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1일 18년 간 같이 일했던 벵골인 인권변호사 아디카리 선생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보다 세 살이나 적었지만 늘 침착하고 과묵해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던 그였다. 전립선암으로 1년여 투병생활을 하다 다카에 있는 자기 집에서 운명을 한 것이다. 그는 유명한 인권변호사였다. 1982년 5월 독일 개발원조처의 아시아국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우리는 곧 친해졌다.

“법정에서 가난과 무지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나의 국민들을 수 없이 변호했습니다. 지칠 줄 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빈곤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CCDB(Christian Commission for Development in Bangladesh)를 설립했습니다… 사회개혁을 위해섭니다. 개발을 위해섭니다. 변호사로서보다 이 길이 더 빠를까 해서요… 이사회는 기독교, 이슬람교 신자를 같은 수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식인과 농민 대표 등 현장인들을 같은 수로 했습니다. 이사회의 삼분의 일은 여성으로 구성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매년 반복되는 홍수 때 구호물품을 받아 연명하는 타성을 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위한 의식의 변화를 꿰해야 합니다. 즉 정신혁명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가정경제의 주인공이 되고 마을의 주인공이 되고 나아가 지역사회의 운영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조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밤새워 열변을 토했다.

고리대금으로 피해입는 농민 위해 신용금고 도입

인도, 네팔, 부탄, 미얀마,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네번째로 가난한 나라다.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40만 외국인 노동자 중에 가장 많은 수가 이곳 출신이다. 방글라데시의 비극은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홍수에서 비롯된다. 홍수 예방을 위해 10년 전 유엔은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정부의 협력 아래 연구를 진행했다. 네팔, 인도를 거쳐 매년 5월 몬순(雨期)에 찾아드는 홍수는 불행하게도 방글라데시에 와서 그 진로를 매년 바꾸기에 예측이 어렵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홍수의 범람 방향이 그 때 그 때 온도와 기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지금도 방글라데시에서는 해마다 홍수로 인명피해를 내는 안타까운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요즘은 유엔과 국제 NGO들이 5m가 넘는 기둥을 세우고 식량을 비축해 500명 이상을 홍수기간 중에 수용할 수 있게 한 ‘긴급조난의 집(Emergency Shelter)’을 많이 지어 희생자의 수를 줄이고는 있다.

이런 현실에서 아디카리 변호사가 이끄는 CCDB는 어떤 일을 했을까. 우선 그는 고리대금업자들의 농간에서 가난한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신용금고를 도입했다. 기금은 처음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외부기관의 무상원조로 확보하고 상당한 시간이 흘러 주민들이 신용금고를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때가 오면 그 기금을 마을에 기증함으로써 마을 주민이 고리대금에서 놓여날 수 있게 하였다. 신용금고를 도입한지 10년이 되는 1995년 외부연구팀의 보고에 따르면 약 500개 조합의 80%가 성공했다고 하니 대단한 성과이다. 산파를 활용한 출산지원사업인 TBA( Traditional Birth Assistance)도 성공적이었다. 방글라데시 인구의 90%는 농촌에 산다. 이들이 도시의 산부인과를 찾는다는 것은 여간한 부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므로 전통적 방법으로 농촌 여성을 교육시켜 출산을 돕는 것이었다. TBA는 또한 종합개발 프로그램이다. 마을 단위로 교육, 농업, 목축, 건강 프로그램을 종합적으로 개발해 생활이 나아질 수 있게 하는 사업이다. 우리나라 NGO도 이런 기관에 힘을 보태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극에 달한 관료집단의 부정부패

여기서 방글라데시의 30년 역사를 살펴보자. 2차대전이 끝난 지 2년 뒤인 1947년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은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기반으로 하는 독립국가로 각각 태어났다. 1970년 12월 선거에서 동파키스탄의 독립주의자인 쉐이크 무지브 라흐만(Sheikh Mujib Rahman)은 동파키스탄의 분리를 주장,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서파키스탄의 대통령인 야햐 칸(Yahya Khan)과 회담을 했다.

그러나 회담이 결렬되고 파키스탄 군인들이 동파키스탄을 장악했다. 1971년 겨울 인도군이 동파키스탄에 진군했고, 방글라데시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방글라데시는 영국식 헌법을 도입하고 무지브는 1973년 3월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의회민주주의는 명목뿐이었다. 1975년 8월 15일 무지브가 암살 당한 뒤 1990년까지 쿠데타가 반복되어 군인들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어졌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었고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

마지막 군인 대통령이었던 에르샤드(Ershad) 장군이 1990년 민중 항거로 실각할 때까지 독재정권 치하에서 국민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부정부패였다. 군인, 관료집단의 부패는 그 도를 더해갔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인 홍수 피해까지 극에 달했으니 생존권이 이 나라에서는 중요한 인권으로 받아들여지는 실정이다.

1991년 카레다 지아(Khaleda Zia) 여사가 수상으로 취임해 의회민주주의를 부활시킴으로써 16년 간의 대통령제는 막을 내렸다. 1996년 야당인 아오이당의 당수였던 쉐이크 하시나(Sheikh Hasina)여사가 극적으로 선거에서 승리하여 여성끼리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2001년 전 수상이었던 지아 여사가 이끄는 BNP 당이 나머지 3당과 연립해 의회에서 2/3의 의석을 휩쓸게 되면서 하시나 수상은 물러나고 지아 여사가 수상에 재취임했다. 30년 역사의 방글라데시는 20년 간 쿠데타를 경험하고 의회민주주의로 새출발을 하여 두 여성이 번갈아 가며 정권을 담당하고 있다. 다음 호에는 이 나라의 인권상황을 살펴본다.

박경서
2002/04/28 00:00 2002/04/28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trackback/6306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