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물이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가
2002/2002년 05월 :
2002/04/28 00:00
한 정치인이 정신병원 환자들에게 연설하도록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그 정치인이 연설을 시작한지 약 10분 정도 지나자 뒤쪽에 앉아 있던 환자 하나가 일어서더니 고함을 질렀다.
“이봐,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게다가 쓸 데 없는 말이 너무 많아. 이제 그만 입 닥치고 앉지 그래!”
그러자 그 정치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병원장에게 소리질렀다.
“저 사람을 끌어낼 때까지 기다리겠소.”
“끌어내다니오?”
병원장이 대꾸했다.
“절대 안 되오. 저 불쌍한 친구는 여기 8년 동안 있었지만, 제 정신으로 말한 것은 이게 처음이오.”
무책임하게 아무 말이나 막 지껄여대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성향과 수준을 귀띔해주는 우화다.
‘사기꾼 공화국’
한국 정치인들은 거짓말 챔피언들이다. 약속 뒤집기의 명수들인 것이다. 대한민국을 ‘사기꾼 공화국’이라 불러도 크게 탓할 말이 없을 정도다.
소위 ‘국부’ 이승만은 6·25 전쟁 발발 시, 서울 시민들을 향해 ‘수도 사수!’를 절규했다. 그러나 그가 일찌감치 서울을 몰래 빠져나간 사실을 안 시민들은 깊은 배신감을 곱씹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한편 민주주의 시대의 절대군주였던 박정희는 또 어땠는가. 5·16 군사 쿠데타 직후 그는 “언제라도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얼마 후 “다시는 이 땅에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비통해 하는 척하며 정권을 후딱 낚아챘다.
그에 뒤질 새라 전두환 장군도 1979년 12월 12일 12·12 쿠데타 이후 “군부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몇 차례나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윽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대통령이 되고 말았으니 정치가 도대체 어떻게 굴러갔겠는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집권 2년이 되면 중간평가를 받겠다”던 자신의 선거 공약을 물론 파기해 버렸다.
또 우리의 ‘문민’ YS는 어쨌는가. 1992년 대통령 선거 유세과정에서 “쌀 수입은 대통령이 되면 그 직을 걸고라도 막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무면허 운전사’ YS는 집권 첫 해, 우루과이 라운드의 국제적 압력 때문에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며 ‘뺑소니 차량’처럼 내빼버렸다.
DJ 역시 야당 지도자 시절인 1986년, “여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면 사면 복권되어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큰 목소리로 공언했지만, 당시 여권이 6·29 선언으로 직선제를 수용하자, 87년 대선에 기꺼이 출마했다. 뿐만 아니라 정계를 떠난다고 선언하며 비장하게 영국으로 망명객처럼 떠났지만, 지금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한국정치의 풍토병 ‘환관(宦官)정치’
우리나라 국민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높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국민은 정치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을 지니고 있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든가, “그×이 그×이다”라는 자조적인 말속에도 극복될 줄 모르는 정치적 불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서려 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다면 정치에 대한 불신이 얕아야 하고 반대로 정치에 대한 불신이 많다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높은 정치적 관심과 깊은 정치적 불신이 공존하고 있다. 흥미로운 모순이다.
우리의 정치세계를 지배하는 문제점은 무엇보다 권위주의, 온정주의, 지역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선 1인 중심주의, 당내 비 민주주의가 활개치고, 그 다음에 합리적 정책이나 이념 대신에 연줄이나 인간관계에 따른 파벌의 이합집산이 난무하며, 마지막으로 지역차별·지역감정에 뿌리내리는 전근대적 정치 행태가 억척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있다.
이런 마당이기 때문에 국민의 복리나 당 전체의 일체감·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회를 건설하겠소” 하는 국민을 향한 비전 있는 약속 대신에, “우리는 누구를 모시겠소이다” 라는 정치권 내의 단말마적 충성다툼이 정치의 흐름을 좌우하게 된다.
