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천 잉어의 눈물
2002/2002년 07월 :
2002/07/02 00:00
언제부터인가, 마치 연례행사라도 치르듯이, 죽어가는 중랑천의 잉어들을 긴급구조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시커먼 중랑천 위로 커다란 잉어들이 허연 배를 드러내고 둥둥 떠 있는 모습은 안쓰럽기만 하다. 죽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중랑천에 잉어들이 돌아왔다고 좋아하기도 했지만, 아직 중랑천은 잉어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한때 중랑천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식 근대화, 다시 말해 ‘파괴적 개발’을 통한 경제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근대화의 부정적 상징이었다. 그곳은 무조건적인 공업화와 도시화가 자연을 어떻게 죽여 없애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본래는 둘레의 들을 적셔주며 많은 생물들을 살려주던 맑은 물이 아무것도 살 수 없고 살릴 수 없는 죽음의 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중랑천은 잘 보여주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바로 우리 곁에서, 바로 우리 자신에 의해 일어났던 것이다.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의 봄, 그러니까 다카키 마사오가 총을 맞고 죽은 1979년의 봄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중랑천으로 쓰레기를 주우러 갔다. 그 시절에 학생들은 흔히 청소부로 이용되기도 했다. 물론 둔치의 쓰레기를 줍는다고 해서 중랑천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몇 해 전에 ‘자연보호헌장’을 발표하기도 했으니, 쓰레기라도 주워야 한다고 교육청에서는 생각했을 것이다. 참으로 쓰레기 같은 시절의, 쓰레기 같은 행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쓰레기 같은 행사가 완전히 쓰레기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그때의 기억이 많이 어슴푸레해지기는 했지만, 그 행사 덕에 그 무렵 중랑천의 상태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랑천은 그냥 보기에도 새까맸다. 나무 막대기로 바닥을 헤집거나 돌이라도 던질라치면, 보기에도 역겨운 시커멓고 미끄덩거리는 덩어리들이 피어올랐다. 풀이 자라고 있는 물가에서는 간혹 생물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보기에 더욱 더 역겨운 실지렁이들이었다. 죽어버린 시커먼 물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새빨간 실지렁이, 내 기억 속에서 중랑천은 오랫동안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중랑천을 건너다녔다. 걸어서 건넌 것은 아니고 거의 늘 차를 타고 중랑교를 건너다닌 것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다 죽었으나 예전엔 파랗게 살아서 펄떡이던 왕숙천으로 놀러가거나, 아버지쪽 어른들의 고향인 아름답기 그지없는 양수리로 놀러가거나, 또 내가 아주 어려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도, 나는 적어도 일년에 댓번씩은 중랑천을 건너다녀야 했다. 그런데 그 무렵의 중랑천은 이미 죽은 하천의 대명사와 같은 것이었다.
차창 밖으로 중랑천을 보며 잉어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시궁창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잉어떼, 그리고 그악스런 사람들
그 시절 중랑천의 둑 위에는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밀려난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이 죽어버린 하천의 둑 위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청량리에서 나와 유년의 한때를 함께 보낸 한 친구네도 청량리가 재개발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중반에 이곳으로 떠밀려 갔다.
한 일년인가 지나서 어느날 불쑥 그 친구가 나타났다. ‘국민학교’도 그만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그 친구를 따라서 그 친구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경갔다. 중앙선 철길을 건너면 바로 ‘뚝방촌’이 시작되었다. 시커먼 판잣집들이 둑 위에 겨우 자리를 잡고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중랑천은 그저 죽은 하천의 대명사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동네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지금 나는 중랑천 옆에서 살고 있다. 바로 옆으로 이사 와서 산 지는 이제 만 5년을 넘게 되었고, 근처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벌써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어려서부터 죽은 하천으로 알고 있던 중랑천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이 근처에서 살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었을 때인 1990년대 초였던 것 같다.
