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7 투쟁, 그건 구국투쟁이었어'
2003/2003년 02월 :
2003/02/06 00:00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2 · 7 구국투쟁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할 말 없다.”
“이 개새끼. 끝까지 악질이구만. 좋다. 사격준비!”
찰칵,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빗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따갑게 부딪치는 세찬 빗방울과 소리를 느낄 뿐이었다. 이제 죽는 것인가.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는 것인가. 살아나기 위해 당과 인민을 배신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망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억울했다. (…)
“발사!”
(『빨치산의 딸』 중에서)
“벌써 다 죽었제”
그를 놓칠 뻔했다. 뒷짐진 손에 들린 신문 한 부. 그게 아니었다면 절대 그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을 찾았다. 지하철 4호선 상계역. 백발이 성성한 분들에게 그가 아니냐고 여러 차례 묻고 있었다. 신문을 들고 있겠다고 했다. 휴대전화가 없는 자신을 그걸 보고 찾으라 했다. 순간 지나가는 신문,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신문은 보였지만, 백발 노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 죽었불었제. 구례뿐 아니라 전남 전체로도. 그때 간부직에 있던 사람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여. 없어요. 다 죽었불고. 감옥에서 6·25때 학살돼 불고, 또 인자 중간에 어정쩡하게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도 경찰이 후퇴하면서 싸그리 다 죽였불고, 야튼 6·25 후에 입산했던 사람들이나, 자수하고 나와서 살던 사람들, 잽혀 가꼬 징역 살고 나온 사람들, 그 사람들도 늙어 죽고 뭐하고 해서 다 죽었어요. 그러큼 다 완전히 말살 당해부렀으니까.”
염색을 했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를 못 알아봤던 건 머리만 검어서가 아니었다. ‘76세’인 그는 너무 젊었다. 역사에 지지 않았듯 세월에도 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1948년 ‘2·7구국투쟁’, 그 한 가운데를 살았던 사람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생존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여순사건과 빨치산 활동, 민간인 학살과 6·25 등 역사의 격랑은 사람을 남겨 놓지 않았다.
포기 상태에서 가까스로 연결된 사람, 정운창. 1928년생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유명인사였다. 1990년 출판돼 출판사 대표를 구속으로 몰아넣고, 작가에게도 심한 고초를 안겨 주었던 소설, 『빨치산의 딸』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작가 정지아는 그의 딸이다. 남로당 활동, 체포, 사형언도, 반복되는 투옥과 출옥 등, 해방 직후부터 70년대 말까지 한 시도 편했던 적 없는 그의 인생. 2·7구국투쟁은 험난했던 그 삶의 서막과도 같았다.
“남한 단독정부가 서면 바로 분단이여”
격동의 시기였다.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고, 희망의 시기이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분할 점령된 남북이 이젠 하나가 돼야 할 때였다. 하지만 상황 전개는 그렇지 못했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45년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한국 민중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권한은 없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기도 전에 미국은 남한 단독선거를 추진하고 있었다. 단독정부 수립, 그건 남북의 영구 분단을 의미했다. 자연히 단독선거 반대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주도세력은 좌익이었고, 그 세력은 남로당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그때 인자 한국의 사회단체라는 것이 여러 개 있었지마는 주로 그것을 이끌었던 것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고, 약해서 ‘민전’이라고 했어요. 이강국 씨가 민전 사무국장이었어요. 거기서 인자 모든 사회단체들을 총 결집해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했고, 또 원래는 해방 후에 남조선의 정당이라는 것이 우후죽순처럼 굉장히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 중에 조선공산당하고, 여운형 씨가 이끄는 조선인민당, 또 김두봉 씨가 조직했던 인민공화당, 결국 이 세 당이 합당이라는 걸 해 가지고 남조선노동당으로 단일화됐어. 그것이 1947년 12월이라고.”
이즈음 미군정과 경찰은 좌익에 대한 탄압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좌익 인사를 대량 검거했고, 민전, 남로당, 전평, 전농 등 좌익 단체 사무소를 폐쇄했다. 좌익계 언론에도 철퇴를 가했다. 정운창 씨가 살던 전남 구례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7년초 미군과 경찰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관청에는 친일관리들이 되돌아왔다. 당시 그는 철도노동자로 노조활동을 하고 있었다. 남로당에 가입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1947년 12월 16일날 남로당에 입당했어요. 그 전부터는 순천 철도노조 구례구역 분소장 활동을 하고 있었고. 내가 잽혀서 조사 받을 때 조서에는 구례군당 입당일이 48년 4월 16일로 돼 있어. 하지마는 순천 철도노조에 있으면서 노조 내 남로당 세포로 입당한 것은 47년 11월 16일이었제.”
