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6일 기금 5000억 원을 목표로 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장학재단인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이 창립총회를 갖고 제1기 장학생 선발 공고를 내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미 7월 18일에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장학재단 설립계획을 밝혔던 터라 충격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5000억 원이라는 재단의 규모가 놀랍기도 하면서, 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고하고 기부문화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워낙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이 체질화된 필자인지라 이번 삼성그룹의 장학재단 설립에도 마음 편치 않은 구석이 있다. ‘좋은 일 하는데 웬 시비냐’고 하실 분 있으시겠지만, ‘쟤는 원래 저런 놈이다’라고 한수 접어주시기 바란다.

우선, 재단설립 계획을 발표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7월 18일에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올해 이건희 회장이 800억 원,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가 700억 원을 출연해서, 합해서 1500억 원으로 재단을 출범시킨 후, 내년부터 각 계열사들이 총 3500억 원을 갹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3500억 원. 적지 않은 돈이다. 아니, 작년에 삼성그룹의 14개 상장계열사가 주주들에게 지급한 배당금 총액이 6080억 원이었으니, 그 58%에 해당하는 3500억 원은 엄청난 금액이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이 엄청난 금액을 내야 할 각 계열사들은 기부금액 및 그 시기에 대해 이사회에서 결의하거나 공시한 바가 전혀 없다. 주주들에게 주는 배당금의 절반이 넘는 거액을 기부하면서 주주의 대리인인 이사회는 기부 계획에 대해 논의도 하지 않았다? 이사도 아닌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대신 발표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 각 계열사의 이사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가. 좋은 일도 이왕이면 제대로 절차를 밟아서 하면 좀 좋은가. ‘역시 삼성은 회장과 비서실(지금의 구조조정본부)이 다 알아서 한다’는 비난의 소지를 왜 스스로 제공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또한, 타이밍도 절묘하다.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의 재단설립 계획 발표 딱 1주일 전에, 검찰은 1999년 12월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김인주 씨(당시 재무팀장, 현 삼성전자 이사)가 김홍업 씨에게 활동비 명목으로 5억 원을 주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물론 재단설립은 오래 전부터 계획해 왔던 일이겠지만, 하필이면 왜 이때 그것도 구조조정본부장이 발표했을까를 궁금해한다면, 필자가 너무 의심이 많은 탓인가.

한편, 3500억 원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상무보가 내는 1500억 원은 문제가 없는가. 이것도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 1500억 원을 현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삼성전자 주식으로 출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산 한번 해보자. 1기 장학생 선발 공고를 보면, 1인당 5만 달러씩 100명을 뽑는다니 총 500만 달러, 약 60억 원이다. 내년부터는 사업을 본격화해서 200명을 뽑아도 120억 원이다. 이 정도라면 1500억 원어치 삼성전자 주식 원본에는 손대지 않고 그 수익금만으로 충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장학재단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의 의결권은 누가 행사하는가. 장학재단 이사 6명 중에 이재용 상무보가 포함되어 있다는데….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가 재단을 만들 때, US Steel의 주식을 판 현금을 출연함으로써 재단과 회사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끊어놓았던 것과 비교하기에는 우리나라의 기부문화가 아직은 성숙하지 못할 것일까.

김상조
2002/10/24 00:00 2002/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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