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귀환 "문학의 귀환"
2002/2002년 07월 :
2002/07/02 00:00
월드컵 열기로 달아올랐던 6월은 출판계로서는 그야말로 파리 날리는 달이었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신간 발행을 중지했고, 독자들의 관심은 온통 축구경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종로서적이 영업을 중단했고, 출판비평 전문지 『출판저널』은 경영권이 넘어갔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책’을 읽자는 캠페인이 연일 벌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캠페인을 통해서 팔려나가는 책들은 극히 제한된 소수의 책으로 한정된다. 몇 종의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는 바로 그 시점에, 대부분의 책들은 초판도 소화하지 못하고 반품되어 폐지창고로 실려간다.
문학출판의 불황은 여전하다. 이른바 ‘스타작가’들이 생산한 작품조차도 과거의 열기를 지속할 수는 없었다. 출판전문가들은 작가들의 상상력 빈곤과 매너리즘을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지만, 문단에서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한 권의 문학평론집이 새로운 논쟁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다. 그 책은 창작과비평사의 편집주간인 평론가 최원식이 2001년에 출간한 『문학의 귀환』이라는 책이다. 이 책이 논쟁의 대상으로 등장하면서, 지난 한해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으로 피로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던 이 출판사는 또 다른 피로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90년대 문학에 대한 가치판단의 차이에서 비롯한 논쟁
그런데 그 논쟁의 내용이란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다지 신선한 문제의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차원에서는 과거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재탕처럼도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논쟁의 양상이라 할 수 있는데, 최원식의 비평을 비판하는 논자들이 대부분 한국문단을 삼분하고 있었던 다른 두 진영, 즉 『문학동네』 『문학과 사회』의 편집위원들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최원식을 비판하게 만든 것일까.
이런저런 현학적인 주장을 제거하고, 사태의 핵심만을 추출하자면 이 논쟁은 90년대 문학에 대한 가치평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최원식의 주장을 일단 읽어보기로 하자.
“베를린장벽 붕괴(1989)를 계기로 폭발한 동구혁명 속에서 20세기 사회주의 실험이 종언을 고한 국제적 변화에 이어, ‘문민정부’의 출범(1992)이라는 국내적 변화가 중첩되면서, 80년대의 과잉결정된 혁명문학으로부터 대규모의 탈주를 감행한 90년대 문학은 화려한 수사(修辭)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80년대와는 또 다른 층위에서 문학의 위기를 자초하였다. 아니 80년대 혁명문학의 사회성의 과부하(過負荷)와 그 반동으로 나타난 90년대 문학의 탈사회성은 동전의 양면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정치투쟁의 하부에 편제(編制)했던 혁명문학과, 그 압박으로부터 문학을 구원하겠다고 공공영역으로부터 썰물처럼 퇴각했던 90년대 문학이 함께 문학의 쇠퇴를 향해 기울었다는 것은 쓸쓸한 반어가 아닐 수 없다.”(『문학의 귀환』)
80년대 문학을 ‘혁명문학’으로, 90년대 문학을 이에 대한 반동으로 규정하는 최원식의 주장은 다소 도식적인 것이지만 분명 일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다. 80년대의 소설 속에 빈번하게 등장한 공간은 ‘역사적’ 공간이었고, 90년대의 그것은 ‘일상의’ 공간이었다. 80년대의 소설 속에는 유난히 비장한 자기결단에 고뇌하는 영웅적 인물이 자주 등장했고, 90년대 소설 속에는 욕망으로 충만한 분열증적 인물들이 자주 등장했다. 특정한 경향이 전면화되었다면, 그것을 한 시대의 소설적 특성을 규정하기 위한 개념으로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가치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최원식의 경우는 그 변화를 부정적으로,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논자들은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원식을 비판하는 논점은 간명하다. 최원식이 정치적이라거나 사회적이라고 규정하는 개념들은 지나치게 거시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90년대 들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일상의 ‘사소한 정치성’이라는 것인데, 실제로는 이것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이들 비판자들의 주장이다. 사소한 것 속에서 중대한 시대의 변화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성실한 비평의 자세라는 것이 이런 주장에서 반복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최원식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자들의 견해를 검토하다 보면, 그들이 지나치게 화려한 수사(修辭)를 통해 사태판단을 흐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피어난다. 그들은 90년대 소설의 그 사소한 반란이 대단히 거창한 소설의 질적 변화를 담보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카니발’ 운운하는 적극적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내 판단에 오늘날 사소한 정치성의 카니발적 공간은 문학이 아니라, 텔레비전 브라운관의 안쪽에 있다.