가끔 오가다가 중랑천에서 낚시하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 사람들이 정말로 낚시하는 사람들이라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 시궁창에서 낚시를 한다는 말인가? 정말이지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금 시커멓고 미끄덩거리는 덩어리들과 새빨간 실지렁이들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중랑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한천교라 불리는 이 다리는 아마도 중랑천 위에 놓인 다리들 중에서 가장 작은 다리일 것 같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리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리 위에 가서 아래를 보니, 정말이지 커다란 잉어들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잉어들은 모래가 쌓인 얕은 물에서 등지느러미를 물 바깥으로 내놓은 채 느릿느릿 헤엄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잉어들은 알을 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더러운 물에 잉어들은 알을 슬기 위해 모였고, 그렇게 모인 잉어들을 사람들은 노리고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한 지 일년이 지난 1998년 여름이었다. 그 해 8월에 비가 아주 많이 내렸다. 하루는 아침에야 겨우 잠을 자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나를 깨우셨다. 중랑천이 넘치니 주차장에서 차를 빼라고 방송했다는 말씀이셨다. 나가보니 온통 누런 물바다였다. 주차장의 보도가 거의 잠길 정도로 중랑천 물이 넘쳐오른 상태였다. 정말 황당했다. 다행히 그 정도에서 비가 그치고 오후가 되면서 물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물이 빠지는 걸 보려고 동네 사람들이 한천교 위에 모였다. 물에 잠겼던 동부간선도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청소차량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이 빠지면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잉어들이 동부간선도로에 고인 물 위에서 힘겹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담을 넘어 동부간선도로로 뛰어내리더니 어디선가 오토바이가 한 대 나타났다. 담을 넘은 사람들은 손에 나무몽둥이를 쥐고는 잉어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커다란 푸대자루 하나가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잉어들을 잡았다. 오토바이는 그 잉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다. 건너편에서는 무너진 시멘트 둑 위에서 한 사내가 열심히 투망질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그악스럽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중랑천에 사는 모든 생명은 불쌍하다
한강과 마찬가지로 중랑천도 다가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바깥 둔치를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동부간선도로가 합쳐지는 월계역 앞에서는 찻길을 건너면 중랑천 둔치로 들어갈 수 있다. 중랑천의 둔치에서는 하루도 공사가 쉬는 날이 없다. 월계역 앞의 둔치는 삭막하고 어지러운 공사판이다.
중랑천의 본래 이름은 ‘중량천’이다. 지금의 이름은 일본 제국주의가 멋대로 고쳐 부른 것이다. ‘중량천’은 ‘들을 가로지르며 적셔주는 큰 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 이름을 잃은 중랑천은 그 뒤 줄곧 망가지기만 했다. 잉어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살아났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금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공사들도 중랑천을 살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전두환의 한강종합개발사업은 강변에 시멘트를 처발라서 한강의 강변 생태계를 죽여 없애는 사업이었다. 시멘트업자들은 땅 짚고 헤엄치기로 떼돈을 벌었겠지만, 한강의 주인인 물고기들은 삶의 텃밭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렇게 생태계를 죽여 없애는 사업이 그 뒤 전국의 크고 작은 모든 하천으로 퍼져간 일이다. 중랑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가에 시멘트 둑을 이중으로 쌓아올려서, 지금 중랑천은 한강처럼 시멘트 둑에 갇혀서 흐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명은 이 시멘트 둑 사이로도 파고들었다. 시멘트 둑은 철저히 생명을 짓밟았지만, 그 틈에서 다시 생명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개망초나 삼환덩굴 따위의 강한 귀화식물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러나 시멘트 둑 위에서 자라는 싱싱한 풀들은 사뭇 감동적이다.