탄압이 점점 거세졌다. 남로당은 전술 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48년 대중정당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핵심으로 하는 전위당으로 전환했다. 봉기, 유격투쟁, 프락치 활동도 강화했다. 그리고 미국의 단독정부 수립 계획. 막아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48년 2월 26일, 마침내 미국 주도 하에 UN은 남한 단독선거를 결의했다. ‘미소 양군 동시철수’와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남로당의 당위적 구호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좀더 공세적인 대응이 필요했다. “단선·단정(單選·單政)반대, 미제국주의 타도!” 남로당은 전국 동시 투쟁령을 내렸다. 2월 7일의 일이었다.
“2월 8일, 봉화를 올렸어”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방직노동자, 철도노동자, 부두노동자 등 직종이 따로 없었다. 인천에서는 부두노동자와 학생, 사무원, 시민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 탱크와 군함이 출동하기도 했다. 구례도 조용할 수 없었다.
“구례군 같은 경우는 지령이 조금 늦어 가지고 2월 8일날 투쟁을 시작했제. 그렁께 인자 구례에서는 2·8구국투쟁이라고 하지. 그래 그 때 투쟁 목표가 뭐이냐 하믄 미국의 단독정부 수립 음모, 식민지 영구화 음모 등을 인쇄물로 벽에 써 붙이고 삐라도 만들어서 뿌리고, 인자 봉화투쟁이라는 것을 했어. 조선시대 때는 봉화가 연락 수단이었잖아. 근데 해방 후에 우리는 그걸 가지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한 거죠. 한 개 면에 10군데 이상씩 경찰서나 행정관청에 가장 가까운 산봉우리에다가 밤 9시부터 봉화를 막 올렸어. 낮에 미리 가서 나무를 준비해 가꼬 산에다가 봉화를 올리면서 기냥 징이나 이런 걸로 풍물 뚜디리믄서 하고, 또 그날 저녁에는 어느 부락이고 할 것 없이 벽보를 싹 붙였어.”
철도노동자였던 그는 이때 철도 파괴를 시도했다. 선로에 박은 못을 빼고 선로를 들어냈다. 기차가 못 다니게 할 작정이었다. 지리산 인근에서 숨어 지내던 조선공산당원들이 주민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는 등, 구례는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지역이었다. 2월 8일 투쟁에도 구례군민들은 환영이 대단했다.
“우리 면 겉은 경우는 왜정 때 면장이나 뭐 그런 거 한 사람들이 우익에 가담한 일이 몇 있었제. 왜정 때 지주였던 사람이 왜 자기 머슴을 혹사했잖아요. 그러니까 감정이 나쁜 디다가, 우리가 인자 투쟁을 전개하니께 거의 90% 이상이 우리를 지지했어요. 우리가 숨어 댕길 때는 가믄 밥도 해주고 식량도 주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자금을 좀 내라 하믄 자금도 내고. 정치란 건 그 사회에서도 돈이 없으믄 안 돼. 그런디 당비를 받을라고 하믄 열성당원들은 보리 한 되, 쌀 한 되 이렇게 내서 당비를 내는디, 고것도 숨어 댕기는 사람들 밥해 먹고 할 정도밖에는 안 돼. 그래 자금을 각 면에다 할당을 했어. 우리 문청면에다가는 어찌해서라도 5만원만 해내라. 그러믄 인자 유지들한테 쫓아가서 통일사업 좀 도와주시오, 하믄 100% 했어요. 나중에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는 무서워서 못 했지만.”
구례군 참여 인원만 수천에 이르렀다.
“삐라 붙이고 봉화투쟁하고 하는디 몇 천 명은 동원됐제. 군에서 삐라 한 번 붙일라고 한 면에서 2명씩만 동원해도 시무 명은 가야 허고. 봉화투쟁도 봉화하나 올릴라믄 오후에 산에 가서 나무해서 달집 맹그로 만들고, 또 뭐 풍물까지 와서 뚜디리고 뭣 하고 하믄 한 열댓 명에서 한 시무 명씩은 가요. 그러니께 한 5천 명도 더 동원됐을 거예요. 우리 면에도 고등학생들이 몇 있어 가지고 가들한테도 과업을 줘서 쓰게 하고, 인자 가들이 삐라 뿌리는 디 나서고 했을 정돈께,”
우릴 잡으려고 눈이 뻘갰지
놀라고 있지만은 않았다. 경찰과 당국은 즉각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총동원 인원 147만7117명에 사망 57명, 피검자 1만834명. 투쟁이 시작된 지 불과 3일간의 통계치였다. 2월 9일 아침, 구례도 발칵 뒤집혔다.
