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와 시민(1)
2002/2002년 09월 :
2002/09/24 00:00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우리 사회에는 마치 ‘사쿠라’와 ‘빨갱이’만 존재하는 듯하다. 기존체제를 조금만 칭찬해도 이내 사쿠라라는 오명이 따라붙는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비판하는 어투만 보여도 금세 빨갱이라는 욕설이 뒤따른다. 말하자면 흑백논리가 극성을 부린다는 말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엄정한 구분도 없이 ‘노동자’와 ‘시민’을 일단 둘로 쪼개놓고서는, 두 진영이 마치 본질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듯한 의혹을 부채질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구나 지금은 이른바 ‘세계화 시대’가 아닌가. 주위는 삭막하고 불안하다. 우리의 정겨운 이웃들이 ‘무한경쟁’, 아니, ‘타도’의 대상으로 손쉽게 탈바꿈하기도 한다. ‘우선 이기고 보자’가 언제 어디서, ‘까짓 죽여도 좋아’로 뒤바뀌어버릴지,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범람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소중한 공동체적 가치와 인간적 연대의식이 적잖이 망가뜨려졌다. 급속한 산업화와 무조건적 경제성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는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자유의 철학도, 평등의 윤리도 제대로 충실히 자리잡지 못한 사회 속에서 급기야는 ‘세계화’의 미명 하에 ‘무한경쟁’의 팡파르가 섬뜩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위기가 더욱 심화되는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과연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세계사적 성감대인 한국사회는 지금 이중적 시련에 봉착해 있다. 요컨대 한국사회에는 현재 서로 중첩되는 두 모순적 과업이 동시 해결을 촉구하는 역사적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개체적 자유회복과 집단적 연대구축을 동시에 구현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과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마치 유럽의 근대사에서처럼, 지역주의나 학벌 등 집단적 신분질서로부터의 개인의 해방, 즉 개체적 자유회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평등과 국민적 연대를 회복하기 위해 개인의 진정한 해방 위에 우뚝 선 공동체주의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요컨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인간적 해방과 인간적 단합을 동시에 실현하는 균형 잡힌 사회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민중
흔히 ‘시민’으로 옮겨지는 독일어 B웦ger나 불어 Bourgeosie는 성(城)이나 요새로 번역되는 Burg 또는 Bour에서 비롯한 어휘다. 이를테면 ‘성 안에 사는 사람들’ 정도의 의미를 지닌 말이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이들은 튼튼한 성벽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으니, 신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회집단의 구성원들로서 지배계층에 속하는 무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외 하층민들은 성 밖에 버려진 존재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날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4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과 그 밖으로 내쳐진 사람들 사이에는 엄한 신분의 장벽이 완고하게 드리워져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어휘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사회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계급으로 해석되었다. 한편으로는 지식을 소유한 예술가, 학자, 문인 등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금융인, 상인 등을 아우르는 말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무산계층들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라 불리었다.
모름지기 모든 사회적 개념은 역사성을 띤다. 이를테면 역사적으로 변천하는 사회적 계급의 축적되는 힘의 정도와 수준에 발맞추어 함께 따라 변모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민족’이란 말로 번역되는 nation도 중세 때까지는 왕이나 귀족 등 사회적 지배계층을 총칭하는 말로 쓰였다. 그러다가 경제적 부를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은 특히 프랑스 대혁명을 겪으면서 자기들이 당연히 nation에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혁명적 이의를 제기하면서 왕이나 귀족 등 구체제의 특권 계급을 척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이 nation이란 개념은 ‘법 앞의 평등’을 보장받는 모든 ‘국민’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된다. 이른바 특권계급이 소멸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개념의 역사적 변천 과정이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예컨대 한때 ‘민중’이란 용어가 ‘민중운동’, ‘민중신학’, ‘민중사회학’ 등등과 연결되면서 사회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학문세계까지 널리 풍미한 적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공안당국에 의해서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위장하는 말이라 하여 그 용어를 입에 올린 사람이 소위 ‘빨갱이’와 동일시되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종의 ‘어둠의 자식’들이나 착취당하는 피지배계층 일반으로, 또 어떤 때는 ‘국민 대중’의 줄인 말 등등으로 편의에 따라 적절히 탈바꿈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이 ‘민중’이란 어휘를 이따금 입에 올리지 않으면 진보적 성향과는 담을 쌓은 보수·반동분자처럼 치부되어 손가락질 받기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민중’이란 말이 행방불명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이 민중의 본질적인 핵을 차지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노동자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존립을 가능케 하고 또 그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이 되면서도 동시에 정치적·경제적 착취와 억압의 주된 대상으로 전락하는 존재가 바로 노동자 아닌가. 국제 자본주의와 그 국내적 대행 세력의 볼모로서 사회 발전의 핵심 주체이면서도 그 혜택으로부터는 가장 멀리 버려진 소외된 집단을 민중이라 한다면, 노동자야말로 당연히 민중의 주체세력이라 일러 마땅한 것이다.