90년대 문학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갈등 모티프들은 이미 텔레비전 드라마 안에서 지겹도록 반복된 것이다. 가족, 성, 사랑의 테마를 중심으로 한 일상들이 문학 속에서 제 아무리 세련되게 변주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드라마의 창조적 변화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이것은 드라마를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일상에서 취재한 문학의 열악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지적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동거
최원식의 주장 가운데 또 하나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會通)에 대한 견해이다. 그는 가장 뛰어난 작품 속에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동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김수영의 작품을 빌어 제시한다. 이런 주장을 제시하면서 이제 비평도 무국적의 이론에서 출발하지 말고, 작품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는 매우 온건한 주장을 피력한다. 이 주장 역시 그 자체로는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 잇따른다.
그 반론들은 매우 격렬하다. 90년대 문학의 질적 새로움을 간파하지 못한 최원식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회통시키자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식의 반론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평자에 대한 불신감도 작용하고 있다. 최원식은 이른바 창작과비평사의 주요한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 그는 이른바 ‘민족문학=리얼리즘=진보적 문학’이라는 관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문에 그의 회통론은 리얼리즘에 의한 모더니즘의 흡수통합론에 불과하다는 것--대략 이것이 불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최원식의 『문학의 귀환』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내 판단에 그는 더이상 투철한 민족문학론자가 아니다. 그는 ‘민족’을 둘러싼 담론의 순수성을 기꺼이 회의하는 자세를 전향적으로 보여준다. ‘국어’ ‘국문학’ ‘국문과’의 해체를 사유하는 것, 한국문학을 동아시아라고 하는 보다 넓은 범주에서 사유하자고 제안하는 것, 한국의 미래를 평화적인 소국주의(小國主義)에서 찾고 있는 것 등에서 이러한 사실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아직까지 최원식은 그에게 가해지는 비판에 대해 일체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 침묵은 그의 고뇌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문학의 귀환』은 ‘논쟁의 귀환’을 촉구하고 있다.
문학출판의 불황은 여전하다. 이른바 ‘스타작가’들이 생산한 작품조차도 과거의 열기를 지속할 수는 없었다. 출판전문가들은 작가들의 상상력 빈곤과 매너리즘을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지만, 문단에서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한 권의 문학평론집이 새로운 논쟁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다. 그 책은 창작과비평사의 편집주간인 평론가 최원식이 2001년에 출간한 『문학의 귀환』이라는 책이다. 이 책이 논쟁의 대상으로 등장하면서, 지난 한해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으로 피로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던 이 출판사는 또 다른 피로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90년대 문학에 대한 가치판단의 차이에서 비롯한 논쟁
그런데 그 논쟁의 내용이란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다지 신선한 문제의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차원에서는 과거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재탕처럼도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논쟁의 양상이라 할 수 있는데, 최원식의 비평을 비판하는 논자들이 대부분 한국문단을 삼분하고 있었던 다른 두 진영, 즉 『문학동네』 『문학과 사회』의 편집위원들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최원식을 비판하게 만든 것일까.
이런저런 현학적인 주장을 제거하고, 사태의 핵심만을 추출하자면 이 논쟁은 90년대 문학에 대한 가치평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최원식의 주장을 일단 읽어보기로 하자.
