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견고한 지배이데올로기를 깨는 무기 "웃음"
2002/2002년 08월 :
2002/08/10 00:00
멍청한 백인들
『로저와 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여기서 ‘로저’는 GM 회장의 이름이고, ‘나’는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인 마이클 무어다. 무어는 자동차 공업으로 유명한 미국 미시간주 플린트시 출신이다.
하지만, 이 명성은 이제는 먼 옛날 일일 뿐이다. 플린트의 GM 자동차 공장은 멕시코로 옮겼다. 이유는 하나. 싼 임금을 찾아나선 것. 덕분에 플린트의 GM 공장 노동자들은 실업자 신세가 됐고, 한때 번영의 상징이었던 플린트시는 거대한 슬럼이 되어 버렸다.
『로저와 나』에서 무어는 시종일관 유머와 재치를 통해 GM 회장 로저를 ‘스토킹’하고 그 반노동자적 행태를 폭로하며 조롱한다.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어떤 보고서나 사회과학 논문보다도 더 명쾌하게 초국적 자본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무어는 더 심각한 전투에 나섰다. “모든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으로 발전한다”는 맑스, 엥겔스의 고전적인 명제를 몸소 실천하기라도 하듯 무어의 싸움은 GM 회장 로저와의 육박전에서 더 크고 엄청난 적과의 난투로 비약했다.
그 적이란 바로, 현재 미국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는’ 조지 부시 2세와 그의 공화당 패거리들. 그리고 싸움의 수단은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책으로 바뀌었다. 책제목은 Stupid White Men(한글 번역본은 <미국의 양심이 말하는 멍청한 백인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다).
당황스럽게도 무어는 미국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호들갑으로 책을 시작한다. 2001년 9월 1일 오전 6시에 유엔군사령부에 이러한 메시지가 입수됐다는 것이다.
저는 미국 시민입니다. 저희 미국에서 내란이 일어나 당선된 대통령이 유배되었습니다. 우리의 수도인 워싱턴을 연미복을 입고 마티니 잔을 휘두르는 백인 늙은이들 집단에게 빼앗겼습니다.(27쪽)
미국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누가 내란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감히 누가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의 수도, 민주주의의 수호자의 수도를 빼앗았다는 말인가? 연미복을 입었다는 것으로 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아닌 것 같은데….
무어가 고발하는 내란의 주역은 다름 아니라 지금 미국 대통령이라고 ‘대충’ 인정받고 있는 조지 부시 2세다. 무어는 철저히, 지난 대선의 실제 승자는 고어였으며 따라서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플로리다 주지사와, 아버지 조지 부시 1세의 친구들인 대법원 판사들의 도움으로 대통령직을 찬탈한 조지 부시 2세의 행정부는 ‘정통성이 없는 쿠데타 정부’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 쿠데타 정부가 지금 세계를 주무르고 있고, 21세기 첫 전쟁이라는 것을 저지르고 있다.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플롯이 아닌가?
무어는 호소한다.
인질로 잡혀 있는 2억3400만 미국인을 대표해서 제가 나선 것입니다. 나토가 보스니아와 코소보에 한 것같이, 미국이 아이티에 했던 것처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리 마빈이 ‘더티 더즌’에서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해병대를 급파하라! 빨리 스커드를 발사하라!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에게도 개인적인 청원서를 보냈습니다. 우리 미국은 더이상 자치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공정 선거조차 치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유엔 감시단, 유엔군, 그리고 유엔의 결의문이 필요합니다.
빌어먹을, 지미 카터가 필요합니다! (28쪽)
이런 식의 농담(?)은 대선 직후 카스트로가 “미국에 공정선거감시단을 파견해줄까” 하며 조롱할 때 벌써 한 차례 세상을 웃긴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웃을 일’에 불과할까?
미국식 체제 - 지배 이데올로기의 완성?
사실 저자 무어의 농담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의 풍자코미디 영화 <캐나디언 베이컨>은 더욱 더 포복절도할 설정들을 담고 있다. 소련의 붕괴로 ‘주적’을 상실한 미국 정부가 이웃 나라 캐나다를 새로운 ‘주적’으로 선포한다는 게 영화의 골자다. 미국보다 발전한 사회복지제도, 관용적이고 인종화합적인 문화, 몸에 밴 예의, 이 모든 게 캐나다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증거다. 그러니, 진격하라, 미국의 용사들이여, ‘빨갱이’ 캐나다 놈들을 무찌르기 위해서! - 무어의 과장과 너스레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그 뒤에는 미국 사회의 섬뜩한 진실이 여지없이 폭로되고 있다. <멍청한 백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무어는 공화당 극우 정치귀족들의 온갖 반민주적 작태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치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는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모순들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제목 그대로 우선 ‘stupid’, 즉 공교육의 붕괴로 인한 미국인들의 조악한 지적 수준을 폭로하고, 다음으로 ‘white’, 즉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백인들의 흑인 억압·차별을 공격하며, 세 번째로는 ‘men’, 즉 남성 중심의 미국 지배질서를 탄핵한다. ‘men’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또다른 의미, ‘자연’과 대립되는 ‘인간’이라는 맥락에서는 지구환경 파괴의 선두에 나선 미국문명을 비판한다. 이쯤 되면, 소박한 상식으로 무장한 유쾌한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미국 문명 비판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여기서 평자는 무어가 굳이 2000년 대선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의 비판을 시작하고 끝맺는 이유에 대해 좀 색다른 생각을 해본다. 물론 조지 부시 2세의 정부가 세계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정세적 이유가 가장 클 테지만, 이유가 과연 이것만일까?
2000년 대선 소동이, 다른 나라 같았으면 어김없이 동반했을, 심각한 위기 혹은 (준)내전 상황 없이 잠시 동안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마는 것을 바라보면서 평자는 어떤 오싹함마저 느꼈었다. 향후 4년의 세계 권력을 결정할 플로리다주 재검표를 대법원이 가로막고 나서는데도, 고어도, 민주당도, 그 어떤 언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다수 미국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 순간에는 고어와 민주당조차도 ‘조작된 승리’의 공범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미국 체제 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승리가 강탈되는 것마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감내할 수 있다는 동의―이것이 수준 미달의 ‘쿠데타 정부’를 세계의 사령탑으로 지탱해 주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온갖 비리와 모순으로 얼룩진 지배 체제가 유지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진화된 지배 이데올로기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어의 과장과 호들갑, 너스레는 바로 이러한 농익디농익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하나의 극단적 전술이 아닐까? 랄프 네이더의 녹색당 같은 진정한 민주적·진보적 대안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색다른 우상 파괴의 전술. 평자는 무어의 웃음 뒤에서, 오히려, ‘유일 제국’의 내부에서 ‘민주주의’와 ‘변화’를 꿈꾸는 자의 고뇌를 보았다.
더구나, 이 책은, 비록 9·11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담고 있지 않지만, 놀랍게도 9·11 이후에 발간되었다. ‘쿠데타 정부’의 ‘계엄령 선포’ 뒤에 세상에 나온 격문―참으로 유쾌한 ‘반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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