‘시민’이란 말의 운명 역시 유별나다.
우리나라에서는 ‘시민’이란 말이, “서울 시민 여러분!” 하는 어법처럼, 농촌이 아니라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을 총칭하는 초 계급적 의미로 일반화되어 사용되어 온 듯하다. 따라서 예컨대 재벌이나 달동네 주민들도 아무런 차별 없이 공평하게 ‘시민’으로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여부를 따지는 엄밀한 경제 이론적 개념 규정 같은 것이 결코 문제될 리 없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에 강력히 맞서고, 시장경제질서를 흔드는 무리들에 대항하기 위해 출범”했다는 ‘자유시민연대’라는 극우단체까지 버젓이 활보하는 실정이다.
아무튼 오늘날 한국의 ‘민중’들은 대단히 복잡한 존재들이다.
‘여성이면서 노동자’이고, 또한 ‘깨끗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노동자’이기도 하며, 동시에 ‘지역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이기도 하면서, ‘땅값 때문에 때로는 자신의 주거공간이 개발되기를 원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것을 반대하기도 하는 시민’이기도 한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민중들에게는 한 칼로 벨 수 없는 지극히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문화 양식 등이 작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성과 복합성을 고려에 넣지 않는 운동의 논리는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단합이야말로 절박한 시대적 요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는 마치 ‘사쿠라’와 ‘빨갱이’만 존재하는 듯하다. 기존체제를 조금만 칭찬해도 이내 사쿠라라는 오명이 따라붙는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비판하는 어투만 보여도 금세 빨갱이라는 욕설이 뒤따른다. 말하자면 흑백논리가 극성을 부린다는 말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엄정한 구분도 없이 ‘노동자’와 ‘시민’을 일단 둘로 쪼개놓고서는, 두 진영이 마치 본질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듯한 의혹을 부채질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구나 지금은 이른바 ‘세계화 시대’가 아닌가. 주위는 삭막하고 불안하다. 우리의 정겨운 이웃들이 ‘무한경쟁’, 아니, ‘타도’의 대상으로 손쉽게 탈바꿈하기도 한다. ‘우선 이기고 보자’가 언제 어디서, ‘까짓 죽여도 좋아’로 뒤바뀌어버릴지,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범람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소중한 공동체적 가치와 인간적 연대의식이 적잖이 망가뜨려졌다. 급속한 산업화와 무조건적 경제성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는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자유의 철학도, 평등의 윤리도 제대로 충실히 자리잡지 못한 사회 속에서 급기야는 ‘세계화’의 미명 하에 ‘무한경쟁’의 팡파르가 섬뜩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위기가 더욱 심화되는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과연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세계사적 성감대인 한국사회는 지금 이중적 시련에 봉착해 있다. 요컨대 한국사회에는 현재 서로 중첩되는 두 모순적 과업이 동시 해결을 촉구하는 역사적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개체적 자유회복과 집단적 연대구축을 동시에 구현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과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마치 유럽의 근대사에서처럼, 지역주의나 학벌 등 집단적 신분질서로부터의 개인의 해방, 즉 개체적 자유회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평등과 국민적 연대를 회복하기 위해 개인의 진정한 해방 위에 우뚝 선 공동체주의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요컨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인간적 해방과 인간적 단합을 동시에 실현하는 균형 잡힌 사회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민중
흔히 ‘시민’으로 옮겨지는 독일어 B웦ger나 불어 Bourgeosie는 성(城)이나 요새로 번역되는 Burg 또는 Bour에서 비롯한 어휘다. 이를테면 ‘성 안에 사는 사람들’ 정도의 의미를 지닌 말이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이들은 튼튼한 성벽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으니, 신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회집단의 구성원들로서 지배계층에 속하는 무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외 하층민들은 성 밖에 버려진 존재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날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4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과 그 밖으로 내쳐진 사람들 사이에는 엄한 신분의 장벽이 완고하게 드리워져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어휘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사회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계급으로 해석되었다. 한편으로는 지식을 소유한 예술가, 학자, 문인 등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금융인, 상인 등을 아우르는 말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무산계층들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라 불리었다.