“베를린장벽 붕괴(1989)를 계기로 폭발한 동구혁명 속에서 20세기 사회주의 실험이 종언을 고한 국제적 변화에 이어, ‘문민정부’의 출범(1992)이라는 국내적 변화가 중첩되면서, 80년대의 과잉결정된 혁명문학으로부터 대규모의 탈주를 감행한 90년대 문학은 화려한 수사(修辭)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80년대와는 또 다른 층위에서 문학의 위기를 자초하였다. 아니 80년대 혁명문학의 사회성의 과부하(過負荷)와 그 반동으로 나타난 90년대 문학의 탈사회성은 동전의 양면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정치투쟁의 하부에 편제(編制)했던 혁명문학과, 그 압박으로부터 문학을 구원하겠다고 공공영역으로부터 썰물처럼 퇴각했던 90년대 문학이 함께 문학의 쇠퇴를 향해 기울었다는 것은 쓸쓸한 반어가 아닐 수 없다.”(『문학의 귀환』)
80년대 문학을 ‘혁명문학’으로, 90년대 문학을 이에 대한 반동으로 규정하는 최원식의 주장은 다소 도식적인 것이지만 분명 일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다. 80년대의 소설 속에 빈번하게 등장한 공간은 ‘역사적’ 공간이었고, 90년대의 그것은 ‘일상의’ 공간이었다. 80년대의 소설 속에는 유난히 비장한 자기결단에 고뇌하는 영웅적 인물이 자주 등장했고, 90년대 소설 속에는 욕망으로 충만한 분열증적 인물들이 자주 등장했다. 특정한 경향이 전면화되었다면, 그것을 한 시대의 소설적 특성을 규정하기 위한 개념으로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가치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최원식의 경우는 그 변화를 부정적으로,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논자들은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원식을 비판하는 논점은 간명하다. 최원식이 정치적이라거나 사회적이라고 규정하는 개념들은 지나치게 거시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90년대 들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일상의 ‘사소한 정치성’이라는 것인데, 실제로는 이것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이들 비판자들의 주장이다. 사소한 것 속에서 중대한 시대의 변화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성실한 비평의 자세라는 것이 이런 주장에서 반복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최원식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자들의 견해를 검토하다 보면, 그들이 지나치게 화려한 수사(修辭)를 통해 사태판단을 흐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피어난다. 그들은 90년대 소설의 그 사소한 반란이 대단히 거창한 소설의 질적 변화를 담보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카니발’ 운운하는 적극적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내 판단에 오늘날 사소한 정치성의 카니발적 공간은 문학이 아니라, 텔레비전 브라운관의 안쪽에 있다.
90년대 문학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갈등 모티프들은 이미 텔레비전 드라마 안에서 지겹도록 반복된 것이다. 가족, 성, 사랑의 테마를 중심으로 한 일상들이 문학 속에서 제 아무리 세련되게 변주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드라마의 창조적 변화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이것은 드라마를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일상에서 취재한 문학의 열악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지적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동거
최원식의 주장 가운데 또 하나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會通)에 대한 견해이다. 그는 가장 뛰어난 작품 속에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동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김수영의 작품을 빌어 제시한다. 이런 주장을 제시하면서 이제 비평도 무국적의 이론에서 출발하지 말고, 작품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는 매우 온건한 주장을 피력한다. 이 주장 역시 그 자체로는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 잇따른다.
그 반론들은 매우 격렬하다. 90년대 문학의 질적 새로움을 간파하지 못한 최원식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회통시키자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식의 반론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평자에 대한 불신감도 작용하고 있다. 최원식은 이른바 창작과비평사의 주요한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 그는 이른바 ‘민족문학=리얼리즘=진보적 문학’이라는 관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문에 그의 회통론은 리얼리즘에 의한 모더니즘의 흡수통합론에 불과하다는 것--대략 이것이 불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최원식의 『문학의 귀환』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내 판단에 그는 더이상 투철한 민족문학론자가 아니다. 그는 ‘민족’을 둘러싼 담론의 순수성을 기꺼이 회의하는 자세를 전향적으로 보여준다. ‘국어’ ‘국문학’ ‘국문과’의 해체를 사유하는 것, 한국문학을 동아시아라고 하는 보다 넓은 범주에서 사유하자고 제안하는 것, 한국의 미래를 평화적인 소국주의(小國主義)에서 찾고 있는 것 등에서 이러한 사실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아직까지 최원식은 그에게 가해지는 비판에 대해 일체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 침묵은 그의 고뇌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문학의 귀환』은 ‘논쟁의 귀환’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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