장마 때마다 넘친 물이 흙을 남겨두었고, 그 위에서 풀들이 자라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멘트 둑이 생명의 흙으로 바뀌고 있다. 그 덕에 갯버들도 곳곳에서 볼 수 있고, 그 곁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들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랑천의 모든 생명은 여전히 불쌍하기만 하다. 물 속의 잉어나 붕어는 말할 것도 없고, 물 위의 왜가리며 오리, 물가의 풀들도 여전히 불쌍하기만 하다. 시멘트 둑 위에 생명의 잔치판을 벌여놓은 풀들을 사람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의 성화에 밀려난 생명들의 보금자리로 남겨두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자동자 전용도로로 가로막힌 이곳까지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중랑천의 둔치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나 곳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태릉으로 가는 길목인 월릉교 아래에서는 거의 상업농 수준으로 대규모 경작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응봉역 아래에서는 큰 나무들이 쓰러져 넘어져 있는데, 누군가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고는 밭을 일군 것이다.
각 구청에서는 봄이면 이곳을 유채꽃으로 치장하기 위해 곳곳에 유채밭을 만들었다. 이런 구청에서 경작행위를 제대로 단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새마을운동협의회나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같은 낯익은 팻말들을 이 밭에서 볼 수 있다. 낡은 것이라고 해서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에서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더 나쁜 건 이곳을 놀이공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주거공간이며 상업공간처럼 사람도 차도 많은 공간에는 잠시 숨돌릴 수 있는 여유공간조차 만들어 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떠밀려 온 생명들이 겨우 숨어서 다시금 살아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다니.
풀이 무성하던 곳은 시커먼 주차장이 되었고, 꽃들이 피어나던 곳은 시뻘건 인라인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멋진 구호가 이 나라에서는 여전히 구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자전거도로를 놓는 것은 이런 유의 사업 중에서는 제일 나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사업도 토목사업이 아니라 생태사업이자 문화사업의 관점에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한강과 지천을 자전거로 일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곳의 자연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엉망으로 망가진 한강과 지천의 자연을 되살릴 필요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노원구 쪽의 시행주체를 보니 ‘노원구 하수도과’로 되어 있다. 하수도과라고 해서 자전거도로를 못 놓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기는 하다만, 엉망인 하수도를 돌보기에도 여념이 없을 하수도과가 과연 제대로 된 자전거도로를 놓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새까만 물에서 피는 새하얀 세제 거품꽃
중랑천 둘레에서는 아파트 공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것도 역시 한강의 변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다. 이촌동과 압구정동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이래 한강에는 강변의 정취를 사유화하는 아파트들이 계속해서 들어섰다. 그 결과 유람선을 띄워도 찻길과 아파트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중랑천이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서울의 도처에서 아파트들이 제멋대로 솟아오르게 되면서, 중랑천 둘레는 거의 아파트들로 둘러싸여 버리고 말았다. 다리의 복판에나 서야 시야가 조금 열릴까, 이쪽을 보아도 저쪽을 보아도, 아파트들이 우리의 시야를 막고 서 있다.
여전히 시궁창 상태를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이곳이 열린 공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둘레에 열심히 아파트를 짓는다. 인공의 조형물이나 건축물들이 들어서지 않은 곳, 그래서 자연이 꽉 들어차서 살아 있는 곳, 이런 곳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중랑천 둘레의 난개발 아파트들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중랑천의 둔치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차를 몰고 온 사람들도 있고, 걸어온 사람들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들도 있고, 유모차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고, 낚시하러 온 사람도 있고, 연애하러 온 사람도 있고, 늙은이도 있고, 아기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모형 비행기를 날리고, 어떤 사람들은 거품꽃이 잔뜩 피어난 시커먼 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불법으로 일군 밭을 돌보기 위해 일하러 온 ‘농부’도 있지만, 대부분은 산책을 하며 쉬거나 놀러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더럽고 거친 다리 밑에서 이슬을 피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한양대 뒤쪽에서 중랑천은 청계천을 끌어안는다. 이곳의 중랑천은 바닥이 얕고 돌이 많이 깔려 있어서 물살이 여울에서처럼 빠르게 일렁이며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종의 자연 정화장치이다. 물론 중랑천의 오염은 너무 심해서 이런 정도의 정화장치로는 택도 없지만.