국민보다는 보스의 눈치를 우선적으로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리하여 국민의 앞날보다는 보스의 미래에 더욱 연연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보스들이 봉건 영주처럼 서로 ‘적대적인’ 개별 지역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사실, 이것이 한국 정당정치의 비극인 것이다. 물론 정치세계에는 계파와 파벌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패거리정치’와 ‘내시정치’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는 좌파와 우파, 진보파와 보수파, 또는 하다 못해 매파와 비둘기파 등과 같은, 이념이나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그룹이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다만 상도동파니, 동교동계니 하는 ‘동사무소 식’ 정치파벌만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선사 시대의 혈거집단 형 정치세력만이 활개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골목대장들의 좌충우돌이 곧 정치가 된다.
이를테면 노선 차이가 계파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계파가 노선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단 파벌이 만들어진 연후에 비로소 다른 파벌들과의 차별성을 고려한 정책이나 세계관의 차이가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패거리정치’는 왕조시대의 ‘내시정치’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결정적인 폐해는 바로 1인 집중주의에 있다. 계파 수장의 말씀이 곧 법이요, 진리다. 모든 길은 그에게로 통한다. 예컨대 야당 시절 권노갑 현 민주당 고문은 “선생님이 숨을 쉬라고 하니 숨을 쉰다”고 자랑스레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밝힌 적이 있다.
절체절명의 극한상황이 이런 식으로 연일 자연스레 되풀이되는 것이 한국 정치 판의 현실이다. 이를테면 민주적 절대주의라든가 권위주의적 민주화 같은 ‘뜨거운 얼음’이 일반화되어 있는 실정이라는 말이다. 이른바 ‘문민독재’라는 어법이 출현하는 배경도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풍토가 계속되는 한 어느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비슷한 현상이 재연될 것임은 자명한 이치다.
이런 관점에서 올바른 정치인으로 공인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격 요건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째, 연줄이나 인간관계, 학벌 등의 객관적 연고주의 대신에 합리적 정책이나 이념적 노선을 추구할 것.
둘째, 지역차별·지역감정에 호소하고 뿌리내리는 전 근대적 정치 성향을 배척할 것.
셋째, 1인 중심주의, 상명하달, 집단 내 비 민주주의 등을 배격할 것.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얼마 후에 한 정신병원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총통이 온다고 입원환자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히틀러가 병원에 들어서자 전원이 “하일 히틀러!” 하고 경례를 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구석에 그냥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히틀러가 물었다.
“왜 나에게 경례를 하지 않는가?”
“각하, 저는 간호사입니다.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 정치인 중에 과연 이런 간호사가 몇 명이나 있을까?
“이봐,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게다가 쓸 데 없는 말이 너무 많아. 이제 그만 입 닥치고 앉지 그래!”
그러자 그 정치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병원장에게 소리질렀다.
“저 사람을 끌어낼 때까지 기다리겠소.”
“끌어내다니오?”
병원장이 대꾸했다.
“절대 안 되오. 저 불쌍한 친구는 여기 8년 동안 있었지만, 제 정신으로 말한 것은 이게 처음이오.”
무책임하게 아무 말이나 막 지껄여대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성향과 수준을 귀띔해주는 우화다.
‘사기꾼 공화국’
한국 정치인들은 거짓말 챔피언들이다. 약속 뒤집기의 명수들인 것이다. 대한민국을 ‘사기꾼 공화국’이라 불러도 크게 탓할 말이 없을 정도다.
소위 ‘국부’ 이승만은 6·25 전쟁 발발 시, 서울 시민들을 향해 ‘수도 사수!’를 절규했다. 그러나 그가 일찌감치 서울을 몰래 빠져나간 사실을 안 시민들은 깊은 배신감을 곱씹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한편 민주주의 시대의 절대군주였던 박정희는 또 어땠는가. 5·16 군사 쿠데타 직후 그는 “언제라도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얼마 후 “다시는 이 땅에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비통해 하는 척하며 정권을 후딱 낚아챘다.
그에 뒤질 새라 전두환 장군도 1979년 12월 12일 12·12 쿠데타 이후 “군부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몇 차례나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윽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대통령이 되고 말았으니 정치가 도대체 어떻게 굴러갔겠는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집권 2년이 되면 중간평가를 받겠다”던 자신의 선거 공약을 물론 파기해 버렸다.
또 우리의 ‘문민’ YS는 어쨌는가. 1992년 대통령 선거 유세과정에서 “쌀 수입은 대통령이 되면 그 직을 걸고라도 막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무면허 운전사’ YS는 집권 첫 해, 우루과이 라운드의 국제적 압력 때문에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며 ‘뺑소니 차량’처럼 내빼버렸다.
