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감정 조장하면 정치생명 끝!
2002/2002년 05월 :
2002/04/28 00:00
생활 속에 뿌리박힌 지역주의 넘어서는 영호남 민심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한없이 쉬운 자리다.
막말로 길다가 밟히는 게 호남사람·영남사람이지만, 지역딱지 붙이고 한 자리에 앉아 지역주의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좀처럼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수십 년간 전주에서 살다가 얼마 전 서울로 올라온, 전주 이씨의 핏줄을 이어받은 이호영 씨(39세·회사원), 호방한 경상도 사나이의 향취가 느껴지는 부산토박이 이승열 씨(51세·자영업). 서로 격의없이 얘기하는 데는 소주에 삼겹살이 좋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자마자 겉옷을 벗고, 넥타이를 헐렁하게 고쳐맸다.
이호영 - 부산서 올라오셨다고 들었는데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앗!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기대했는데 얌전한 표준말이다. 사투리 안 쓰시냐고 물어보니 북도는 사투리가 별로 없고, 게다가 전주는 거의 쓰지 않는다고. (말 맛을 살리려던 당초 계획에 심대한 차질이 생겼다.) 소주잔이 몇 순배 돌고 불판 위의 고기들이 지글지글 춤추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승열 - 지역감정이라 카는거, 다 정치 하는 놈들이 지들 국회의원 해먹을라꼬 만든 거 아니겠심니꺼. 김영삼이고 김대중이고 자리하나 할라꼬 지역감정 불러일으킨 거지. 거기에 사람들이 놀아난 거 아니겠능교? 마 그동안 실컷 욕하믄서도 투표장에 들어서면 자기 지역 찍는 게 어쩔 수 없던 긴데, 솔직히 이번 광주에서 유권자들이 노무현 찍어 주는 거 보고 경상도 사람들 많이 바뀌었심더.
이호영 - 자기 지역 사람 시켜놔 봐도 별 수 없더란 걸 사람들이 알게 된 거 같아요. 김대중이 대통령 되기 전에는 저도 꼭 ‘김대중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 해요. 지역보고 찍는 게 아니라 인물보고 찍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 거 같아요. 하지만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은 아직도 지역주의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어요. 이 상황 자체가 조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제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영·호남 지역감정 교육받으며 자랐다
이승열 - 세상 많이 바뀐기라. 내 학교 다닐 때 정말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 험한 소리 많이 들었심더. ‘전라도 놈들은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 ‘뒷끝이 안 좋다’는 얘기 수도 없이 들으면서 안 자랐습니꺼.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편이 확 갈라지데예. 심지어는 “전라도 놈들은 속에 담아놓고 뒷통수 깐다”고도 말 안했능교. 조선시대 선왕이 죽을 때 후대 왕에게 꼭 남겼던 유언 중 하나가 ‘전라도 사람들은 중용하지 말아라’였다 소리도 하고.
이호영 - 고려시대 훈요10조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데요. 고려시대 때부터 차별 받아 왔다고 할 정도로 전라도는 피해의식의 뿌리가 깊죠. 어릴 적부터 피해의식을 교육받았어요. 이를테면 예전에는 전주가 5대도시 중 하나였는데, 경상도 정권이 계속되면서 완전히 쇠퇴했다고. 실제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주 시내에 비포장 도로가 있었어요. ‘부산에 갔다 왔더니 도로가 이따만 하더라’는 얘기도 들리고요. 광주사태 때는 전두환이가 특수부대 뽑을 때 경상도 사람만 선발해서 투입시켰다는 얘기도 했지요. 김대중정권 들어서고는 아는 대구 사람이 ‘김대중이 대구경제 망쳐놨다’고 그러더라구요.
이승열 - 98년도인가. 목포에 안갔능교? 아내가 목포사람 인기라.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는데 집 앞에 세워둔 자동차 바퀴 두 개가 빵구나 있는기라.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부산 차 남바보고 누가 빵구 낸 걸 꺼란 생각이 듭디다.
