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의 거죽과 새우의 속

우리 사회는 현재 어떤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까?

예전에 유럽을 난생 처음 구경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체험이 있다. 그곳에 다녀와서는 충격을 받은 듯 제일 먼저 신기하다며 꺼내는 말이 “거, 유럽의 집들에는 울타리가 없어” 하는 식이었다. 담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미숙련 삽살개 정도면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을 수준의 나지막한 울타리가 전부다.

그에 비해 우리의 것들은 어떠한가? 유럽과는 판이하다.

시멘트로 험상궂은 장벽을 쌓아올리고도 불안해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을 담 끝에 촘촘히 박아놓고 또 그 위에 철조망을 이중삼중으로 둘러쳐 마치 토치카처럼 보이던 주택들이 우리 도시에서는 흔히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왕왕 ‘맹견주의’라는 엉터리 경고판까지 터억 하니 걸어놓기 일쑤였다. 가히 완벽한 안보체제 구축이라 할 만하였다.

우리는 범람하는 군사문화 속에서 우리의 정신까지 이렇게 완전무장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요새 같아 보이는 담벼락도 일단 뛰어넘기만 하면 안방까지의 진입은 식은죽 먹기 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창문고리나 현관 출입문의 개폐장치가 어이없을 정도로 허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은 정반대다. 부질없는 그 담장을 보고 안방의 보석함이 내 손안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낙관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대개 하루종일 열려 있기 일쑤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울타리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진출은 거의 불가능하다. 안채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버티고 있다. 완벽에 가까운 자물쇠 장치와 물 한방울 새어들지 않을 정도의 빈틈없는 창틀이 맹위를 떨치기 때문이다. 요컨대 형식은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내용은 튼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다. 겉은 맹수처럼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속은 새우처럼 물러 터져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형식주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현실의 흐름 곳곳에 폐수처럼 의연히 녹아들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겉으로는 삐까뻔쩍한 듯하나 속으로는 연신 곪아터지고 있는 일들이 어디 한둘인가. 가령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같은 것들이 겉모습이 허술해서 무너져내렸던가.

그러나 우리 조상은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 하여 건강한 내용주의를 설파하지 않았던가.

요컨대 보잘것없는 겉모양보다는 훌륭한 내용을 뒤쫓던 게 바로 우리 전통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에 든 것보다는 바깥 포장에 더욱 신경 쓰는 형편으로 뒤바뀌어 버렸으니, 어쩌다가 이런 곱던 마음가짐이 행방불명되어 버렸을까. 우리 현실은 지금 ‘장맛보다는 뚝배기’라는 한국적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이를테면 안에 든 장은 엉터리로 남겨둔 채 뚝배기만 근사하게 꾸며놓고 희희낙락하는 동안 우리는 IMF의 된서리를 맞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은 고국에 다니러 온 어느 한국인이 경찰의 요청에 따라 영어로 된 미국 운전면허증을 제시했더니 그 경관이 “수고하십시오!” 하고 경례를 처억 부치더란다. 마치 무슨 어마어마한 기관에나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눈치로.

하기야 공공기관이나 골프장 같은 곳에도 조그만 차 타고 가면 푸대접받기 일쑤다. 심지어 달동네 살거나 월세 사는 형편이라도 자가용을 생활필수품처럼 여기는 세상 흐름이 널리 퍼져 있는 형편이니 어쩌겠는가.

어느 한글학자 이야기다.

그에 의하면 ‘아름답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아리땁다’의 ‘아리’ 또는 ‘아지’는 병아리, 송아지의 예에서 보듯이 어린 것,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사라 한다. 이처럼 본시 자그마한 체구 또는 어린 여자의 용모를 묘사하던 아름답다는 말이 언제부턴가 서구어의 영향으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하는 식으로 적용범위가 한껏 넓어졌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본래 국토가 작아서인지 우리는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작은 성취에 만족을 느끼며 살아온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찾으면서, ‘이웃 사촌’이라며 이웃끼리 훈훈한 정을 나누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근래 들어 ‘졸부’라는 표현에도 그대로 드러나듯이, 짧은 기간에 갑자기 큰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아진 탓인지, 이런 취향이 돌변해버린 듯하다. 아담한 미인에서 ‘슈퍼모델’을 찾게 되고, 가수도 ‘대형가수’ 정도 되어야 겨우 눈길을 주는 세태로 변했다. 돈을 벌어도 한목에 왕창 벌어야 하고, 망해도 일시에 폭삭 망하려 한다. 바겐세일도 ‘몽땅 세일’ 또는 ‘창고 대매출’이어야 하고, 물건을 살 때도 깡그리 ‘싹쓸이’ 해야 직성을 푼다. ‘가격파괴’ 정도 되어야 눈길을 줄까 말까다. 최고지상주의, 한탕주의가 난무한다.

흔히 우리 민족의 특수성으로 첫째, 높은 교육열과 그에서 비롯하는 고급 지식인의 풍부함, 둘째, 통일된 언어를 소유한 단일민족성, 셋째,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 고도의 신앙심, 넷째, 주위열강의 끝없는 침탈 탓으로 닦여진 불굴의 항거정신 등을 꼽는다. 그러나 흔히 부정적 결함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이러한 한국인의 특성을 어떻게 긍정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세계사적 진보에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 하는 것이 새로운 세기에 임하는 우리의 과업과 다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러한 특성을 첫째, 생존경쟁이 아니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지성적인 공동노력으로 바꿔나가고, 둘째, 민족 구성원의 평등과 단합을 이끌어내는 통일된 결속력으로 돌리며, 셋째, 추상적인 관념을 위한 순교가 아니라 현실 사회의 구체적 정의를 위한 헌신과 희생으로 탈바꿈시키고, 넷째, 이러한 것들을 끈기 있게 추진하는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원동력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어떻게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준엄한 과제라는 말이다. 그 과제의 중요한 몫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형식주의의 극복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형식주의라 함은 한편으로는 남들과 똑같아지고 싶어하는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남들과 못내 달라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율배반적으로 뒤섞인 상태를 이른다. 첫번째 것은 뛰어나다고 믿는 타인을 무조건 모방하고 추종하려는 의지로 귀결되지만, 반면에 두번째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을 앞지르고 남과 결정적으로 격차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나타난다. 허나 우리의 형식주의는 과감하게 양쪽을 한꺼번에 다 포괄하고 있다. 그리하여 병적인 ‘귀족주의’와 ‘물신숭배’, ‘사대주의’ 또는 ‘주체성 과장주의’ 등의 숙환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 이것이 우리 시대의 국민윤리가 되어야 하겠는가!

노자 선생도 “진실한 말은 꾸밈이 없고, 꾸밈이 있는 말엔 진실이 없다”고 가르쳤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나 진실이 아니라 꾸밈에만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이 형식주의를 극복함으로써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박호성
2002/10/24 00:00 2002/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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