그래도 두 물이 합치는 이곳에 먹이감이 많은 모양이다. 왜가리들이 떼로 몰려 있고, 여기저기에서 오리들도 언제나 쉽게 볼 수 있다. 안쪽의 작은 돌 위에 오리 한 가족이 앉아서 쉬고 있는 살가운 모습을 보았다. 엄마 오리와 네 마리의 새끼 오리였다. 눈을 돌려 가까이 발 밑의 물을 보니, 저 오리들이 불쌍하게만 여겨진다. 너무 더럽다.
중랑천에도 많은 다리들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뚝섬과 한양대를 이어주는 살곶이다리로 조선의 개국과 함께 도성에서 동쪽으로 나가는 길목으로 놓은 것이다.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반쪽은 옛날 것이고 반쪽은 복원해서 이어붙인 것이다. 그런데 옛것과 새것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투자해서 제대로 복원해야 명소가 될 터인데, 사진으로 볼 때는 근사하더니 막상 가서 보니 꼴이 영 말이 아니다. 어차피 시궁창 위에 놓인 다리라고 해서 이렇게 엉망으로 복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살곶이다리를 지나 한강 쪽으로 좀더 나아가면 ‘잠수교’를 만나게 된다. 다리라기보다는 시멘트로 만든 보다. 이 보를 타고 흘러내리면서 중랑천은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새까만 물에서 새하얀 거품꽃이 만발하는 것이다. 걸러지지 않은 세제가 결국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까맣고 하얀 물이 뚝섬을 지나 한강으로 콸콸 흘러들어간다.
잉어가 중랑천으로 오르는 까닭은 중랑천이 살아나서가 아니라 한강이 시멘트로 뒤덮여 죽어서 알을 슬 수 있는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강을 공원으로 이용하겠다는 구상이 한강을 다시 한 번 죽였다. 중랑천을 공원으로 이용하게 되면서 우리는 중랑천을 다시 한번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영하고 뱃놀이할 수 있는 한강이나 중랑천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하고도 다른 생물들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중랑천의 잉어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때 중랑천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식 근대화, 다시 말해 ‘파괴적 개발’을 통한 경제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근대화의 부정적 상징이었다. 그곳은 무조건적인 공업화와 도시화가 자연을 어떻게 죽여 없애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본래는 둘레의 들을 적셔주며 많은 생물들을 살려주던 맑은 물이 아무것도 살 수 없고 살릴 수 없는 죽음의 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중랑천은 잘 보여주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바로 우리 곁에서, 바로 우리 자신에 의해 일어났던 것이다.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의 봄, 그러니까 다카키 마사오가 총을 맞고 죽은 1979년의 봄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중랑천으로 쓰레기를 주우러 갔다. 그 시절에 학생들은 흔히 청소부로 이용되기도 했다. 물론 둔치의 쓰레기를 줍는다고 해서 중랑천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몇 해 전에 ‘자연보호헌장’을 발표하기도 했으니, 쓰레기라도 주워야 한다고 교육청에서는 생각했을 것이다. 참으로 쓰레기 같은 시절의, 쓰레기 같은 행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쓰레기 같은 행사가 완전히 쓰레기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그때의 기억이 많이 어슴푸레해지기는 했지만, 그 행사 덕에 그 무렵 중랑천의 상태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랑천은 그냥 보기에도 새까맸다. 나무 막대기로 바닥을 헤집거나 돌이라도 던질라치면, 보기에도 역겨운 시커멓고 미끄덩거리는 덩어리들이 피어올랐다. 풀이 자라고 있는 물가에서는 간혹 생물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보기에 더욱 더 역겨운 실지렁이들이었다. 죽어버린 시커먼 물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새빨간 실지렁이, 내 기억 속에서 중랑천은 오랫동안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중랑천을 건너다녔다. 걸어서 건넌 것은 아니고 거의 늘 차를 타고 중랑교를 건너다닌 것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다 죽었으나 예전엔 파랗게 살아서 펄떡이던 왕숙천으로 놀러가거나, 아버지쪽 어른들의 고향인 아름답기 그지없는 양수리로 놀러가거나, 또 내가 아주 어려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도, 나는 적어도 일년에 댓번씩은 중랑천을 건너다녀야 했다. 그런데 그 무렵의 중랑천은 이미 죽은 하천의 대명사와 같은 것이었다.
