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가 만드는 빈곤의 악순환
2002/2002년 09월 :
2002/09/24 00:00
발로 쓴 필리핀 파롤라지역 빈곤 보고서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필리핀의 3대 빈민촌 중 하나인 파롤라(Par-ola)로 향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군부 독재정치가 횡행하던 1970년대 초반, 최초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파롤라는 빈민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내가 살고 있는 퀘손 시에서 마닐라 항구 근처의 파롤라까지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이곳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교통수단인 트라이시클과 지프니(트라이시클은 오토바이 옆에 바퀴 달린 의자를 잇대어 만든 것이고, 지프니는 미군의 지프를 개조해 뒷좌석을 넓힌 것으로 보통 16∼20명 정도가 탈 수 있다. 기본요금은 4페소(100원)로 서민들이 애용하는 교통수단인데, 끔찍한 마닐라 공해의 주범이기도 하다)를 네 번이나 갈아타야 했고, 유리 창문이 없는, 폐차 직전의 모습을 한 버스까지 타야 했다.
파롤라는 필리핀 여행 안내서에서 관광객에게는 부적합하고, 위험한 곳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특별한 설명을 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행했던 푸라(Pura)에게 위험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 나왔다. 학생운동을 거쳐 도시 빈민운동 단체인 UPA(Urban Poor Association)에서 활동하고 있는 푸라도 처음 파롤라로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는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파롤라는 빈민지역일 뿐만 아니라, 폭력배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필리핀 사람들도 꺼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과 함께 활동을 해나가면서,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파롤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초행길의 낯선 풍경들을 정신 없이 보다가 거금(?)을 주고 마련한 휴대전화를 버스에 두고 내려버렸다. 통신 수단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파롤라에서 하룻밤 자야 한다는 생각에 다소 긴장되었지만,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전화 없어 가가호 방문으로 소통
파롤라에 도착하자, 푸라는 잰걸음으로 미로와 같은 골목을 익숙하게 헤쳐나갔다. 그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쫓아가는 사이, 비좁은 골목에서 뛰노는 벌거숭이 아이들과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나 또한 서울 응봉동 달동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터라, 잊고 있었던 달동네의 풍경이 잠시 떠올랐다. 마침내 한 집에 다다르자 푸라는 집 주인에게 오후로 예정된 모임에 올 수 있는지 확인했다. 이렇게 한집, 한집 돌다 보니, 파롤라를 한바퀴 다 돌아본 셈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전화나 전자우편으로 모임을 알린다고 했더니, 이곳 사람들은 전화가 없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UPA가 이 지역에 만든 주민조직은 49개이고, 푸라를 포함한 두 명의 활동가가 이를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활동 내용이나 방식은 주민조직이 결정하고, 활동가들은 정보를 제공하는 등 단순 지원활동에 주력한다. 실제 필리핀의 유명한 시민단체들을 방문해 보면, 사무를 보는 최소 인력만 사무실을 지키고 있고, 책상도 네댓 개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파롤라를 한바퀴 돌고 어느 집에 도착해 잠시 땀을 식히고 있는 사이, 푸라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음식을 찾았다. 그러나 남은 음식이 없었고 쌀통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이, 가족 전체의 한달 수입이 2000∼5000페소(5만∼13만 원) 정도인 빈민들에게는 음식을 쌓아두고 먹을 만한 여유가 없다. 구멍가게에 가면 식료품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필품들을 한번 쓸 양만큼 다시 포장해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봉지쌀은 기본이고, 식용유, 샴푸 따위를 비닐 봉지에 담아 팔고 있다. 천연자원이 매우 풍부한 나라여서, 쌀이나 코코넛, 바나나, 망고 등의 과일 값은 매우 싸다. 그런데도 빈민들이 공산품이나 교육비 등을 감당하기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교육 의료서비스 열악한 수준
가까운 식당에서 밥과 생선국을 사와 점심을 먹고, 주민조직의 대표자 모임이 열리는 장소에 갔다. 잠시 낯선 이방인에게 관심을 보이던 주민대표들은 이내 관심을 거두고 자기들의 문제에 몰두했다. 이날 모임은 곧 있을 아로요 대통령과의 면담을 준비하는 빈민대책그룹(April Working 30 Group: 2001년 4월 결성한 모임으로 비정기적인 회동을 통해 당면한 빈민들의 상황을 서로 나누고 대책을 숙의하고 정부에 요구사항을 내놓는다. 정부도 그들을 대화창구로 인정, 대통령이 직접 대표부와 면담을 갖곤 한다) 준비회의에 상정할 파롤라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지역의 현안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부의 개발계획에 따른 철거예정 지역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파식강변 개발계획(PRRP)에 따른 철거 문제가 그것이다. 빈민들은 대부분 무허가 땅에 나무와 합판을 잇대 엉성하게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개발계획에 따른 철거는 이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대부분 해외 차관, 특히 일본 ODA(공식개발원조)의 자금 제공으로 이뤄지는 각종 개발공사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의 재이주 정책은 빈민들을 궁핍으로 내몬다. 