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간 핵갈등이 바야흐로 ‘2라운드’에 접어들고 있다. 북한과 미국 모두 현안에 대한 입장과 나름의 대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하던 상황도 차츰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북한은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핵위협을 거두어들이면 핵무기를 포기하고 북-미간 별도 검증을 통해 이를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미국도 ‘북한의 핵무기(개발계획) 포기 먼저’ 입장을 고수하고는 있지만, 문서를 통한 체제 보장과 에너지 및 식량 지원 의사를 밝힌 상태다. 요약하면 양쪽 모두 나름의 ‘패’를 꺼내보인 셈인데, 문제는 양쪽의 접근 방식에 아직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쌍방 우려의 동시 해소와 이를 위한 평등하고 공정한 협상’을 촉구하고 있고,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먼저 포기해야 ‘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북한과 미국이 이른 시일 안에 마주앉아 본격적인 협상에 나설지, 앞으로도 적잖은 기간 대화와 협상 없는 힘겨루기를 이어갈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향후 추이를 내다보기 위해 우선 북한과 미국의 주장과 속내, 남한 등 관련국들의 입장은 어떠한 것인지, 1994년 핵위기 때와 다른 점은 무엇인지 따위를 두루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북-미, 진정으로 상대에게 원하는 게 뭔가

북-미간 핵 갈등은 한반도에 중대한 위기를 조성하고 있지만 그 시작은 어찌 보면 ‘중대하지 않은 사안’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10월 3∼5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조지 부시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농축우라늄 방식 핵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를 내밀었고, 북한은 이를 ‘시인했다’고 미국 정부가 10월 17일 발표한 것이 발단이다. 북한은 10월 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핵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논리적 권리’를 제기하며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NCND)’ 태도로 의혹을 키웠다.

관련한 부시 미 행정부와 북한의 공식 반응을 보자. 부시 정부가 적시한 두 가지 논점은 이것이다. “북한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고 시인했다. 북한은 미국을 비난하면서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가 파기된 것으로 간주했다.” 북한의 반응은 이렇다. “미국 특사는 아무런 근거자료도 없이 우리가 핵무기 제조를 목적으로 우라늄 농축 계획을 추진해 조(북)-미 기본합의문을 위반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

위기는 바로 이 ‘우라늄 농축 방식의 북한 핵개발계획’에서 비롯됐지만, 북-미간 주장을 비교해보면 정작 그 실체는 모호하다. 따라서 핵갈등을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선 문제의 우라늄 농축 방식 핵개발계획의 실체가 우선 밝혀져야 한다. 북한으로선 NCND식 모호한 태도가 아니라 명확한 해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북한이 시인했다’고만 주장하지 말고, 북한에 제시했다는 ‘증거’를 국제사회에도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북-미간 협상도, 국제사회의 협력도 힘을 받을 수 있다.

미국과 국제사회, 즉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핵개발계획을 빌미로 제네바기본합의에 따른 대북 중유공급을 12월치부터 중단했고(2002년 11월 14일 케도 집행이사회), 북한은 이에 반발해 핵동결 조처를 해제(2002년 12월 1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하며 양쪽 모두 제네바 기본합의를 무력화시켜왔다. 그러므로 북한이 우라늄 농축 핵개발계획의 의혹을 규명한다면, 미국은 대북 중유공급을 재개해 일단 제네바 기본합의 틀을 되살려야 한다. 그래야만 ‘급한 불’도 끄고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문제 해결이라는 ‘장기 목표’의 달성을 위한 긴 협상이 가능해진다. 이런 바탕에서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도 힘과 구실을 찾을 수 있다.

이 즈음에서 북한과 미국이 진정으로 상대방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협상을 위한 ‘공통의 기반’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메시지는 혼란스럽다. 대북정책의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불량배 국가’ 북한의 체제변화 또는 정권교체를 추구하는가? 아니면 북한에 의해 제기된 위험을 없애고자 하는가?

대화와 불신해소에 우선 순위 두어야

미국이 북한의 체제변화 또는 정권교체를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한 북한과 협상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유일체제’인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의 주권을 존중한다면서도(2002년 10월 18일 콜린 파월 국무장관), 북한의 정권과 인민을 나누어 대처하려는 듯한 접근법(2001년 6월 6일, 2002년 11월 15일 부시 대통령의 대북성명)을 때때로 내비치고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 목표가 ‘북한에 의한 위험의 제거’에 맞춰져 있다면, 협상은 가능하다. 그리고 혼선을 넘어서기 위해선 대화와 불신해소에 우선 순위가 두어져야 한다.