“이제 국민들이 똑똑해졌심더”
이호영 - 우리 자형이 포항 사람이에요. 그래서 누님이 포항에 사는데, 왜 아줌마들은 고향 이름을 따서 어디 어디댁 하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누나는 전주댁이 아니라 서울댁이라고 불려요. 괜히 주위사람들에게 왕따 당할까봐 고향이 전주라고 못 밝힌 거죠. 87년 선거 때 후보자들이 죽 선거벽보를 붙여놓고 다음날 보면 김대중 선거벽보만 빼놓고 딴 건 모두찢어져 있곤 했어요. 김대중 벽보에는 낙서 하나 없었고요. 하지만 김대중이 대통령 되고 정치하는 것보고 지역사람 시켜놔 봤자 바뀌는 거 하나도 없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죠.
이승열 - 지역감정 만든 것도 정치인이고, 지역감정 쓸 데 없다는 거 일깨워 준 것도 정치인 아닝교. 솔직히 김대중 대통령 되면 데모 없어질 줄 안 알았습니꺼. 부정부패 노동자 탄압 다 없어질 줄 알았습니더. 근데 지나 보니까 날마다 데모하고 노동자 더 살기 힘들어졌지 않습니꺼. 이제 ‘한’의 정치는 끝났습니더. 앞으로 훌륭한 정치인들도 많이 나올텐데 ‘맺힌 정치’는 그만해야지예. 재야사람들도 정치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더. 그 사람들도 가슴에 뭔가 맺혀 있는 사람들 아니겠능교. 그동안 영남에선 한나라당 후보면 나뭇가지만 꽂아놔도 당선된다고 했는데 앞으로는 그런 거 힘들껍니더. 지역 당 후보라고 찍어 놔 봐야 서울 가서 지 살 자리 보느라고 바쁘지, 지역주민 신경 쓰는 사람 봤능교? 광주, 전북에서 사람들이 노무현 밀어주는 거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몇 년 새에 많이 바뀌었다는 것느낌니더.
이호영 - ‘광주의 선택’ 이야기하는데 이건 지역주의 극복 이외에도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표출된 결과라고 봐요. 구태의연한 정치 행태에 신물이 났으니까요. 인터넷의 확산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봐요. 인물에 대한 정확한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구요.
이승열 - 그 동안은 신문에서 뭐라 하면 그냥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는 국민들이 똑똑해졌심더. 아마 앞으로는 국회의원이 지역감정 조장하는 발언하면 그 순간 사장되지 않겠습니꺼. 영남정권 때 경부고속도로 생기고, 호남정권 때 서해안 고속도로 생겼으니 균형도 찾아갈 테고.
이호영 - 네. 물론 영남정권이 계속된 탓도 있겠지만 그 동안 미국을 위시한 태평양 시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남쪽이 발달한 면이 있었다고 봐요. 하지만 이제는 태평양 시대가 가고 중국이 중심이 되는 서해안 시대가 됐어요.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러한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겁니다. 자연히 경제적인 지역균형이 이루어지겠지요. 무엇보다도 서로 자주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지역감정도 사라질 겁니다. 누나가 자형을 처음 데려왔을 때만 해도 우리 부모님은 펄쩍 뛰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들보다 더 좋아하세요.
교류가 최고다
이승열 - 정말 서로 교류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더. 지금도 가끔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안 있습니까. 그때마다 “니 전라도 사람한테 당한 적 있나?” 라고 물으면 대답 못 합니더. 만나보면 다 좋은 사람들인데 꼭 호남 사람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얘기 안 하능교.
이호영 - 이미 많이 변했어요. 완전히 극복하려면 아직도 5년이 걸릴 지 10년이 걸릴 지 모르지만, 사실 몇 년 전 만해도 지금 같은 변화 상상도 할 수 없었죠.
이승열 - 네. 세상 많이 바뀌었습니더. 이 자리가 영남사람·호남사람 운운하며 만나는 마지막 자리가 될 끼라고 봅니더. 안 그렇겠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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