조정능력이 요청되는 것은 비단 분쟁이 생겼을 때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일상 활동과정에서다. 시민단체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거나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사안에 대해 어떤 정책이나 입장을 결정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 단계에서부터 균형협약설의 관점에서 공익을 구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의 문제가 아닌 한, 각 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럼, 어떻게?”인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제안하고자 한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문제가 있을 때 정부나 시민단체에서 흔히 애용하는 것이 공청회나 토론회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선 제각기 자기 얘기만 늘어놓을 뿐, 상대측의 얘기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설복 혹은 제압하는 게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각 집단의 관계자와 찻집에 마주앉아 왜 그런 입장을 취하는지, 그쪽에서 진정 원하는 것, 우려하는 것은 무엇인지 듣는 것이 훨씬 좋을 듯하다.

각 집단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정책수렴이나 조정이 어려울 경우, 양평이나 강촌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각 집단의 대표선수들(공식 대표일 필요는 없고, 그 집단의 정책결정에 관여하는 참모진이면 된다)과 함께 1박2일 또는 2박3일을 함께 지새며 서로의 얘기를 듣고, 각자가 원하는 것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게 있을지 함께 찾아보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대화(Dialogue)다. 완전한 합의나 문제해결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서로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최소한 서로를 적대시하며 소모전을 벌이는 일만은 막을 수 있다. 이런 노력이 여러 갈래로 거듭되다보면 갈등과 논란도 차츰 풀려져 나갈 것이다. 시민단체 간사로 일하는 딸이 의사인 아버지와 갈등을 겪을 일도 다시는 없을 테고.

강영진 미국전문중재인.조지메이슨대 분쟁해결연구원
2002/04/10 00:00 2002/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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