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정부에 맞서 자치권 투쟁하는 줌마민족네트워크
호수를 닮은 눈이었다. 체구는 작고 손가락은 거칠었지만 눈동자는 참 맑고 진실했다. 가슴에 묻어두었던 응어리를 풀어내자 실핏줄이 터지며 각막이 흐려진다. 그는 속으로, 또 겉으로 울고 있었다.샨티 지본 차크마(Shanti Jibon Chakma).줌마민족네트워크 한국지부(Jumma people’s network Korea 이하 JPNK)의 대표다. 그는 박해받는 고향 땅에 아내를 남겨두고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와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치타공(Chittagong hill tracts)에 평화가 오기 전까지는 결단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그는 9인의 동지들과 함께 자치권 운동을 펼치고 있다.그를 만나기 위해 김포시 대곳면 상마리 60번지로 향하고 있었다. 강화 방면으로 달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점심 준비했으니 같이 먹어요.”JPNK 사무국장 로넬 차크마 나니(Ronel Chakma Nani)였다. 그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한국말을 시도하고 있었다. 훈훈한 정이 차갑고 딱딱한 전화기를 타고 흐른다.
▲ 줌마민족네트워크 사람들. 앉아 있는 이가 산티지본 차크마 대표한적한 겨울 농가. 마을 어귀엔 아무렇게나 볏단이 쌓여 있고, 들판엔 덜 녹은 눈이 햇빛을 받아 반사되고 있다. 젖소들이 낯선 사람에게 ‘동시울음’으로 반응하는 한가로운 오후, 햇살도 참 따스했다.1919년 4월 13일 설립된 상해 임시정부도 이렇게 초라했을까. 할아버지 홀로 사는 낡은 목조가옥을 개조한 단층 벽돌집에 방 두개 얻어 하나는 6만 원, 다른 하나는 7만 원 주고 쓰고 있다. 이곳은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탄압 받는 줌마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한국 심장부이다.두 평 남짓 사무실엔 책상 두개와 원탁테이블 하나, 소파 하나가 있다. 한 벽엔 태극기가 걸려 있고, 다른 벽엔 ‘자유를 위한 오직 한 길은 민주혁명 뿐’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샨티 지본 차크마, 로넬 차크마 나니, 조직담당 지딤 차크마(Zidim Chakma), 정보 및 출판담당 구룽 차크마(Gurung Chakma), 문화담당 아닐다타 차크마(Anildatta Chakma), 재정담당 규민 라크하인 마르마(Kywmin Rakhain Marma), 회원 산티 프리야 차크마(Santi Priya Chakma), 회원 므리날 칸티(Mrinal Kanti), 니크힐 프리야 차크마(Nikhil Priya Chakma)….이들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고단한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향의 해방을 위해 싸운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운동가들이다. 꿈이 있는 사람의 낯빛은 언제나 밝다고 했던가. 그들의 표정은 자못 상기돼 있었다.“우리는 한국에 돈 벌러 온 게 아닙니다. 방글라데시 국경 치타공 산악지대(Chittagonghill tracts 이하 CHT)에 살고 있는 줌마민족이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탄압 받고 있는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이의 도움을 요청하고자 온 것입니다.” 로넬 차크마 나니 씨는 강단 있는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점심 같이 하자고 말할 때의 어눌한 말투가 아니었다.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방글라데시 동남부 치타공 산악지대. 1900년 영국령이던 이 땅에 ‘치타공 힐 트렉스 법’이 발효된 이후 지금까지 65만 명의 줌마민족이 5093 평방마일에 살고 있다.차크마(Chakma), 마르마(Marma), 트리퓨라(Tripura) 등 13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줌마민족은 언어, 문화, 전통, 종교, 인류학적으로 몽골 계통이라는 점에서 방글라데시 주류 ‘뱅갈리’ 민족과 다르다.

