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사상사나 철학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사상이나 철학이 담당해야 될 것을 문학이 대신해 왔기 때문이다. 『현대 일본의 비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저작의 저자들이 문제삼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비평이란 무엇인가. 저자들은 ‘협의의 문예비평 이상의 것’으로 그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 말은 이들에게 비평이 ‘근대 일본 지성의 정수’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일본의 문학과 비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외형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일본의 사상과 철학의 전개양상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 저작의 출간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한 일로 보인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 책은 외부의 제안에 의해 내부적인 문제의식을 환기시킨 경우에 해당한다.

이때 외부란 일본의 정신적인 타자로서 존재하는 구미(歐美), 더 정확하게는 미국의 지식인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은 근대 일본의 비평에 대한 앤솔로지를 출판하려는 콜럼비아 대학의 기획으로부터 시작된 작업이다.

그 기획을 담당한 것은 콜럼비아 대학에 재직중인 가라타니 코오진과 폴 앤들러 교수이다. 이 ‘외부의 시선’이 내부의 문제를 객관화하는 것을 가능케 한 동력이다.

‘외부의 시선’이 내부의 문제를 객관화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이 책의 제목이 『일본 현대의 비평』으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近代日本の 批評』이라는 제목 아래 쓰여진 세 권의 책이 원텍스트이다.

천황의 재임기를 의미하는 일본의 연호, 즉 메이지(明治, 1868~1912), 다이쇼(大正, 1912~1926), 쇼와(昭和, 1926~1989)기의 비평을 대상으로 한 세 권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일본 근대의 비평』과 『일본 현대의 비평』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재구성되었다.

여기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하는 『일본 현대의 비평』은 쇼와 전기와 후기를 다룬 두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며, 이 책의 전편이라 할 수 있을 『일본 근대의 비평』(소명출판, 2002)은 메이지와 다이쇼기의 비평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

메이지·다이쇼·쇼와로 연결되는 이 시기는 한국사에 있어서는 조선후기로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남북한에 각각의 국민국가가 수립되고 오늘에 이른 시기와 대응한다.

특히 일본의 다이쇼 시기와 쇼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우리 식으로 보면 일제강점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이 책에서 전개되고 있는 비평사적 논의가 우리 문학의 그것과 상당한 관련성을 맺으면서 전개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는 편의적으로 일본 천황의 연호를 비평사의 분기점으로 설정했지만, 넓은 범주에서 가장 확연한 사상사적 변화를 가능케 한 사건은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1894)과 일본인이 ‘지나사변’(이 표현에는 중국에 대한 일본의 멸시가 내포되어 있다)으로 표현하고 있는 중일전쟁(1937) 및 미국과의 태평양전쟁(1941)인 것으로 판단된다.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전은 일본이 ‘아시아’라고 하는 표상체계로부터 벗어나 서구에로 자신을 동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해 준 사건이었다.

이 두 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의 국민과 지식인들에게 중화주의적 질서의 소멸, 이에 따른 제국주의적 야심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그 과정에서 일본이라는 개념적 자기정체성이 형성되었음은 물론이다).

문화적으로는 이른바 다이쇼 교양주의의 융성이라는 근대적 이상을 화려하게 꽃피우면서 ‘서구적 근대 따라잡기’가 맹렬하게 추구되었는가 하면, 쇼와기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사상적 탐닉이 가능한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초극론’ 제창했던 지식인들 매섭게 비판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이 이 시기의 일본의 비평가들, 넓게 보아 일본의 지식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것은 다이쇼 교양주의나 일본의 마르크스주의가 보여주었던 서구적 근대를 향한 보편주의적 이상열기라고 하는 것이, 국내적인 민주적 질서의 파탄과 국외적인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한 자체 반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거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 임하면서 일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천황제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던 것을 비판하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이론적 기반으로 제시되었던 ‘근대의 초극론’을 제창했던 일군의 교토학파 지식인들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역사적 사건 앞에서는 아무런 발언도 제기하지 않고, 보편주의와 추상적인 표어주의에 골몰했던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뒤집어보면 해당 시대 한국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적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들 저자들이 일본 근대비평의 전개방식을 고찰하는 태도로부터 일본적인 비평의 작동방식을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비평=타자의 발견이라는 등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단순화하자면 일본의 근대비평, 범위를 조금 더 넓혀 일본의 지성사란 중국이라는 중세적인 타자를 지워내고 그 자리에 서구를 배치하고, 다시 이로부터 일본이라는 나르시시즘적 주체를 세우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대결하거나 모방해야 될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랄지 오만함이랄지 하는 정신상황이 연출해낸 것이 태평양전쟁을 기점으로 한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표출된 것이겠거니와, 그것은 발견할 타자가 없는 주체로서의 일본이 다다른 비평의 소실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의 논의가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것이었다면, 끝으로 이 책의 형식과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이 책은 한 사람의 발제문에 대해 다섯 명의 토론자가 등장해 좌담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의 형식에는 장단점이 존재한다. 장점이라고 한다면 대화를 통해서 특정한 사안에 대한 다채로운 시각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일단 그것이 ‘대화’를 통해서 개진되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사안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가 다소는 용이해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본문학의 ‘전사’(前史)에 대한 이해나 좌담에서의 발언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할 경우 독자들의 이해는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번역자의 수고로 이러한 위험이 사전에 예방되고 있다.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는 번역자가, 필요한 부분에서 각주를 통해 보충설명은 물론 필요한 참고문헌들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논의의 과정에서 언급된 작품들의 한국에서의 출판여부까지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번역이 창조에 버금가는 훌륭한 작업일 수 있다면, 이 책의 번역자는 그러한 찬사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된다. 번역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 racan@hanmail.net
2002/09/24 00:00 2002/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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