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일곱딸들


인간 복제는 최근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여러 이슈들 중에서도 가장 첨예한 관심을 끄는 문제다. 인간 종의 재생산에 과학기술의 조작이 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던져주는 충격은 엄청난 것이다.

인류는 이미 50년 전에 소위 생명과학이 인간 사회에 접목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끔찍한 재앙을 경험한 바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그것이다. 독일의 나치 정권은 세계의 민족들을 우등민족과 열등민족으로 나누고 우등민족인 아리안인의 혈통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열등민족인 유대인을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500만 명 가량의 유럽 거주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 모든 것이 어줍잖은 유전학 이론에 바탕을 두고 ‘과학’의 이름 아래 이뤄졌다.

DNA로부터 모계혈통 추적

이야기가 이쯤 되면, 생명과학이라는 말의 이미지는 온통, ‘생명’과는 오히려 정반대되는 ‘죽음’의 색깔로 덮여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난해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좋은 책으로 꼽혔고 올해 우리에게도 소개된 영국의 유전인류학자 브라이언 사이키스의 저작 좬이브의 일곱 딸들좭(브라이언 사이키스, 전성수 옮김, 따님)은 그 좋은 사례다.

사이키스의 연구 결과는 이미 국내 언론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그는 DNA 연구를 통해 현대의 모든 인류가 15만 년 전 아프리카의 한 여성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고고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현생 인류의 기원을 놓고 두 개의 진영으로 갈려 있었다. 한쪽은 초기 구석기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이동한 호모 에렉투스가 각각의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해 호모 사피엔스의 각 종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북경 원인은 동아시아인들의 조상이 되고, 네안데르탈인은 유럽인들의 조상이 됐다는 식이다. 이에 반해 다른 쪽에서는 초기 구석기 시대에 세계로 퍼져나간 호모 에렉투스와 상관없이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가 유라시아 및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로 이동해서 지금의 우리가 됐다는 것이다. 아시아인, 유럽인, 아프리카인이 모두 최근에야 같은 조상에서 갈려나온 한 형제며 자매라는 것이다. 사이키스 등의 연구는 바로 이 뒤의 주장을 결정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으로서 조명을 받았다.

어쩌면, 인류가 15만 년 전에 갈려나온 것인지 100만 년 전에 갈려나온 것인지 여부로부터 곧바로 어떤 정치적 주장을 연상하는 것은 위험한 태도일 수 있다. 설령, 각 지역에서 따로 진화했다는 학설을 지지해 주는 새로운 증거가 나온다고 해서 사해동포주의가 정당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도 자주 황당한 주장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며 불미스러운 정치적 상상력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에, 우리는 사이키스 등의 유전인류학 연구 성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최근 더욱더 민족주의로 기울어지고 있는 중국과 북한에서 초기 구석기 시대의 유적 발굴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보자. 북한 학계는 덕천 승리산에서 발견된 초기 구석기인(‘승리산인’)의 유적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기원이 70만 년 전의 초기 구석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암시한다. 기껏해야 2000∼3000년 사이의 인류사만을 기억할 수 있을 뿐인 지금 우리에게 전혀 가늠이 안 되는 그 수십만 년의 시간 동안 과연 종의 지속적 계승이란 게 가능했겠는가, 도대체 수십만 년 전의 그들을 우리와 같은 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당연한 의문은 이러한 암시의 뒤에 도사린 정치적 무게에 짓눌려 그만 꼬리를 내리고 만다.

사이키스 등의 연구 결과는 과학이 이러한 불온한 소극(笑劇)에 들러리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에 대한 적절한 해독제가 돼줄 수도 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이키스와 그의 연구진은 미토콘드리아 DNA로부터 사람들의 모계 혈통을 추적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세포의 여러 부분 중에서도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모계로부터만 유전되는 특성을 지닌다. 또한 돌연변이가 상대적으로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만 년 단위로 혈통의 갈래를 검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연구 과정에서 사이키스 팀은 수억의 인구가 불과 수 개의 유사 미토콘드리아 DNA군(群)으로 분류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논리적으로, 한 군에 속한 수억의 사람들이 수만 년 전 한 명의 어머니로부터 갈려져 나온 한 뿌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이키스 등은 오늘날의 유럽인이 7명의 여성(‘이브의 일곱 딸들’)의 자손들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현대 인류 전체는 15만 년 전 아프리카 동부에 살았던 한 여성(‘미토콘드리아 이브’)의 자손들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10만 년 전 비로소 아프리카를 벗어나서 중근동 지방에 정착하고 여기서 다시 유럽으로, 아시아로 이동했다. 아시아로 건너간 인류 중 일부는 태평양으로 나아가거나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향했다. 십수만 년에 걸친 이 장엄한 이동을 상상해 보면, 오늘날 ‘세계화’라고 불리는 현상이 오히려 느닷없고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현대 ‘민족’ 개념에 경종을 울린 문명비판

이 책의 맛은, 단지 ‘인류는 한 뿌리’라는 상식을 뒷받침해 주는 과학적 발견에만 있지 않다. 저자 브라이언 사이키스는 자신이 ‘이브의 일곱 딸들’이라고 부른 유럽인들의 모계 조상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과학자로서는 다소 위험스러운 일탈을 감행한다. 그런데, 이 일곱 명의 ‘이브’의 전기는 결코 장난스럽거나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혈통 하면 언제나 부계만 생각하고, 사실적이기보다는 상상적인 현대의 ‘민족’ 관념을 떠올리기 십상인 우리에게, 후기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모계 역사는 신선한 울림을 준다. 말과 글로 흔적을 남긴 역사 이전의, 즉 부권제가 확립되기 이전의 삶의 모습이 살과 피를 입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이 책은 여성주의의 시각으로 씌어진 대안적 역사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이렇게 DNA 연구로부터 인류사에 대한 새로운 안목의 획득으로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확실히 DNA를 디스토피아의 악몽으로 발전시키는 최근의 생명공학 움직임과는 방향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 점에서 아래와 같은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은 일종의 문명비판의 성격마저 지닌다.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세계에서 가장 첨단의 DNA 시설을 갖춘 이 건물의 커다란 방들에서는 로봇 같은 기계들이 조용히 게놈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되었다. 로비에 설치된 전광판은 기계에서 나오는 DNA 서열을 번쩍거리며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내 눈앞에서 인류진화의 전과정 동안 감추어져 있던 게놈의 세부적인 내용이 스크린에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직관과 지성을 갈라놓고 자연과 조상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떼어놓은 이성의 시대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이것, 인간 조건을 한 줄의 화학문자로 전락시키는 것이란 말인가? 우리의 아주 먼 과거의 신비를 밝히고 우리의 자의식을 고양시키는 수단 또한 바로 DNA라는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

DNA는 분명히 ‘하나의 단순한 화학물질’이 아니라 가장 귀중한 선물이다. (307∼308쪽)

장석준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2002/04/10 00:00 2002/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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