DJ 역시 야당 지도자 시절인 1986년, “여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면 사면 복권되어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큰 목소리로 공언했지만, 당시 여권이 6·29 선언으로 직선제를 수용하자, 87년 대선에 기꺼이 출마했다. 뿐만 아니라 정계를 떠난다고 선언하며 비장하게 영국으로 망명객처럼 떠났지만, 지금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한국정치의 풍토병 ‘환관(宦官)정치’
우리나라 국민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높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국민은 정치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을 지니고 있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든가, “그×이 그×이다”라는 자조적인 말속에도 극복될 줄 모르는 정치적 불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서려 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다면 정치에 대한 불신이 얕아야 하고 반대로 정치에 대한 불신이 많다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높은 정치적 관심과 깊은 정치적 불신이 공존하고 있다. 흥미로운 모순이다.
우리의 정치세계를 지배하는 문제점은 무엇보다 권위주의, 온정주의, 지역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선 1인 중심주의, 당내 비 민주주의가 활개치고, 그 다음에 합리적 정책이나 이념 대신에 연줄이나 인간관계에 따른 파벌의 이합집산이 난무하며, 마지막으로 지역차별·지역감정에 뿌리내리는 전근대적 정치 행태가 억척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있다.
이런 마당이기 때문에 국민의 복리나 당 전체의 일체감·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회를 건설하겠소” 하는 국민을 향한 비전 있는 약속 대신에, “우리는 누구를 모시겠소이다” 라는 정치권 내의 단말마적 충성다툼이 정치의 흐름을 좌우하게 된다.
국민보다는 보스의 눈치를 우선적으로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리하여 국민의 앞날보다는 보스의 미래에 더욱 연연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보스들이 봉건 영주처럼 서로 ‘적대적인’ 개별 지역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사실, 이것이 한국 정당정치의 비극인 것이다. 물론 정치세계에는 계파와 파벌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패거리정치’와 ‘내시정치’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는 좌파와 우파, 진보파와 보수파, 또는 하다 못해 매파와 비둘기파 등과 같은, 이념이나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그룹이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다만 상도동파니, 동교동계니 하는 ‘동사무소 식’ 정치파벌만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선사 시대의 혈거집단 형 정치세력만이 활개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골목대장들의 좌충우돌이 곧 정치가 된다.
이를테면 노선 차이가 계파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계파가 노선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단 파벌이 만들어진 연후에 비로소 다른 파벌들과의 차별성을 고려한 정책이나 세계관의 차이가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패거리정치’는 왕조시대의 ‘내시정치’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결정적인 폐해는 바로 1인 집중주의에 있다. 계파 수장의 말씀이 곧 법이요, 진리다. 모든 길은 그에게로 통한다. 예컨대 야당 시절 권노갑 현 민주당 고문은 “선생님이 숨을 쉬라고 하니 숨을 쉰다”고 자랑스레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밝힌 적이 있다.
절체절명의 극한상황이 이런 식으로 연일 자연스레 되풀이되는 것이 한국 정치 판의 현실이다. 이를테면 민주적 절대주의라든가 권위주의적 민주화 같은 ‘뜨거운 얼음’이 일반화되어 있는 실정이라는 말이다. 이른바 ‘문민독재’라는 어법이 출현하는 배경도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풍토가 계속되는 한 어느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비슷한 현상이 재연될 것임은 자명한 이치다.
이런 관점에서 올바른 정치인으로 공인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격 요건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째, 연줄이나 인간관계, 학벌 등의 객관적 연고주의 대신에 합리적 정책이나 이념적 노선을 추구할 것.
둘째, 지역차별·지역감정에 호소하고 뿌리내리는 전 근대적 정치 성향을 배척할 것.
셋째, 1인 중심주의, 상명하달, 집단 내 비 민주주의 등을 배격할 것.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얼마 후에 한 정신병원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총통이 온다고 입원환자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히틀러가 병원에 들어서자 전원이 “하일 히틀러!” 하고 경례를 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구석에 그냥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히틀러가 물었다.
“왜 나에게 경례를 하지 않는가?”
“각하, 저는 간호사입니다.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 정치인 중에 과연 이런 간호사가 몇 명이나 있을까?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