차창 밖으로 중랑천을 보며 잉어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시궁창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잉어떼, 그리고 그악스런 사람들
그 시절 중랑천의 둑 위에는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밀려난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이 죽어버린 하천의 둑 위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청량리에서 나와 유년의 한때를 함께 보낸 한 친구네도 청량리가 재개발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중반에 이곳으로 떠밀려 갔다.
한 일년인가 지나서 어느날 불쑥 그 친구가 나타났다. ‘국민학교’도 그만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그 친구를 따라서 그 친구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경갔다. 중앙선 철길을 건너면 바로 ‘뚝방촌’이 시작되었다. 시커먼 판잣집들이 둑 위에 겨우 자리를 잡고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중랑천은 그저 죽은 하천의 대명사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동네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지금 나는 중랑천 옆에서 살고 있다. 바로 옆으로 이사 와서 산 지는 이제 만 5년을 넘게 되었고, 근처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벌써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어려서부터 죽은 하천으로 알고 있던 중랑천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이 근처에서 살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었을 때인 1990년대 초였던 것 같다.
가끔 오가다가 중랑천에서 낚시하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 사람들이 정말로 낚시하는 사람들이라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 시궁창에서 낚시를 한다는 말인가? 정말이지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금 시커멓고 미끄덩거리는 덩어리들과 새빨간 실지렁이들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중랑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한천교라 불리는 이 다리는 아마도 중랑천 위에 놓인 다리들 중에서 가장 작은 다리일 것 같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리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리 위에 가서 아래를 보니, 정말이지 커다란 잉어들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잉어들은 모래가 쌓인 얕은 물에서 등지느러미를 물 바깥으로 내놓은 채 느릿느릿 헤엄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잉어들은 알을 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더러운 물에 잉어들은 알을 슬기 위해 모였고, 그렇게 모인 잉어들을 사람들은 노리고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한 지 일년이 지난 1998년 여름이었다. 그 해 8월에 비가 아주 많이 내렸다. 하루는 아침에야 겨우 잠을 자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나를 깨우셨다. 중랑천이 넘치니 주차장에서 차를 빼라고 방송했다는 말씀이셨다. 나가보니 온통 누런 물바다였다. 주차장의 보도가 거의 잠길 정도로 중랑천 물이 넘쳐오른 상태였다. 정말 황당했다. 다행히 그 정도에서 비가 그치고 오후가 되면서 물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물이 빠지는 걸 보려고 동네 사람들이 한천교 위에 모였다. 물에 잠겼던 동부간선도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청소차량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이 빠지면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잉어들이 동부간선도로에 고인 물 위에서 힘겹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담을 넘어 동부간선도로로 뛰어내리더니 어디선가 오토바이가 한 대 나타났다. 담을 넘은 사람들은 손에 나무몽둥이를 쥐고는 잉어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커다란 푸대자루 하나가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잉어들을 잡았다. 오토바이는 그 잉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다. 건너편에서는 무너진 시멘트 둑 위에서 한 사내가 열심히 투망질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그악스럽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중랑천에 사는 모든 생명은 불쌍하다
한강과 마찬가지로 중랑천도 다가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바깥 둔치를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동부간선도로가 합쳐지는 월계역 앞에서는 찻길을 건너면 중랑천 둔치로 들어갈 수 있다. 중랑천의 둔치에서는 하루도 공사가 쉬는 날이 없다. 월계역 앞의 둔치는 삭막하고 어지러운 공사판이다.
