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층의 표심, 보수 단정은 금물


대선이 50여 일 앞으로 바짝 다가오면서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가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의 상호비방은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기성언론은 이런 정치권을 분석하고 질타하는 보도 대신 흥미위주의 여론조사에 의한 ‘경마식 보도’를 일삼고 있다. 21세기 첫 대통령을 뽑는 2002 대선에 시민은 없다. 본지는 실종된 밑바닥 대선 민심을 듣기 위해 청년들이 자주 찾는 술집, 강남의 찜질방, 서울 각지의 노인들, 정치학회 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었다. (편집자 주)

김민석 전 의원이 정몽준 씨 품에 안겼다. 해묵은 병풍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고, 세풍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마당에 선거철이면 잊지 않고 불어오는 북풍까지, 철새보다 못한 정치인들이 갈팡질팡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그러나 ‘제대로 해보겠다’는 허풍을 믿고 국민들을 위해 일해달라고 국회로 정치인들을 보낸 국민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에 기가 찰 따름이다.

지난 10월 17일 동서울터미널 대합실에서 만난 과천 할머니(73세)는 “나는 잘 모르니 젊은 사람들한테 물어 보라”며 손사래를 치시더니 “다들 왜 그렇게 욕만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문을 여셨다. “투표는 해야겠는데 이쪽이나 저쪽이나 국민들이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고, 흉도 좀 감싸주면 좋으련만…”하고 혀를 끌끌 차신다.



서울역에서 온양온천 행 열차를 기다리던 한 할아버지(70세)는 “지금 상황이라면 투표하고 싶지가 않아. 국민을 대표해서 일 잘하라고 뽑아줬더니 서로 헐뜯고 싸움만 하잖아”라고 정치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셨다. “노무현은 민주당 분열로 힘들어졌고, 지금처럼 서로 헐뜯기만 해서는 한나라나 민주당 모두 글렀다”며 “민주당 위기는 김대중 아들들 때문에 빚어졌고, 병풍, 세풍도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는 일 아니겠냐”고 정세분석까지 내놓으셨다.

“누구를 찍을 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김동주 할아버지(70세)는 이리 저리 자신의 유불리를 계산하며 옮겨 다니는 정치인들에 대해 “국민들이 뽑아준 걸 지켜야지”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김 할아버지는 막판에 가서나 지지후보를 결정할 생각이시란다.

종로에서 회사에 다닌다는 한 아저씨(55세)는 요즘 정치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단박 “틀렸어”라는 답을 내놓았다. 그는 “노무현은 참신하지만 민주당이 개판이라 불안하고, 이회창은 불안하지는 않지만 지금 아무나 받아서 나중에 그 사람들 다 어쩔 건지 걱정이다. 결국 DJ도 그러다가 이 꼴 난 것 아니겠냐. 정몽준 그 사람은 왜 나왔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자기 아버지 짝이나 안 나면 다행”이라고 각 후보들에 대한 평가를 내놓은 끝에 “이젠 젊은 사람이 나와서 정치도 좀 변하는 걸 보고 싶다”며 소박한 희망을 피력했다.

“정치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남자들 입이 여자들 보다 더 가볍잖아. 막말 좀 안 했으면 좋겠어. 모범적인 사람이 국회의원이 돼야 하는데 덮어씌우기나 하고 말이야. 생모가 기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훌륭하게 자랐으면 됐지. 자기들은 생모 밑에서 자라서 그렇게 막말이나 하나? 북한만 해도 그렇잖아. 같은 민족인데 잘 사는 우리가 좀 주면 어때. 그 덕분에 평화가 온 거 아니겠어? 아시안 게임에도 북한이 오니 얼마나 좋아. 기자양반 생각은 어때?”

을지로입구 역에서 만난 김효지 할머니(65세)는 정치 얘기가 나오자 “지금까지 선거 열심히 했는데 이젠 (선거)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속엣말을 뱉으셨다. 무엇보다 ‘어떤 할머니가 그러더라고 내 말 좀 (정치인들한테) 꼭 전해달라’는 당부가 인상깊었다.

“야당 수가 많은데 야당에서 대통령까지 나와서 (권력을) 휘두르면 정치가 안 된다”며 자신의 정치적 식견을 내비친 김 할머니는 무엇보다 이회창 씨가 대통령 감이 못된다고 잘라 말했다. 이유인즉 “(미국이) 이라크 전에서 승리하면 다음 차례가 북한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회창은 DJ처럼 잘 풀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몽준, 노무현 두 후보에 후한 점수를 준다는 김 할머니는 끝으로 이회창 씨가 대통령이 되고 싶었으면 비록 의가사 제대를 했을망정 자식들을 군대에 다 보냈어야 했다며 “남의 자식은 총알받이로 내몰고 자기 자식만 중하냐”고 꼬집었다.

“정치인에는 기대를 안 한다”는 이용화 씨(58, 동서울터미널 청소용역)는 “그저 돈이나 많이 벌게 해주면 좋지요. IMF가 지나도 우리 서민들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지요. (IMF) 전에 70∼80만 원이던 벌이가 지금은 60만 원밖에 안돼요”라며 경제난 극복을 위해 경제성장, 재벌규제 완화에만 중점을 두는 ‘높은 분’들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씨는 “그래도 투표는 해야지”라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일터로 향했다.

거리에서 만난 어르신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더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개를 흔들며 아예 말을 못 붙이게 하는 이가 절반을 넘었다. 다만, 우리시대 노년층이 청장년층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럽다고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투표는 할 것이지만 한 표를 쾌척할 마땅한 후보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노는 서로 헐뜯는 통에 믿음이 가질 않고, 정몽준 씨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정치권은 노년층을 충직한 보수로 일찌감치 분류해 놓은 듯 하지만 그들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자신의 속내를 풀어놓을 초고속인터넷도, 화려한 언변도 가지지 못했지만, 나름의 잣대로 모든 것을 가늠하며 내심 변화를 바라고 있다. 이들에게 먼저 믿음을 주는 이가 대통령 고지 탈환에 있어 유리한 기지를 선점하게 될 것이다.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일, 예천행 버스에 오르신 어느 할머니(80세)의 당연한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백성들 살려주고, 받들 줄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지.”

이인향
2002/10/30 00:00 2002/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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