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경의 이야기다. 57년이라고 하면, 피난 정부가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한 것이 53년이고 비극적인 동족상잔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아직 뒤죽박죽인 상태였다. 피난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서울로 살 길을 찾아 모여들고,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북한산ㆍ인왕산ㆍ낙산ㆍ 남산은 물론이고 좀 변두리라고 할 수 있는 수락산ㆍ도봉산까지도 판자촌으로 메워졌다. 시궁창의 썩은 냄새로 뒤덮인 청계천 가에도 양쪽으로 빈틈없이 판자촌이 끝간 데 없이 들어서 있었다. 폐허와 잿더미 속에서 사람들은 살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서울은 절대 사수한다’고 녹음방송을 흘리고 국민들 몰래 부산으로 일찌감치 도망갔던 ‘리승만’ 정부는 53년에 ‘조선인민공화국’과 ‘유엔군 사령부’가 체결한 ‘휴전협정’을 인정할 수 없다며 끝까지 북진통일해야 한다고 큰소리만 뻥뻥치고 있었다. 리승만 정부가 당시에 했던 일이라곤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남기고 간, 이른바 ‘적산’들을 찾아서 이익을 챙기는 일과 미국에 구걸해서 구호물품을 얻어다가 교회 등을 통해 나누어 주는 일 정도였다.

57년은 그러한 상황이었다. 이 무렵 나는 대학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나의 전공은 명색이 ‘사회학’이었다.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 그 길을 찾아서 사회학을 기웃거렸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그 당시 내가 읽은 책 중 기억나는 것은 영국의 정치학자 ‘해롤드 라스키’의 『An Introdution to Politics』라는 작은 책인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책 내용에 공감을 해서라기보다는 반발과 허탈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충격받고 반발했던 내용은 ‘영국의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고는 결론적으로 영국사회는 아직도 사람이 살 만한 사회는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아니 영국같이 일찍이 산업혁명을 이룩하고 세계의 부를 긁어모았으며, 민주주의의 역사가 뿌리깊은 나라를 가리켜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된다’니, 그러면 우리 같은 나라는 어떡하라는 거냐, 나는 분노하고 좌절했다.

스웨덴에서 배운 것

고민 끝에 나는 스웨덴에 가서 그 사회를 보고 뭔가 배워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스웨덴은 ‘무덤에서 요람까지’ 사회보장이 제대로 되어 있고 왕족들도 전차(대중교통 수단)를 타고 다니며 총리도 일반 아파트에 사는 나라라고 어디서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웨덴에 관한 자료를 찾는데 대학도서관이고 어디고간에 도무지 스웨덴에 관한 책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 관훈동에 있는 ‘사회과학 도서관’, 이 도서관은 그 후에 서대문 적십자병원 근처로 이사를 갔지만, 이 도서관에서도 자료를 구하지 못하다가 문득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백과사전의 스웨덴난을 들춰보니 상당한 분량의 정보가 실려 있었다. 국토, 인구, 계절·기후, 역사, 문화, 교육. 그래, 여기 있었구나. 교육란을 꼼꼼히 읽어 가는데 ‘스톡홀름대학’에 ‘Graduate School for English Speeking Student’라는 것이 눈에 튀어 들어왔다.

그래서 당장 편지를 작문해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입학허가를 얻었는데, 장학금은 얻지 못했다. 나는 결국 스웨덴에 가지 못하고, 몇 년 후에 일본으로 갔다.

62년 늦가을이었다. 대학에 적을 두고 전공공부는 하지 않고 잡다한 책들만 읽고 있을 무렵이었다. 동경대학 총장, ‘카야 세이지’라는 분이 지금같으면 ‘시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카야 세이지의 구호는 “작은 친절을 베풀고, 또한 작은 불평도 털어놓자”는 것이었다. 일상생활 중 여기저기에서 부닥치는 불합리와 부조리를 그냥 참고 넘어가지 말고 고발하고 항의하자, 혼자 힘으로 안되면 여럿이 모여서 하자, 그래야만 부조리와 불합리가 고쳐진다는 것이 그 분의 주장이었고, 이것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만 60년대 초반의 일본은 사회당과 공산당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질서에 있어서도 사회주의권이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서 구조적 차원의 변혁이나 혁명 같은 것이 사회·정치적 운동의 화두였다.

