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기간 만료 3개월 앞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황인성 사무국장


1988년 10월 일단의 유가족들이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은 135일 동안 농성을 이어갔지만 세상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1998년 11월,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절대 고독’과 ‘절치부심’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세상을 향해 다시 결연한 의지로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앞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노래가 울려퍼지는 크리스마스를 두 차례나 길바닥에서 보낸 그들은 천막 농성 422일 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의 제정을 이끌어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 두 법이 어떻게 밝은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는지.

2000년 10월 17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라는 특별한(!) 국가기구가 닻을 올리고 긴 항해에 나섰다. 그리고 많은 일이 있었다. 1973년 간첩(말의 바른 뜻에서 간첩이란 없다. 정치공작원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7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던, 그래서 ‘의문사 1호’로 불린 최종길 당시 서울대 법대교수가 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진상규명위는 밝혀냈다. 또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노동운동가 박태순 씨가 열차에 치여 죽은 사실이 은폐됐으며, 전과 3범이라는 이유만으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청송보호감호소에서 죽은 박영두 씨가 교도관들의 구타로 숨진 사실이 밝혀졌다.

수배중 한 아파트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김준배 씨(1997년 한총련 투쟁국장)가 프락치 공작에 빠져 체포됐고 구타가 있었다는 사실, 1989년 전남 거문도 바닷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이내창 씨(당시 중앙대 안성교정 총학생회장)의 석연치 않은 거문도행에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직원이 동행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또 80년대 초 녹화사업이 전두환 씨의 지시로 체계적으로 준비됐다는 증언도 확보했고, 1983년 5월 군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다가 의문사한 이윤성 씨(당시 성균관대생)가 군 녹화사업 와중에 숨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렇게 독재정권의 조직적 은폐와 세상의 무관심 속에 구천을 떠돌던 의문의 죽음들이 진상규명위의 호명을 받아, 밝은 태양 아래 그 진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서산에 해가 걸리듯 진상규명위의 활동 마감시한이 턱밑까지 차올라 있지만, 가야 할 길은 너무도 멀다.

진상규명위가 조사를 결정한 의문사 관련 사건 83건 가운데, 지금까지 조사가 끝난 사건은 16건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아직도 조사가 진행중이지만, 그 가운데 얼마나 진상을 밝혀낼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자료접근 자유로워야 죽음의 실체 밝힐 수 있다

진상규명위는 지난 1년 7개월 남짓 이중의 의미에서 ‘시간과의 전쟁’을 벌여왔다. 현장도 목격자도 기록도 거의 없는 지난 세월의 ‘의문사’의 진상을 밝힌다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대통령의 명에 따라’ 진상규명위의 요청에 성실하게 응해야 할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 검찰, 경찰은 적극적인 비협조-사실상의 방해-를 통해 수사권은커녕 기껏 조사권밖에 없는 위원회를 농락한다.

그럼에도 진상규명위는 9월 16일 조사활동 마감 시한까지 최대한 많은 ‘의문사’에서 ‘의문’이라는 고통에 찬 수식어를 떼어내야 할 절체절명의 임무를 지니고 있다. 진상규명위는 어떤 점에선 출발부터 ‘불가능한 임무’를 떠맡고 나섰는지도 모른다.

지난 6월 8일, 그러니까 한국사회가 월드컵 열기로 온통 들떠있던 날, 그리고 정치권의 끝모를 부정부패와 정쟁, 수구보수언론의 조직적인 여론조작,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속에 풀뿌리 민주주의의 다채로운 꽃밭이어야 할 지방선거가 한나라당의 압승을 향해 내달릴 때, 주한미국대사관 뒤편 이마빌딩 2층에 있는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 사무실을 찾았다. 황인성 사무국장을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사활동 마감시한을 석달 남긴 위원회의 마무리 활동이 궁금했다. 쫓고 쫓기던 자가 한 사무실 안에서 ‘적과의 동침’을 감내하며 책상을 마주한 채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대한민국 사상 초유의 조직실험의 경과도 궁금했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면서 10년이 넘게 자식의 유골을 간직하고 있는 이 땅의 어떤 부모의 썩어 들어가는 속을 진상규명위가 보듬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렇게 사무실을 찾아갔다.