모름지기 모든 사회적 개념은 역사성을 띤다. 이를테면 역사적으로 변천하는 사회적 계급의 축적되는 힘의 정도와 수준에 발맞추어 함께 따라 변모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민족’이란 말로 번역되는 nation도 중세 때까지는 왕이나 귀족 등 사회적 지배계층을 총칭하는 말로 쓰였다. 그러다가 경제적 부를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은 특히 프랑스 대혁명을 겪으면서 자기들이 당연히 nation에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혁명적 이의를 제기하면서 왕이나 귀족 등 구체제의 특권 계급을 척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이 nation이란 개념은 ‘법 앞의 평등’을 보장받는 모든 ‘국민’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된다. 이른바 특권계급이 소멸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개념의 역사적 변천 과정이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예컨대 한때 ‘민중’이란 용어가 ‘민중운동’, ‘민중신학’, ‘민중사회학’ 등등과 연결되면서 사회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학문세계까지 널리 풍미한 적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공안당국에 의해서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위장하는 말이라 하여 그 용어를 입에 올린 사람이 소위 ‘빨갱이’와 동일시되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종의 ‘어둠의 자식’들이나 착취당하는 피지배계층 일반으로, 또 어떤 때는 ‘국민 대중’의 줄인 말 등등으로 편의에 따라 적절히 탈바꿈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이 ‘민중’이란 어휘를 이따금 입에 올리지 않으면 진보적 성향과는 담을 쌓은 보수·반동분자처럼 치부되어 손가락질 받기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민중’이란 말이 행방불명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이 민중의 본질적인 핵을 차지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노동자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존립을 가능케 하고 또 그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이 되면서도 동시에 정치적·경제적 착취와 억압의 주된 대상으로 전락하는 존재가 바로 노동자 아닌가. 국제 자본주의와 그 국내적 대행 세력의 볼모로서 사회 발전의 핵심 주체이면서도 그 혜택으로부터는 가장 멀리 버려진 소외된 집단을 민중이라 한다면, 노동자야말로 당연히 민중의 주체세력이라 일러 마땅한 것이다.
‘시민’이란 말의 운명 역시 유별나다.
우리나라에서는 ‘시민’이란 말이, “서울 시민 여러분!” 하는 어법처럼, 농촌이 아니라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을 총칭하는 초 계급적 의미로 일반화되어 사용되어 온 듯하다. 따라서 예컨대 재벌이나 달동네 주민들도 아무런 차별 없이 공평하게 ‘시민’으로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여부를 따지는 엄밀한 경제 이론적 개념 규정 같은 것이 결코 문제될 리 없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에 강력히 맞서고, 시장경제질서를 흔드는 무리들에 대항하기 위해 출범”했다는 ‘자유시민연대’라는 극우단체까지 버젓이 활보하는 실정이다.
아무튼 오늘날 한국의 ‘민중’들은 대단히 복잡한 존재들이다.
‘여성이면서 노동자’이고, 또한 ‘깨끗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노동자’이기도 하며, 동시에 ‘지역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이기도 하면서, ‘땅값 때문에 때로는 자신의 주거공간이 개발되기를 원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것을 반대하기도 하는 시민’이기도 한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민중들에게는 한 칼로 벨 수 없는 지극히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문화 양식 등이 작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성과 복합성을 고려에 넣지 않는 운동의 논리는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단합이야말로 절박한 시대적 요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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