평화를 사랑하는 순박한 줌마민족에게 최초의 박해가 시작된 것은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다시 파키스탄으로 분리될 때다. 당시 파키스탄 정부는 CHT 밖에 사는 이슬람 뱅갈리 민족들을 대거 CHT 안으로 이주시켰다. 1900년 영국 정부가 만든 ‘CHT 지역의 외부인 정착을 금한다’는 법은 한낱 종이 짝에 불과하다는 게 명징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줌마민족을 압살하는 폭압의 신호탄이 오른다.파키스탄 정부는 1957년부터 1962년까지 CHT 안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했다. 이때 경작 가능한 농경지 40%가 물에 잠겼으며 10만 명의 줌마인들이 생계수단을 잃고 인도로 피신해야만 했다. 1971년 뱅갈리 민족은 파키스탄 정부에 항의하며 방글라데시 독립운동을 펼쳤고, 줌마인들도 새로운 정부와 헌법을 기대하며 이 투쟁에 동참했다.투쟁 끝에 뱅갈리 민족은 1971년 12월 15일 방글라데시 정부를 얻었지만 줌마인은 또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다. 방글라데시 초대 수상인 세이크 무지부르 라하만(Seikh Mujibur Rahaman)은 줌마인들에게 “우리는 모두 뱅갈리인이다. 당신들도 인종의 정체성은 잊어버리고 뱅갈리인이 되라”며 치욕스런 언사를 던졌다.방글라데시 정부는 군대와 CHT 지역에 들어온 정착민들을 통해 줌마인들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한 채 ‘뱅갈리 방식’의 삶을 강요했다. 죄 없는 마을사람들을 학살했으며 땅과 곡식을 훔쳐갔다. 청년들을 고문하고 감옥에 보냈으며 재판은 이뤄지지 않았다.줌마인들은 이런 학살이 벌어질 때마다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비인간적인 공격으로 참혹한 세월을 보내야했다.1980년 3월 25일 CHT에 살던 뱅갈리 정착민과 군대는 불교사원 구내에서 300명의 줌마인을 학살했으며, 1986년 5월 29일 벌어진 판차리 학살을 피해 수천 명의 줌마인이 인도로 피신하기도 했다. 1990년 4월 10일엔 방글라데시 국경수비대에 의해 로강 학살이 일어났는데, 비공식 집계만으로도 1300명의 줌마인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 1995년 3월 15일엔 반다르반 학살이 일어나 수백 명이 죽고 약탈과 방화로 승려들이 부상당했다.JPNK 아닐다타 씨는 1988년 8월 8일 벌어진 ‘바가이 차리’ 학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중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깊은 숨을 몰아쉰 뒤 두 눈을 한번 감았다 뗀 후 그는 기억의 시계를 과거로 돌렸다.“열다섯 살 때, 제가 살던 히라차르(Hirachar) 마을에 갑자기 정착민과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칼을 휘두르는 정착민이 앞에 서고,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지요. 며칠 전 줌마게릴라들이 방글라데시 군대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사촌 3명이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날부터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돌이가 됐어요. 저는 랑가마티에 있는 고아원에 보내졌고, 부모님은 산동네에 피신한 채 마을로 내려오지 못했어요.”
 | |
| ▲ 방글라데시정부는 줌마인에 대한 학살을 멈추지 않고 있다 |
| |
끔찍한 일이었다. 칼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잔인 무도한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그가 수도자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을 것이다. 줌마인 대부분에게 이런 아픈 기억이 마치 가위 눌린 것처럼 가슴에 응어리져 있다면 억측일까. 산티 씨의 경험이다.“어린 시절부터 학살을 보면서 자랐어요. 군인들이 때리고, 욕하고. 군인들이 집에 와서 오늘 너희들 일할 것 있으니 공부하러 학교 가지마 그럼 못 갔어요. 한두 달동안 학교에 갇혀 지내며 군인들이 시키는 일을 해야 했어요. 불교 믿는다고 하면 이슬람으로 바꾸라고 요구했고, 돈 물건 다 뺏어갔어요.”그의 몸엔 아직도 상흔이 남아 있다. 팔다리에 깊게 패인 흉은 그가 살아온 세월이 어떤 것이었는지 금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살면서 겪은 ‘학살의 공포’는 직접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는 게 산티 씨의 견해다. 마치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할머니가 “나 산 건 다 말로 못한다”며 눈물을 훔치듯 그의 얼굴에도 인고의 세월이 묻어난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1997년 12월 2일. 25년 이상 지속된 ‘혈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줌마인들의 정당인 PCJSS와 방글라데시 정부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때 해외에서 자치권 획득투쟁을 하던 PCJSS 활동가들은 이 소식을 듣고 반색하며 총을 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정부는 PCJSS와 줌마인들이 요구한 핵심 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형식적인 ‘지역 자치구’를 만들라고 제안했다. 이 안은 줌마인들이 받아들 수 없는 안이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독립을 그토록 외쳤건만 PCJSS 역시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연합민중민주전선(united peoples democratic front 이하 UPDF)을 만들었고, 전세계 각지에 지부를 조직해 국제사회에 줌마민족의 해방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현재 활동중인 네트워크는 영국,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한국 등이다.