메트로 마닐라 밖에 위치한 재이주촌으로 옮겨갈 경우, 이들은 당장 일자리를 잃어버린다. 하루 1∼200페소를 버는 빈민들은 교통비와 밥값을 감당할 수 없으며, 교육 의료 등 서비스도 형편없다. 유명한 재이주촌인 불라칸(Bulakan)의 산호세 지역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한 학급에서 80명이 하루 2시간씩 4교대로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학교에 의자가 없어 아이들은 집에서 목욕의자 같은 조그만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등교한다. 교과서도 30권밖에 없어, 학기초에 추첨을 통해 나눠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생들의 중도 탈락률(정부자료에 따르면, 초등학생들의 중도 탈락률은 33%라고 한다)이 높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꿈꿀 수 없는 상황이다. 수업료는커녕 교복과 책값, 교통비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파식강변 개발계획은 42km에 이르는 파식강변의 양쪽을 폭 10m씩 정비한다는 계획이다. 이 사업은 대부분 일본 자본으로 구성된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차관으로 시작되었는데, 계획이 강행될 경우 강가에 살고 있는 6만 가구의 철거와 재이주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부의 정비계획 지역에 위치한 산미구엘 등 대형 공장 부지는 사유지라는 이유로 철거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파식강의 오염은 강변에 사는 빈민들의 생활 하수도 문제지만, 아무 여과 없이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공장 폐수가 더 치명적인 원인이다. 주민들은 오염된 파식강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하지만, 메트로 마닐라 밖으로의 이주가 아니라, 자기들이 살던 곳 근처에 저렴한 주택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빈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규모 철거보다는 생활하수와 공장폐수 정화시설 구축이 더 근본적인 접근임에 틀림없다.
악순환되는 민중의 고통
파롤라 주민들의 요구는 소박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계속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단순한 것 같지 않다. 심각한 빈부격차와 사회 기본 서비스의 부족, 이해관계가 중첩된 각종 개발공사로 그들의 삶은 더 황폐해지고 있다. 더구나 ‘세계화’는 책 속의 담론에 머물러 있지 않다. 각종 통계수치를 통해 필리핀의 상황을 살펴보자.
필리핀 국가통계연구소(NSCB)에 따르면, 2000년 현재 필리핀 빈민은 520만 가구 313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0%에 이른다. 여기서 빈곤의 기준이 되는 것은 일일 최저 생계비다. 통계청(NSO) 자료에 따르면, 메트로 마닐라에서 6인 가족이 생활하려면 하루에 적어도 296페소가 필요하다(표 1 참조). 대부분의 빈민지역의 가구당 평균 월 수입은 2000∼5000페소(5만∼13만 원)이고, 극빈층은 2000페소 미만이다.
이에 반해 소수의 상류층은 부를 독점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0년 현재 하층 60%의 소득비율이 전체의 24.7%인 데 비해, 상층 10%의 그것은 전체의 38.4%다.
그렇다면 필리핀 빈곤의 원인은 무엇인가?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경제에 있다. 필리핀의 경제구조는 1차산업과 3차산업에 의존하고 있는데, 경제 침체로 인해 실업률이 20%대에 이른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실업률은 10.3%이지만, 계절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촌 지역 등의 무보수 가내 노동자를 포함시키면, 실업률은 20%를 웃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표 2 참조).
필리핀 정부는 실업과 저개발을 해결하기 위해 해외 펀드를 끌어다가 각종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것이 또 다른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사회 인프라의 확충은 불가피하지만, 개발차관(ODA) 에이전시에 의해 기획, 추진되는 각종 개발 프로젝트는 주민들(특히 빈민)의 삶과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에서는 일본 ODA의 투자가 단연 압도적인데, 지난 99년 한해 필리핀에 제공된 차관만 4억1300만 달러에 이른다. 2000년 현재 필리핀의 누적 차관은 520억 달러인데, 올 한해 필리핀 국가예산이 110억 달러인 것을 생각하면, 그 이자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이다(Arnold J. Padilla “Japan’s ODA: Obst-ructing Development through Aid?”의 수록 데이터 인용).
극심한 계급격차와 민중의 삶
현재 필리핀에서 추진되고 있는 대부분의 개발공사는 일본 ODA가 자본을 제공하고, 일본 건설업체가 수주해 진행하고 있다. 한국 기업도 끼여들고 있는데, 라구나 방조대나 고가철도 사업에 대우건설과 한진건설이 각각 사업 일부를 수주해 공사하고 있다.
빈곤의 또 다른 원인은 심각한 부정부패에서 찾을 수 있다. 한 활동가는 “한국에서는 뇌물을 책상 밑으로(under the table) 주지만, 필리핀에서는 책상까지 포함해서(include the table) 준다”는 말로 심각한 부패상을 표현했다. 메트로 마닐라 외곽을 지나다 보면, 포장하다 만 도로를 볼 수 있는데, 관료들이 예산을 빼돌린 결과라고 한다.
부정부패와 저개발, 높은 실업률과 극심한 계급격차로 인한 빈곤의 악순환이, 국제금융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와 어울려 필리핀 민중의 삶을 갈수록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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