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은 둘다 교도관이다. 사형수를 수용하는 감옥에서 함께 일한다. 어느 날 흑인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던 중 아들은 메스꺼움을 참지 못해 화장실로 간다. 사형집행을 마친 후 아버지는 화장실로 쫓아가 “애비를 창피하게 하는 놈”이라며 뺨을 후려갈긴다. 집으로 돌아온 뒤 아들에게 “너 같은 놈은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아들은 권총을 꺼내 들고 아버지를 위협한다. 거실 바닥에 쓰러진 아버지에게 아들이 처절하게 묻는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미워했죠, 그렇죠?”

아버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자, 아들은 “난 당신을 사랑했는데…”라고 말하곤, 갑자기 총구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돌려 자살해버린다.

영화 (‘괴수의 무도회’란 뜻)의 한 대목이다. 여주인공으로 나온 할 베리가 흑인배우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2002년)을 받아 화제가 된 영화다. 이 영화의 주된 모티프는 인종문제다.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남자와 가난한 흑인여성이 어떻게 사랑에 이르는가를 예리한 터치로 그리고 있다. 사형제도의 비인간적인 면도 실감나게 묘사된다. 그러나 그런 사회성 짙은 주제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와 닿는 것은 ‘부자간 갈등’에 관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아니, 최소한 나쁜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 행크는 아들을 늘 못마땅해 하며 질책만 하는 ‘엄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아들은 견디다 못해 끝내 아버지에게 항의하듯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원망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더 참혹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행크의 아버지 또한 아들 기분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만 앞세우는 노인네다. 그로 인해 아들과 종종 마찰을 빚다가 결국 집에서 쫓겨난다.

이러한 부자간 갈등은 우리 주변에서도 곧잘 목격된다. 때론 영화보다 더욱 비극적인 양상으로 터져나온다.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축제판이던 지난 6월 10일 성남시 분당에서는 대학생 아들이 친아버지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녘 잠자고 있던 아버지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죽인 아들 이씨는 경찰조사에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학교수 생활을 하는 아버지가 독선적으로 대해 오래 전부터 반감이 있었다”고 살해이유를 밝혔다.

1995년에는 대학교수 김모 씨가 아버지(사립학교 이사장)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단신 월남해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강요했고 구타까지 해서 장남 김씨와 잦은 갈등을 빚어온 것’으로 조사결과 드러났다. 범행동기와 관련, 김씨는 “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라도 내가 왜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이라며 “열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가족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사형수 아버지와 천덕꾸러기 아들

영화 에서는 또다른 모습의 부자관계가 그려진다. 사형수인 흑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5학년쯤 된 어린 아들이다. 심한 비만으로 금지당한 초콜릿을 몰래 먹다가 엄마에게 구박받는 천덕꾸러기다. 그 부자의 마지막 면회장면 중 일부를 옮겨본다.

아버지 그동안 난 그림을 많이 그렸단다. 넌 어떠니?

아들 저도요.

아버지 얘야, 우린 시간이 별로 없어. 그동안 내가 그린 그림을 다 너에게 줄게. 그리고 옷도…. 네가 크면 맞을 거야. 내가 입던 옷을 네가 입어주면 좋겠구나.

아들 우리 이제 다신 못 보나요?

아버지 음….

아들 왜요?

아버지 난 나쁜 사람이니까.

아들 아빠보고 나쁜 사람이라고 누가 그래요?

아버지 내가…. 근데, 네가 꼭 알았으면 하는 게 있어.

아들 뭔데요?

아버지 넌 내가 아니야. 나 같은 사람이 돼선 안 돼.

아들 아뇨, 난 아빠 아들이고 아빠 같은 사람 될 거예요.

아버지 아냐. 그러면 안 돼. 너에겐 나의 좋은 점만 있어. 나에게서 최고로 좋은 것만 모아놓은 게 바로 너야.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들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학교 교지 표지에 실리게 됐다고 자랑한다. 감방에 있는 아버지 모습을 그린 것이란 얘길 듣고 아버지는 곤혹스러워한다. 그러나 그림대회 주제가 ‘고독’이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아들의 손을 잡고 기뻐해 준다.

앞의 중산층 백인 부자 3대와는 자못 대조적인 모습의 부자지간이다. 그 소박한 대사의 사이사이로 부자간 끈끈한 뭔가가 흐르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둘다 같이 좋아하는 뭔가가 있고 그것으로 서로 통한다. 비록 사형수로 11년째 갇혀 지내왔지만 아들에게 그 아버지는 온전한 ‘아버지’다. 아버지는 나이 어린 아들과 나란한 위치에서 이야기하고 아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준다. 천덕꾸러기 아들이지만 무시하거나 훈계하려는 기색 하나 없다. 물론 사형을 앞둔 절박한 심정에서 아들에게 좋게 대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자칭 ‘나쁜 사람’인 그 사형수는 위의 대사에서 느껴지듯이 자신의 아들에게만은 세상에 더 없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 하나 있다. 자신들이 자녀들을 위해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돈 벌어다 주는 일’이라 생각하는 점이다. ‘부자아빠’ 신드롬도 같은 맥락이다. 가족부양, 안락한 환경, 물질적 풍요….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아버지로서 꼭 해야 할 정말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 있다. ‘가난한 아빠’라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일은 없지만, ‘이것’을 제대로 못하면 자식에게 평생 큰 상처를 주고, 증오와 원망을 사서 자칫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부자아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무엇인가? 앞의 사례에서 생생하게 보았듯이, 자녀의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일이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다. 특히 아들들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대단히 강하다. 어리든 크든 자녀를 인격체로 존중하고 존재가치를 인정해 줘야 한다. 만일 아버지가 자녀들의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갈등은 불가피하게 심각한 양상으로 벌어지게 된다.

특히 명심해야 할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 자기 가족에게 좋은 물질적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자부하는 엘리트층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녀들의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데 실패하는 경향이 많다.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자녀들이 부합하기를 강요하고 그러지 못하면 인정은커녕 무시하고 경멸하고 소리지르며 상처만 주는 경우가 많다. ‘엄친자모’라 하여 ‘엄격한 아버지’를 이상적인 아버지 상으로 여겨온 종래의 관행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훗날 자녀들이 컸을 때 어떤 아빠를 더 그리워할까. ‘잘난 부자아빠’보다는 영화 속 흑인 사형수 같은 ‘가난하고 못난 아빠’가 자녀들의 가슴을 더 훈훈하고 꽉 차게 만들지 않을까.

강영진 미국 전문중재인ㆍ조지메이슨대학 분쟁해결연구원
2002/08/10 00:00 2002/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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