▲ 줌마민족네트워크 사람들. 앉아 있는 이가 산티지본 차크마 대표평화협정을 맺긴 했지만 줌마인들에게 평화는 오지 않았다. 2001년 5월 18일 군의 지원을 받은 정착민들은 디기날라 학살을 일으켜 줌마인 여러 명을 죽였다. 고문, 불법체포, 강제 재산몰수, 성폭행 등은 CHT 안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인권탄압이다. 로넬 씨의 말을 들어보자.“65만 줌마인 중 50%가 감옥에 구금된 경험이 있다. 직접 학살을 목격하기도 했다. 뱅갈리 민족처럼 자유롭게 대학에 갈 수 없다. CHT에는 학교나 학원이 거의 없어 문맹률이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적 시설도 없다. 모든 시설을 군인들이 관리하기 때문에 개발할 수도 없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CHT의 낙후한 현실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고 원조를 받는다. 그러나 그 혜택이 줌마인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허락없이 CHT 지역에 외국인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거다. 몇차례에 걸쳐 첩첩이 둘러싼 군인이 ‘통과!’를 알리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 1개월 전 방글라데시 신문은 한 이탈리아 기자가 여행비자로 CHT에 들어갔다가 군대로부터 구금됐다고 보도했다. 이유는 그가 방글라데시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정도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뱅갈리인 중에도 줌마인에게 인간답게 살 권리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국제사회가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풀어줬으면 좋겠다. 한국 정부도 외면하지 말아달라.”국제사회에 수차례 호소한 바 있는 그들은 방글라데시 정부에 몇가지 요구사항을 내걸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CHT 자치권(full autonomy)을 요구한다. 군대와 뱅갈리 정착민은 CHT를 떠나야 한다. 줌마인의 땅을 돌려달라.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줌마난민 문제를 해결하라. UPDF 활동을 보장하라. 줌마인에게 진정한 평화를 보장하라.
뱅갈리 사람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그들은 지금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고 있다. 자동차 부품공장, 콘테이너 박스 공장, 플라스틱 앨범공장 등에서 평균 100만 원 정도 월급을 받고 있다. CHT에서는 존경받는 운동가들이지만 한국에서는 여느 이주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일하는 것에 불만이 없다. 오히려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다며 ‘요즘 월급 떼먹는 사장님은 없다’고 웃는다. 다만 동일임금 받으며 한국사람은 8시간 일하고, 외국사람은 11시간 일하는 불평등한 현실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좋아질 거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 |
| ▲ 원하는 삶에 대한 상징적인 문구를 벽에 붙여놓고 있다 |
| |
도대체 어디서 이런 여유가 나오는 것일까. 처참한 학살을 반복적으로 겪은 그들 아닌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을 턱이 있나. 그러나 그들에겐 차 한잔, 과일 한 조각에도 정성을 쏟는 ‘삶과 사람’에 대한 겸허한 자세가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그토록 맑은 이유도 거기 있는 모양이다.그들은 한국 NGO들과 연대해 줌마민족의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법무부에 낸 정치적 난민신청이 가급적 빠른 기일 안에 통과됐으면 좋겠고,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며 ‘민주 자치권 운동’의 정당성도 획득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끝으로 그들에게 왜 태극기를 걸어두었느냐고 물었다. 9인의 운동가 얘기를 종합하면 이렇다.“우리는 한국 법을 믿고 한국 정부를 인정하며 한국이 도와줄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태극기를 걸었다. 우리는 CHT의 자치권이 획득되면 내일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영원히 한국에 살기 위해 난민신청을 한 게 아니다. 뱅갈리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방글라데시 정부다. 줌마인들의 인권회복과 자치권 획득을 위해국제사회가 움직이도록 한국NGO가 도와줬으면 좋겠다.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방글라데시 총 인구의 1%도 안 되는 줌마인을 도와 줄 사람은 바로 여러분이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trackback/795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