따라서 ‘작은 불평을 하자’ 정도로는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60년대 초반의 이런 운동은 훌륭한 시민운동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사람이 살 만한 나라’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카야 세이지’의 호소, ‘작은 불평을 하자’는 운동은 긍정적인 공감을 나에게 심어주었다.

시민운동, 내실 기해야

그러는 동안 우리나라도 제법 바뀌어서 얼마 전에는 서울에서 ‘세계 NGO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NGO(Non Governmental Organization)라고 할 것인지, CSO(Civilian Society Organization)이라고 할 것인지, 약간의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러한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니 참으로 우리나라도 많이 변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시민운동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언론ㆍ교육ㆍ환경ㆍ식생활ㆍ소비자보호 등 시민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 시민운동단체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불과 10년 안팎의 일이다. 1987년, 학생과 시민들은 전두환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고 노태우로 하여금 ‘6·29 선언’이라는 것을 연출케하였다. 이른바 ‘6월 항쟁’은 학생, 재야민주세력, 그리고 노동자 조직들이 가혹한 탄압과 희생을 치르면서 이루어놓은 결과물이었다. 그것은 시민운동이 아니라 지하운동이며, 레지스탕스였다.

국가의 포악한 억압기구들과 숨바꼭질하면서 목숨을 걸고 쌓아올린 결과였다. ‘6월 항쟁’의 승리로 비로소 ‘한겨레신문’ ‘민주노총’ ‘전교조’ ‘경실련’ ‘참여연대’를 비롯, 그외의 수많은 시민운동단체들이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6월 항쟁’ 전에는 ‘투쟁’은 있어도 ‘운동’은 없었다. ‘운동’은 공개적ㆍ합법적으로 전개된다. ‘투쟁’은 비밀리에 지하에서 움직인다. 그래도 지금은 ‘운동’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얼마 전에 미국 시애틀에서 열렸던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는 지구표면 곳곳에서 몰려온 엄청난 시민운동단체들에 의해 포위당하고, 경찰은 무려 회의장 주변 50블록에 걸친 영역을 시위금지구역으로 묶기도 했으나,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었다. 미국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최루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시민운동은 이 만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적인 연대성이 더욱 절실한 시점이다.

원래 NGO의 기본적인 특징은 첫째 비정부성, 즉 정부로부터 독립된 사적 단체이어야 하고, 둘째 국제성, 즉 그 구성이나 활동의 목적이 전인류적이어야 하며, 셋째 비영리성을 고수해야 하는 것이다. 즉 다국적 기업과 같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다시 한 번 재인식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NGO의 활동목표는 보편적 가치, 전 인류에 공통되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협소한 민족주의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소속 국가의 입장만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유엔헌장은 ‘우리, 인류’(We the People)라는 주어로 시작한다. 우리 인류는 어차피 동시대인이며, 하나의 같은 별(지구)에서 살아야 한다. 핵확산 금지, 오존층 파괴 문제, 무차별적 개발이나 희귀동물 난획문제 등은 우리 인류 전체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한 NGO는 약자와 피해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것이 자국 내 문제이든, 국제적인 문제이든간에 그러하다. 지난 10년 전후해서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정부ㆍ권력기관ㆍ재벌ㆍ군부ㆍ 언론ㆍ정치인들ㆍ강력한 세력들도 이제 시민운동의 존재를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럴수록 시민운동단체들은 내실을 기하고 더욱 큰 힘을 규합해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새로운 2000년대는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

이상희
2000/01/01 00:00 2000/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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