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개정운동을 제안한다
2003/2003년 02월 :
2003/02/06 00:00
"참여민주주의 헌법"으로의 개정, 시민운동이 주도해야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몇 년까지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개헌논의가 사회적 관심의 초점으로 서서히 들어오고 있다. 필자는 헌법개정 논의에 대해 시민운동이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헌법개정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헌법개정운동’을 벌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시민운동 차원에서 헌법개정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말에 어리둥절해 할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1987년 헌법이 개정된 이후 (앞으로 편의상 ‘1987년 헌법’으로 부르겠다) 지금까지 개헌에 대해 이야기해 온 사람들은 주로 정치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각책임제를 합의하면서 손을 잡기도 했고, 그 합의가 깨어졌다며 갈라서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분권형 대통령제니 이원집정부제니 하는 낱말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개헌논의는 정치인들의 독점물인 것처럼 되어가고 있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가? 시민사회가 헌법개정에 대해 발언할 필요는 없는가?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시민운동의 발걸음은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데, 현행 헌법이 이런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필자는 이미 현행 헌법은 시민들이 요구하는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좁은 틀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기본권 보장, 견제와 균형의 원리 실현을 위해서도 현행 헌법은 많은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내실화’가 기본방향 돼야
이제 헌법개정은 정치권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먼저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체제의 성격과 관련된 이념적 내용은 빼는 것이 좋다. 지금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내용들, 특히 ‘민주주의와 인권의 내실화’라는 방향에 초점을 맞춘 헌법개정 논의가 시민사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천박한 수준이지만, 문제제기 차원에서 필자 나름대로 헌법개정의 내용으로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는, 시민참여의 확대를 통한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이다. 우선 헌법의 전문에서부터 21세기가 참여민주주의의 시대임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 본문에 들어가서는, 국민주권의 원리만 선언할 것이 아니라, 국민주권의 원리가 충실하게 보장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행정이 국민 앞에 투명하게 공개되고,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영역에서 국민들의 일상적 참여가 보장되어야 함을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 선거권자의 연령을 만 18세 이상으로 못박아야 한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의 자치권을 보다 폭넓게 보장하도록 관련된 헌법조항도 손질해야 한다. 그밖에도 정당개혁, 재외국민의 투표권 보장 등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헌법이 양성평등,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권 보장에 좀 더 충실해야 한다. 특히 여성할당제와 같은 여성에 대한 잠정적 우대조치에 관해 헌법에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여성할당제와 같은 제도들이 헌법적 차원에서 근거를 가지고 사회 모든 영역에서 강력하게 추진되도록 해야 한다.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육아 문제 해결, 취업기회 제공 등)을 국가가 취할 의무가 있다는 것도 헌법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에 관해서도 실효성 있는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 헌법해석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국민의 ‘알 권리’도 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셋째, 국가기관간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충실히 작동하게 하고, 시민에 의한 감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내각책임제나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어차피 대통령제냐 내각책임제냐 하는 것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견제와 감시기능을 해야 하는 기관들이 실제로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부정부패나 관료주의를 타파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입법부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제 감사원을 대통령 직속기관에서 국회 소속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 및 감시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헌법개정을 통해 사법개혁을 이루어내야 한다. 헌법에서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못하게 못박아야 한다. 일반 법관의 경우에도 직전 근무지에서는 몇 년간 개업을 못하게 해야 한다. 법관에게는 엄격한 윤리의무(구체적인 내용은 법률로 정하더라도)를 부여하고, 이를 어길 때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 배심제(법률전문가가 아닌 배심원이 재판이나 기소에 참여해 사실문제에 관한 평결을 하는 제도), 참심제(참심원이 법관과 함께 법원의 합의체를 구성해 소송을 심판하는 제도)와 같은 시민 사법참여의 근거를 헌법에 만들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회복되도록 해야 한다.
나눠먹기 식 개정이 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헌법재판소도 이제 개혁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실정법 해석 경험만 있는 판사 출신들로 헌법재판소가 채워져 제2의 법원이 될 바에는 헌법재판소의 존재 의미가 별로 없다. 판사 출신들로 헌법재판관들이 채워지지 않도록 대법원장의 지명권(현재는 헌법재판관 중 3인을 대법원장이 지명하게 되어 있다)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법관 자격을 가진 사람만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한 규정을 고쳐, 변호사 자격이 없더라도 균형 잡힌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진 훌륭한 지식인들이 헌법재판관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과제들의 대부분은 법률개정이 아니라 헌법개정이 필요한 사항들이다. 법률개정을 통해 실현하려면 위헌시비에 휘말리거나, 정파간 이해관계의 대립 때문에 법개정 합의가 어렵다. 헌법개정이라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논의를 통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를 정치권에 강제해야 할 성격의 것들이다.
1948년 이후 1987년까지 9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이 있었다. 단순히 보면 4~5년에 한번 정도는 헌법개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군사독재나 장기집권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자가 주도한 개헌이 많았다. 이번에 만약 정치권이 또다시 ‘권력 나눠먹기’ 식의 헌법개정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시민사회의 저항으로 좌절시켜야 한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대통령제냐, 내각책임제냐, 이원집정부제냐 하는 논의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에게나 관심 있는 이야기다.
시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정치와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분야에서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또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을 막을 수 있는 견제 및 감시장치가 제대로 마련되는 것이다.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남녀가 평등하게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헌법이 보장하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헌법이 개정되려면, 결국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지금의 정치권은 이런 방향의 헌법개정에 적극 나서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진행될 헌법개정 논의의 주도권을 시민사회가 쥐고 나눠먹기식 개정 대신 민주주의와 인권을 한 걸음 전진시키는 개정을 쟁취해야 한다. 이제 1987년 민주헌법쟁취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참여민주주의 헌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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