요즘은 어디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나.

“지금까지 16건만 종결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머지 사건 조사도 막바지에 와 있다. 최종 종결 보고서 작성에 앞서 보강조사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사활동 마감을 앞두고 지금까지 조사내용을 어떻게 보고서로 작성하고 어떻게 공정하게 판단할 것이냐에 모든 관심이 집중돼 있다.”

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한 지도 1년 7개월여 지났다. 그간 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본다면?

“과거 국가의 인권침해 사안에 대해 국가 스스로 특별기구를 세워 조사하고 재평가하겠다는 것 자체가 역사에 없었던 일이다. 설립과 활동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기대만큼 잘 활동하고 성과를 얻어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과거에 밝혀지지 않은 진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점에선 많은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모든 게 다 덮여져 있는 것은 아니다. 최종길 교수 사건 등 몇몇은 과거의 수사결론을 명백히 뒤집을 만큼 위원회가 숨겨진 많은 것을 밝혀냈다. 수사 결론을 본질적으로 뒤집을 정도는 아니지만 부분적 사실의 변경은 꽤 많이 이뤄지고 있다.

시간이라는 물리적 한계는 극복이 불가능하다. 진상조사가 진작 시작됐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출발했다. 1987년 6월항쟁을 이어받아 88년에라도 진상규명 작업이 시작되었다면 훨씬 더 분명하고 폭넓게 진행될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의 장벽과 증거의 멸실이 발목을 잡고 있다.

법적 제약도 커다란 한계다. 진상규명위의 조사대상 사건은 대부분 발생 당시 막강한 권부에 해당하는 공안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추정되는 것(진상규명위에 진정 접수된 80건 가운데 10건은 중앙정보부 또는 안기부, 26건은 경찰, 30건은 군, 14건은 기타 국가기관을 조사대상으로 하는 것이다)인데, 위원회는 어떠한 강제력도 행사할 수 없고 단지 일반 조사활동을 통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의문사 사건은, 즉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국가 공권력의 직·간접적 개입에 의한 죽음으로 추정되지만 사인이 명백하지 않은 사건은, 직접 진술보다 방증자료가 사안을 판단하는 데 중요하다. 대부분 여러 면에서 정치적 성격을 띤 사건이어서, 단순한 직접 증거만이 아니라 당시 공안기관이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통제하기 위해 했던 다양한 행위들-국가기관의 일반 행위라지만 어떤 면에선 대단히 공작적인 성격의 것이 많은데-과 관련한 자료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할 때 죽음의 실체를 밝힐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대부분 대외비이거나 비밀문서로 분류돼 있다. 자료를 요청하면, 폐기됐다고 모른체 하기 일쑤다. 정보기관 등 공안기관은 자료를 확보, 정리, 축적, 분석하는 게 기본임무인데, 거기서 자료가 없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일체의 강제력 없이 없다는 자료를 볼 수는 없다.”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나.

“진상규명이란 몇몇 사람의 진정을 처리하기 위한 단순

재조사가 아니다. 사건을 둘러싼 정치 역사적 상황을 밝혀서 사건의 사회역사적 의미를 확인해내고 반성의 토대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국가가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피해자 처지에서 보면 한 사회가 살 만한 세상이 되기 위해선 개인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 그걸 위해선 무엇이 억울한지 진상이 규명돼야 하고, 그렇게 해서 1차적으로 명예회복이 이뤄지고 필요하다면 적절한 보상도 있어야 한다. 진상규명 작업은 한국사회가 피해자와 유족들의 고통에 정서적으로 연대하는 효과가 있다. 당시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몇몇 큰 사건을 빼면 언론조차 모르지 않았나. 그러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뒤늦게나마 그걸 풀어줘야 한다.

