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 반영 미흡...정치권 말잔치만 중계
2002/2002년 09월 :
2002/09/24 00:00
반부패입법 보도
지난 6월 26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만났다. 시민운동가들은 대통령 두 아들 비리 구속으로 참담한 국민 여론을 전하고, 대통령 선거 전에 반부패입법에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7월 4일 노 후보는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장·검찰총장 인사청문회 실시,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 신설, 정치후원금에 수표사용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한 반부패 관련 입법을 연내에 마련하자며,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에게 회담을 제안했다. 게이트 정국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민주당은 당 정치개혁특위에서도 한시적인 특별검사제 상설화와 정치자금 실명제 등을 추진키로 했다.
민주당의 부패청산 프로그램에 대해 이회창 후보는 이미 한나라당 차원에서 마련된 안들이라며, 문제는 실천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7월 18일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는 국회 연설에서 부패 청산을 위한 10대 입법과 함께 국회에 ‘정치혁신특별위원회’ 가동을 제안했다. 10대 입법 내용은 권력형비리 특검제 실시, 대통령 친인척 비리감찰기구 설치, 인사청문회 대상 확대, 검찰과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 정치자금 투명화 등이었다.
양당이 경쟁적으로 주장한 반부패입법 내용들은 별 차이가 없어 입법 가능성에 기대를 모았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8·8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국 주도권과 민심잡기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선거 때면 되풀이되는 정치권의 부패 청산 구호
사실 정치권에서는 선거 때만 되면 부패 청산 구호가 나왔다. 그동안 정치권의 부패 척결 의지가 말잔치로 끝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미 5년 전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김현철의 국정농단 비리로 김영삼 정권이 몰락하자 정치권은 반부패 제도화를 약속했었다. 그리고 정치권에서 정치자금 개혁, 돈세탁 방지, 사정기구 개혁 등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고, 김대중 정권에서 부패방지법 등이 제정되었으나 관계 법률들은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밀려 빈껍데기만 남아 있다. 그리고 또다시 김대중 대통령 아들과 주변 권력 실세들의 비리가 답습되면서 부패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거센 국민 여론이 일고 있다.
참여연대는 지난 7월 18일 국회에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 설치 특별법 제정’, ‘검찰 중립화를 위한 검찰청법’, ‘돈세탁방지법’, ‘공직자윤리법’, ‘정치자금법’의 개정 등 등 반부패 5대 개혁입법을 입법 청원하고, 19일에는 국회의원 259명에게 ‘부패 척결을 위한 5대 개혁입법 연내 추진에 관한 질의서’를 보냈다. 이 참여연대 질의서에 국회의원 65명만이 답변을 보내왔고, 당 대표 등 요직에 있는 인사들은 답변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의원들은 “시민단체가 왜 정치권 문제에 개입하느냐” 면서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한겨레』는 7월 20일 참여연대 조사결과를 1면에 싣고, 22일 ‘반부패법 외면하는 국회의원들’ 사설을 실었다.
정치권의 이러한 행태에 국민은, 언론이 여론을 제대로 읽어 입법권을 갖고 있는 국회와 정치권을 견제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언론이 이런 국민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데는 회의가 든다. 언론들이 반부패 제도화 문제를 언론 세무조사를 다룬 것 반만이라도 지면을 할애하고 여론을 모아 정치권을 압박한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8·8 국회의원 재보선 결과는 낮은 투표율 속에 한나라당이 압승했다. 이는 김대중 정권의 권력형비리 심판과 부패 청산에 대한 민심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것이었다. 그리고 정국은 이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를 둘러싸고 사활을 건 정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정치권의 부패 척결 의지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부패 척결 문제를 전하는 대다수 언론도 대통령 선거 정국에서 정략에 따른 정치권의 대결만을 흥미 위주로 중계보도하고 있다. 과거에도 언론은 권력형비리 사건이 터지면 정치권을 성토하며 대안을 주문하다가도 정치권의 물타기에 편승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최근 정치권의 이런 행보를 볼 때 8·8 재보선 전 정치권이 목소리를 높였던 반부패입법 의지도 선거용이란 비판이 있다. 그럼에도 올 연말 대통령 선거를 가늠할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결과 부패 청산 민심이 확인된만큼 대통령 선거 이전에 제대로 된 반부패 개혁입법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다.
언론이 국민의 부패척결 여론 제대로 반영해야
몇몇 언론 또한 이 대목에선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대한매일』은 7월 6일 ‘반부패입법 지금 하라’ 사설에서 “부패 차단의 법제화는 말로만 되지 않는다. … 빠른 시일 안에 입법화하려는 의지가 있는지가 중요하다”라고 하고, “부패차단을 위한 입법화는 지금이 적기다. 어느 정당의 후보가 집권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상적인 안을 마련할 수 있는 때”라고 쓰고 있다. 『경향신문』은 7월 19일 ‘반부패입법 제대로 해야’ 사설에서 “반부패 제도화는 대선을 의식하여 정략적으로 접근하면 과거의 예처럼 부실입법이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지적하고, “각 정당은 당리당략을 떠나 법적 정당성과 실효성, 정치적 명분을 함께 갖춘 부패방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부패 문제를 다루는 언론들은 그동안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었다. 권력형비리나 공직사회 부패는 언론의 단골 의제였다. 올해 들어 신문들이 사설과 기획기사, 외부 필진 등을 동원해 부패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도 수십 건에 이른다. 또한 방송을 비롯해 시민단체가 마련한 관련 토론회나 공청회도 여러 건이다. 반부패 제도화는 시급한 사안이다. 언론은 정치권이 국민 여론에 부응해 반부패입법 활동에 나서도록 압박하고, 입법과정에서 그것이 왜곡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국민들은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선을 통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치권은 정쟁에 몰두해 이를 외면하고 있다.
재보선 결과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으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됐다. 최근 한나라당은 국회를 열어 영남지역 수해와 공적자금 국정조사를 하자고 한다. 이면의 정치적 계산을 논외로 한다면 이 또한 중요한 사안들이다. 아울러 반부패 제도화를 늦출 이유가 없다. 언론은 대통령 선거 정국에서 제기된 병역비리 등 의혹의 실체를 밝히는 것과 더불어 권력형비리를 막을 반부패 제도화에도 이에 못지않은 관심을 보여야 마땅하다. 정치권이 당초 약속을 외면하고 정쟁에 골몰하고 있을 때야말로 언론이 해야 할 일은 ‘국민에 대한 약속’을 지키도록 정치권을 견제하는 일이다. 언론이 부패 청산에 대한 국민 여론을 제대로 읽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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