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가 끝나고 월드컵은 중반에 접어들었다. 지방선거는 국가적 행사이고 수만 명이 참가하는 정치행사라는 점에서, 월드컵은 국민들의 열기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이번 여름은 뜨겁기만 하다. 지난 봄에는 국민경선이라는 것이 나타나 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바 있다. 이래저래 2002년은 격동의 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국민경선이 진행되던 봄에는 노사모와 ‘노풍’이라는 새로운 열기가 경선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더니 월드컵에서는 붉은 악마가 중심이 된 거리응원이 사회를 온통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로 이어지는 우리 팀의 경기가 진행되면서 붉은 악마의 응원이 전국민에게 확산되어 버렸다.

붉은 악마가 문제가 아니라 전국민이 붉은 악마처럼 행동하는 ‘전국민의 붉은 악마화’라는 감염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봄날 ‘노풍’에 놀랐던 나는 여름날 나라를 뒤흔드는 ‘적풍’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다.

그러나 피버노바가 그림처럼 골문을 가르는 사이에 정말 그림처럼 지방선거가 지나가 버렸다. “월드컵 16강의 위업을 달성하고 4700만 국민들이 저렇게들 열광하는데 지방선거가 도대체 뭐야? 선거는 잊어버리자.”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48년 만에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그날 지방선거 투표율도 48%로 보고되었다. 이번 지방선거는 철저하게 ‘월드컵선거’인 것이다. 월드컵처럼 주목받는 선거가 아니라 월드컵에 가려져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 천덕꾸러기 선거라는 뜻이다.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이 확정되던 날 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고 민주당은 대참패를 맛보았다. ‘포성 없는 총성’이라더니 선거가 시작되기도 전에 정권교체가 일어났다는 말까지 나돈다. 물론 최악의 참패는 자민련 몫으로 돌아갔다. 2000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할 정도로 쇠락한 자민련이 한나라당의 ‘영입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지방선거를 계기로 사실상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민주노동당, 사회당, 녹색평화당 등 지방선거에 참여한 여러 진보정당들 중에서 민주노동당은 특별한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울산시장 선거에서는 분패했지만 정당지지율 8.1%로 6.5%의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원내의석만 확보한다면 명실공히 ‘제도권’ 진보정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되었다.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마당에 지방선거를 월드컵과 연결시킬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일어난 두 현상, 즉 지방선거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 월드컵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너무 대비된다는 이야기는 하고 지나가자.

월드컵은 재미있지만 곧 잊혀지는 운동경기이다. 반면 지방선거 결과는 4년간 지속되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를 속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운동은 재미있지만 선거는 정말 딱딱하고 지루하다.” 이런 항변에 대해서는 나 역시 별로 할말이 없다.

물론 월드컵이 주는 교훈도 있다. 잘하면 재미있고, 재미있으면 주목한다는 것이다. 정치가 축구와는 다르고 선거라는 것이 월드컵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정치가 축구로부터, 히딩크로부터, 붉은 악마로부터 배울 바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점을 배우지 못한다면 미래의 정치는 ‘재미’라는 정체불명의 녀석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지막 말은 국민들에게 하는 소리다. “사람이 항상 재미로만 살 수 있나요?”

정대화 상지대 정치학 교수
2002/07/02 00:00 2002/07/02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trackback/6769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