미국은 제네바 기본합의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한다(1월 14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기본합의 이후에도 북한이 우라늄 농축 방식 핵개발계획을 추진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핵위협의 완전한 제거’를 가능케 할 새로운 합의 틀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새집을 짓기 전에 헌집을 헐지 말라는 격언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미국은 제네바 기본합의 틀을 버리고 ‘0’에서 새 틀을 모색하는 복잡한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 문제의 원만한 해결은 제네바합의 틀의 유지와 ‘+α’를 추구하는 합리적 자세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또 다른 관심사인 북한 미사일 문제의 해결도 이 틀 안에서 가능하다. ‘+α’에 따르는 재정적 부담을 미국이 혼자 감당할 필요는 없다.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관련국들, 특히 남한은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를 위해 그 정도의 짐을 나눠질 능력과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신의 입장을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해왔다. 2002년 10월 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자주권 인정 △불가침 확약(불가침조약 체결) △경제발전에 장애를 조성하지 않는 조건에서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1월 10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정부 성명에선 “미국이 우리(북)에 대한 적대시 압살정책을 그만두고 핵위협을 걷어 치운다면 우리는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조(북)-미 사이에 별도의 검증을 통해 증명해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조건부 ‘핵무기 포기’와 ‘별도 검증’을 제시함으로써 미국과 국제사회의 요구에 나름대로 호응해왔다. 그러면서 외무성 대변인의 1월 15일 관영 중앙통신 기자회견에서 “문제를 평등한 자세에서 쌍방의 우려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공정한 협상을 통해 해결하자”고 ‘동시조처’ 협상 방식을 거듭 강조했다.

‘벼랑 끝 전술’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북한이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바란다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 통해 체제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재건을 위한 국제적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라고 있다. 미국과 관계정상화가 이뤄져야만 경제재건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아시아개발은행 등을 통해 조달할 수도 있고, 외부 자본의 투자 유치도 본격화할 수 있다. 북한이 이번 핵갈등 국면에서 ‘위협의 강도’를 예상보다 빠르게 높이고 있는 것도, 경제재건에 집중하기 위해 문제해결의 시간을 단축하고 싶다는 절실한 심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의욕적으로 추진한 71경제관리개선조처와 신의주특별행정구, 개성공업지구 지정 등의 북한식 개혁개방 정책을 힘있게 현실화하기 위해선 이른 시일 안에 안보환경의 정상화가 절실하다고 판단했음직하다.

제네바 기본합의만을 놓고 보자면, 북한 또한 미국과 마찬가지로 불만이 많다. 기본합의에서 핵동결의 대가로 제시됐던 경수로건설을 통한 전력난 해소와 미국의 체제안전보장 그 어느 것도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수로는 애초 목표연한인 2003년을 훨씬 넘겨 일러야 2008년에나 1기가 완성될 전망이다. 북한이 몇해 전부터 ‘전력 손실 보상’을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기본합의 3조의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미합중국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핵무기로 위협하지도 않는다는 공식담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한다)’도 2000년 10월 12일 북-미 공동 코뮤니케를 무시한 채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대상에 포함시킨 부시 행정부의 일방적 정책변화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북한이 제네바 기본합의에 불만을 드러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거꾸로 북한의 에너지난 해결을 위한 방안 제시와 미국의 체제안전보장은 문제 해결의 너른 길을 열어제칠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는 타협할 수 없는 원칙

그러나 북한은 원만한 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의 외교적 방식에 좀더 충실해야 한다.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이라 불리는 특유의 모험주의 노선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벼랑 끝 전술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점에서 외교가 아니다.

북한과 미국의 갈등 상황에서 이 문제의 ‘또 다른 당사자’인 남한의 입장과 접근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미 공조’와 ‘민족공조’ 사이에서 양자 택일하는 방식으로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다. 둘 가운데 하나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현실의 엄중함을 무시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가깝다. 그보다 남한의 처지와 요구는 ‘반전’과 ‘반핵’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거듭 강조하고 있듯이 전쟁은 어느 경우에도 안 된다.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넘게 힘들여 이룩한 성과를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전쟁은 결코 안 된다. 남한은 미국의 대북 봉쇄정책에 반대해야 하며, 동참해서는 안 된다.

핵문제는 기본적으로 국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북한이 강조하는 ‘민족공조’만으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 북한이 북-미간 직접 협상을 요구하면서 민족공조를 강조하는 태도는 제논에 물대기식이란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북한은 핵동결 해제 조처의 이유를 ‘전력공백을 메우기 위한 전력생산’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라는 단서를 달아, 미국과 문제가 원만하게 풀리지 않으면 핵 개발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비핵화공동선언에서 이미 밝혔듯이 한반도 비핵화는 절충의 대상이 아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게 된다면, 일본의 핵무장을 불러오는 등의 연쇄반응을 일으켜 동북아시아를 긴장과 대결로 몰아갈 것이다. 이러한 동북아 신냉전은 한반도의 평화와 한국의 경제에 치명상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다.

남한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북한과 미국을 줄기차게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남한은 우라늄 농축 방식 핵개발계획이라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북한과 미국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론 한반도의 진정한 탈냉전을 지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북한의 핵포기 등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 북한의 식량 에너지 부족 해소 등 경제재건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국제사회의 조직화 방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전문가들 대부분은 북-미간 핵갈등이 결국은 양자간 다양한 관심사를 포괄적으로 담은 일괄타결 방식의 협상을 거쳐 해결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문제는 얼마나 빨리, 얼마나 합리적으로 ‘협상국면’으로 들어 가느냐다. 이를 위해 북한과 미국은 이제 ‘겁쟁이 게임’을 그만 접어야 한다. 여기에서 ‘공정한 조정자’로서 국제사회의 개입을 이끌 남한의 구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남한의 능동적 구실은 현재의 위기상황을 1994년의 핵위기와 구분짓는 핵심 변인이기도 하다. ‘한반도 비핵화, 전쟁 반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은 버릴 수 없는 원칙이다.

이제훈 한겨레신문 기자
2003/02/06 00:00 2003/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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