중랑천의 본래 이름은 ‘중량천’이다. 지금의 이름은 일본 제국주의가 멋대로 고쳐 부른 것이다. ‘중량천’은 ‘들을 가로지르며 적셔주는 큰 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 이름을 잃은 중랑천은 그 뒤 줄곧 망가지기만 했다. 잉어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살아났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금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공사들도 중랑천을 살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전두환의 한강종합개발사업은 강변에 시멘트를 처발라서 한강의 강변 생태계를 죽여 없애는 사업이었다. 시멘트업자들은 땅 짚고 헤엄치기로 떼돈을 벌었겠지만, 한강의 주인인 물고기들은 삶의 텃밭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렇게 생태계를 죽여 없애는 사업이 그 뒤 전국의 크고 작은 모든 하천으로 퍼져간 일이다. 중랑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가에 시멘트 둑을 이중으로 쌓아올려서, 지금 중랑천은 한강처럼 시멘트 둑에 갇혀서 흐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명은 이 시멘트 둑 사이로도 파고들었다. 시멘트 둑은 철저히 생명을 짓밟았지만, 그 틈에서 다시 생명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개망초나 삼환덩굴 따위의 강한 귀화식물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러나 시멘트 둑 위에서 자라는 싱싱한 풀들은 사뭇 감동적이다.
장마 때마다 넘친 물이 흙을 남겨두었고, 그 위에서 풀들이 자라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멘트 둑이 생명의 흙으로 바뀌고 있다. 그 덕에 갯버들도 곳곳에서 볼 수 있고, 그 곁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들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랑천의 모든 생명은 여전히 불쌍하기만 하다. 물 속의 잉어나 붕어는 말할 것도 없고, 물 위의 왜가리며 오리, 물가의 풀들도 여전히 불쌍하기만 하다. 시멘트 둑 위에 생명의 잔치판을 벌여놓은 풀들을 사람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의 성화에 밀려난 생명들의 보금자리로 남겨두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자동자 전용도로로 가로막힌 이곳까지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중랑천의 둔치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나 곳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태릉으로 가는 길목인 월릉교 아래에서는 거의 상업농 수준으로 대규모 경작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응봉역 아래에서는 큰 나무들이 쓰러져 넘어져 있는데, 누군가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고는 밭을 일군 것이다.
각 구청에서는 봄이면 이곳을 유채꽃으로 치장하기 위해 곳곳에 유채밭을 만들었다. 이런 구청에서 경작행위를 제대로 단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새마을운동협의회나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같은 낯익은 팻말들을 이 밭에서 볼 수 있다. 낡은 것이라고 해서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에서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더 나쁜 건 이곳을 놀이공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주거공간이며 상업공간처럼 사람도 차도 많은 공간에는 잠시 숨돌릴 수 있는 여유공간조차 만들어 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떠밀려 온 생명들이 겨우 숨어서 다시금 살아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다니.
풀이 무성하던 곳은 시커먼 주차장이 되었고, 꽃들이 피어나던 곳은 시뻘건 인라인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멋진 구호가 이 나라에서는 여전히 구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자전거도로를 놓는 것은 이런 유의 사업 중에서는 제일 나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사업도 토목사업이 아니라 생태사업이자 문화사업의 관점에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한강과 지천을 자전거로 일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곳의 자연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엉망으로 망가진 한강과 지천의 자연을 되살릴 필요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노원구 쪽의 시행주체를 보니 ‘노원구 하수도과’로 되어 있다. 하수도과라고 해서 자전거도로를 못 놓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기는 하다만, 엉망인 하수도를 돌보기에도 여념이 없을 하수도과가 과연 제대로 된 자전거도로를 놓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새까만 물에서 피는 새하얀 세제 거품꽃
중랑천 둘레에서는 아파트 공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것도 역시 한강의 변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다. 이촌동과 압구정동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이래 한강에는 강변의 정취를 사유화하는 아파트들이 계속해서 들어섰다. 그 결과 유람선을 띄워도 찻길과 아파트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중랑천이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서울의 도처에서 아파트들이 제멋대로 솟아오르게 되면서, 중랑천 둘레는 거의 아파트들로 둘러싸여 버리고 말았다. 다리의 복판에나 서야 시야가 조금 열릴까, 이쪽을 보아도 저쪽을 보아도, 아파트들이 우리의 시야를 막고 서 있다.