우리가 이런 진상규명 작업을 하는 것은 직접 사인만이 아니고 역사의 특정 시점에 왜 이런 죽음이 있었고, 그것이 자살이든 아니든 왜 의문사로 남았는가 분명하게 규명함으로써 이런 불행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기관이 국민한테 불신받지 않고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고 확립하는 체제로 바뀔 수 있도록 하는 데 이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사회는 더이상 의문사를 양산하지 않는 사회로 변화해야 한다.

그런데 조사에 참여하는 사람이나,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이 인식상의 한계를 지닌 것 같아 안타깝다. 진상규명 작업이 국가기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높여가는 작업이라면 관련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는데, 이해부족 탓에 방어적으로 나오고 은근히 방해하고 있기도 하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비협조라고 할 수 있지만 한시적으로 일을 끝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고려하면 그건 명백한 방해다.

사회적으로도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진상규명에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굳이 과거를 헤집어서 오늘의 과제와 미래를 건설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냐라거나, 갈등만 조장하는 게 아니냐는 인식이 꽤 많다. 기득권 세력이나 현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그런 입장인데, 언론 측면에서 보면 거대 언론사들이 주로 그런 행태를 보인다.”

대중의 지지와 관심 속에서만 진상규명 가능

위원회의 조직구성을 보면 (인권)운동가 또는 인권운동과 일정한 연계를 맺어온 전문가 집단, 그리고 군·검찰·경찰 등 국가수사기관 등에서 나온 파견공무원 집단 등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위원회는 현재 파견공무원 30명과 전문위원 32명, 자체 정원 22명 등 모두 92명으로 이뤄져 있다). 예전 같으면 쫓고 쫓기고, 붙잡고 수사하고 고문하는 사람과 도망치는 사람이 한 사무실에서 동료로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특별한(!) 조직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적과의 동침’ 실험인 셈인데, 지난 1년 7개월간 서로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나. 조직실험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나. 위원회의 직접적 조사활동 성과와는 별개로 이 조직실험이,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하고 생각과 처지가 다른 이에 대한 관용도가 극히 낮은 한국 사회의 미래에 중요한 시사점을 줄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조사기관 특유의 기밀유지 필요성과 민주적 공개적 운영 필요성 사이에 충돌이 생기며 조직정책의 중요한 쟁점이 돼 왔다.

위원회 활동 초기에 언론에 위원회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공무원들이 사보타지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간 적이 있다. 공무원 입장에선 (파견이라는)개인적 불이익까지 감수하면서 최대한 조직요구에 맞게 일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더군다나 조직문화가 전혀 다른, (쫓고 쫓기는 관계였던)사람들과 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무슨 정보나 빼내가고 일을 해태하는 사람으로 느끼고, 그리고 느끼는 것까지는 참을 만한데 그걸 어떻게 언론에 공개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가 있기도 했다.

불신과 마찰은 대부분 진상규명 작업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조사 범위를 어디까지 해야 하느냐를 놓고 대립이 심했(하)다. 일부에선 가능하면 조사범위를 좁히고 (직접)사인에 국한하려는 태도가 있고, 다른 쪽은 죽음에 이르는 정황까지 조사해서 그것이 개별적 상황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차이를 잘 조정하며 조직의 목표에 맞게 한 대열에 세운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충실한 내부협의도 중요하지만 당시 이 사안을 바라보는 더 넓은 범위의 대중이나 국민의 관점에서 문제를 조정하는 게 올바른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인권침해 소지가 크거나 조사 진행에 장애를 조성할 수 있는 기밀을 빼고는 가능한 한 공개해야 한다. 공개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의 합리적 생각이 진상규명 활동의 진로를 안내해나가고 부당한 방해나 은폐기도를 극복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지지와 관심 속에서만 진상규명이 가능하다.”