여전히 시궁창 상태를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이곳이 열린 공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둘레에 열심히 아파트를 짓는다. 인공의 조형물이나 건축물들이 들어서지 않은 곳, 그래서 자연이 꽉 들어차서 살아 있는 곳, 이런 곳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중랑천 둘레의 난개발 아파트들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중랑천의 둔치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차를 몰고 온 사람들도 있고, 걸어온 사람들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들도 있고, 유모차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고, 낚시하러 온 사람도 있고, 연애하러 온 사람도 있고, 늙은이도 있고, 아기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모형 비행기를 날리고, 어떤 사람들은 거품꽃이 잔뜩 피어난 시커먼 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불법으로 일군 밭을 돌보기 위해 일하러 온 ‘농부’도 있지만, 대부분은 산책을 하며 쉬거나 놀러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더럽고 거친 다리 밑에서 이슬을 피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한양대 뒤쪽에서 중랑천은 청계천을 끌어안는다. 이곳의 중랑천은 바닥이 얕고 돌이 많이 깔려 있어서 물살이 여울에서처럼 빠르게 일렁이며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종의 자연 정화장치이다. 물론 중랑천의 오염은 너무 심해서 이런 정도의 정화장치로는 택도 없지만.
그래도 두 물이 합치는 이곳에 먹이감이 많은 모양이다. 왜가리들이 떼로 몰려 있고, 여기저기에서 오리들도 언제나 쉽게 볼 수 있다. 안쪽의 작은 돌 위에 오리 한 가족이 앉아서 쉬고 있는 살가운 모습을 보았다. 엄마 오리와 네 마리의 새끼 오리였다. 눈을 돌려 가까이 발 밑의 물을 보니, 저 오리들이 불쌍하게만 여겨진다. 너무 더럽다.
중랑천에도 많은 다리들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뚝섬과 한양대를 이어주는 살곶이다리로 조선의 개국과 함께 도성에서 동쪽으로 나가는 길목으로 놓은 것이다.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반쪽은 옛날 것이고 반쪽은 복원해서 이어붙인 것이다. 그런데 옛것과 새것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투자해서 제대로 복원해야 명소가 될 터인데, 사진으로 볼 때는 근사하더니 막상 가서 보니 꼴이 영 말이 아니다. 어차피 시궁창 위에 놓인 다리라고 해서 이렇게 엉망으로 복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살곶이다리를 지나 한강 쪽으로 좀더 나아가면 ‘잠수교’를 만나게 된다. 다리라기보다는 시멘트로 만든 보다. 이 보를 타고 흘러내리면서 중랑천은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새까만 물에서 새하얀 거품꽃이 만발하는 것이다. 걸러지지 않은 세제가 결국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까맣고 하얀 물이 뚝섬을 지나 한강으로 콸콸 흘러들어간다.
잉어가 중랑천으로 오르는 까닭은 중랑천이 살아나서가 아니라 한강이 시멘트로 뒤덮여 죽어서 알을 슬 수 있는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강을 공원으로 이용하겠다는 구상이 한강을 다시 한 번 죽였다. 중랑천을 공원으로 이용하게 되면서 우리는 중랑천을 다시 한번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영하고 뱃놀이할 수 있는 한강이나 중랑천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하고도 다른 생물들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중랑천의 잉어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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