공무원과 민간조사관의 차이

줄곧 사회운동 현장에 있다가 성격이 전혀 다른 공무원 생활을 1년 반 넘게 하고 있다. 공무원 생활을 해보니 사회운동을 할 때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아무래도 여기는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대안을 가지고 해결해야 하는 처지여서 신중할 수밖에 없다.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김대중정부 들어 의문사진상규명위, 국가인권위, 부패방지위 등 전에 없던 독특한 성격의 국가기구가 생겼다. 이런 위원회들의 성립과 운영과정에서 (사회)운동세력의 자기한계나 고쳐야 할 점이 드러나기도 했고, 여러모로 사회운동 쪽에 자기반성의 계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나.

“일단은 네거티브(negative)라고 할까, 문제를 제기하고 실천내용을 만들어 가는 일이 포지티브(positive)한 것으로 바뀌어 가면서 더 만들어 가고 채워야 할 것들이 정부 안팎에서 많이 발견됐다고 본다. 원칙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으되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명료하지 않은 것을 밖에서는 주장할 수 있지만, 행정기구 안에서는 집행을 해야 하므로, 공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문제의식을 구체적인 수준까지 심화시켜 놓지 못할 경우 입장이 올바르더라도 공허하다. 그런 게 일하는 과정에서 더러 있다.

공무원들은 전체를 잘 보지 못하는 게 탈이다. 잘 훈련돼 있고, 자기가 맡은 일은 굉장히 성실하고 충실하게 한다. 반면 민간조사관들은 남의 일에는 많이 관여하려고 하는데, 자기 일에는 허술한 경우가 많다.

민주의 이름으로 개방적으로 논의하는 게 틀린 건 아니지만, 조직이 효과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적절한 분업도 필요하다.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야 조직이 돌아가는 것인데, 그에 상응한 전문성과 역량이 부족하다. 잘 훈련돼 있지 못한 건데, 그건 문제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 데니까 좋은 공무원도 있고, 운동권도 질이 여러 가지라….”

진상규명위는 한때 관련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단체와 마찰음을 내곤 했다. 국가인권위도 아직은 인권단체들과 관계가 무난한 것 같지 않고. 관계설정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현실적으로 보면 생산적 긴장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상규명위는 확실한 관변단체다. 그런데 기존질서에 포위돼 있는 새로운 국가기구다. 그럴수록 더더욱 시민단체와 협력이 필요하다. 긴장 속의 협력이 절실하다. 긴장이 없는 협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긴장관계가 생산적이지 않고 서로 발목을 잡고, 역량을 마모시키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그러나 80년대 초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였던 정형근, 최연희, 치안본부장을 지낸 유흥수 의원 등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진상규명위의 출두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적 헌법기관이 자기 손으로 만든 법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법을 집행하는 검찰도 마찬가지다. 김준배 씨 사건을 수사했던 정윤기 영월지청장은 진상규명위가 과태료를 부과하는 ‘초강수’(?)를 뒀는데도 역시 오불관언이다.

국가기관이 다른 국가기관에 우롱당하는 현실, 과거를 밝혀 청산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까닭은 그 과거가 현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흐르는 강물처럼 대해를 향해 쉼없이 흐르는 법. 3월 25일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2차 개정이 있었다. 기존의 ‘인용’(진정내용이 타당하다고 인정함)과 ‘기각’(진정내용이 타당하지 않다고 기각함) 이외에 ‘규명불능’이라는 조사결론을 내릴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규명불능’ 결정이란, 기존의 수사결과는 부인되나 공권력 개입 사실을 위원회가 ‘아직은’ 밝히지 못해 완전히 다른 결론으로 입론할 만큼에 이르지 못한 상황을 일컫는 것으로, 현재의 진상규명 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결론에 그대로 반영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진정인의 주장이 앞으로 진실로 밝혀질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은 것이다.

진상규명위 사무실 복도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문구를 당위적 구호로 여길 터이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한방울의 진실까지’ 밝혀내려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당위가 현실로 바뀌지 않는 한, 의문의 죽임을 당한 원혼은 구천을 떠돌 것이고, 산 자들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할 것이다.

이제훈 본지 편집위원.한겨레 기자
2002/07/02 00:00 200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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