“우리 구례군 겉은 경우는 100% 당 지시를 수행혔제. 아 그렁께 이틑날부터 구례군 골목골목에 삐라가 뿌려져 있고 모퉁이마다 벽보가 다 붙어있고, 봉화가 막 일어나고 난리가 나니까, 이거 주동자들 색출할라고 사찰과 아들이 기냥 눈이 빌갷제. 즈그들은 즈그들대로 자금 뿌려 가꼬 밀고꾼을 부락마다 박아요. 그러큼 해서 한 사람이 만약 잽히믄 이 사람들 가지고 고문하믄서 요놈들이 또 회유하는 거예요. 느그 동네에 딴 놈들 있으믄 불어라. 그러믄 느그들은 내 보내 주마. 이러큼 해서 조직이 5·10 선거 뒤로는 거의 깨지다시피 했제. 군당과 면당은 괜찮았는데 부락세포가 많이 깨졌죠. 상부조직은 거의가 다 수배자들이예요. 그러니께 눈이 다 삘게 가꼬 다 잡을라꼬 돌아댕겼죠. 일단 잡으믄 구류 때리고 두드려 패고 이러큼 했제. 그래 가지고 뭔 법으로 처벌했냐 하믄 미국 군정 포고령하고, 또 법령 2호라는 게 있었어. 47년부터 아마 적용돼 가지고 정부를 비난한다든지 공산주의에 협조한다든지 또는 도로를 파괴한다든지 전선를 절단한다든지 또 삐라를 뿌린다든지 요런 거 하는 것이 전부가 다 해당이 돼요. 그런디 그 법은 징역을 줄 수가 없었어요. 경찰서에서는 ‘구류 29일에 벌금 1만원 미만’ 이러큼 해서 잡아가요. 그 때 경찰에 서북청년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놈들이 고문을 막, 일본놈들 못지 않게 고문하고 29일씩 구류 살려서 내보내고, 그 다음에 또 잡아다가 재차 그 법을 적용해서 또 처분하고, 이걸 반복혔제.”
그러나 투쟁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2월 7일에서 10일 사이에 집중됐던 1차 투쟁 이후, 좀더 무장된 형태의 2차 투쟁이 2월 25일부터 3월 5일 사이에 벌어졌다.
“2월 9일 이후에 체포되면서도 계속했죠. 계속했어요. 우리 구례군당에서는 오르그(공작지도원)나 이런 사람들은 당세 확장, 당원 모집, 그리고 인자 삐라 붙이고 벽보 붙이는 투쟁, 봉화투쟁 주로 이런 거 중심으로 했죠. 그렇게 계속 했었지. 48년 3·1절 기념행사 때는 현장에서 죽은 사람이 둘이나 됐제. 3·1절 기념대회라고 해 가지고 구례읍에서는 사람이 한 5천여 명 모였어요. 그래 가지고 선정선동 연설 듣고, 시가행진을 할려고 했는디 경찰이 막아서 이제 시가행진을 못했고, 대회만 하고 해산했어. 이제 그 토지국민학교에서 박지대 선생이 토지 사람들 모아 가지고 시위를 하다가 사람들이 학교 밖으로 나올라고 하니까 경찰이 쏴 버렸어. 그때 그 선생이 죽은 거야. 또 수배 당해서 숨어 댕기다가 서라고 했는디 안 서고 도망가니께 총 맞아 죽은 사람도 있고. 여럿 죽었어요.”
2월 7일 당시처럼 전국 동시다발적인 투쟁은 아니었지만 산발적인 단선·단정반대운동은 여기저기서 계속됐다. 투쟁은 그치지 않았고 결국 5·10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경찰은 선거인등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대리등록과 유령등록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서울의 경우 통반장, 경찰, 테러단이 합세해서 등록 거부자는 유령인구로 간주, 쌀표를 압수한다거나 적색분자라며 협박했다. 등록 안 하면 동회에 잡아다 구타한다고 공갈을 치기도 했다.
5월 8일 전평 산하 노조의 총파업을 비롯, 각급 학교의 동맹휴업이 시작됐다. 전국 각지에서도 전신, 전화, 철도, 교량 파괴에, 경찰서 습격이 이어졌다. 사흘 동안 사망자는 경찰 및 우익인사 48명, 좌익측 인사 31명에 달했다. 5월 8일에는 미군이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특별경계령을 내려 미국인은 무기를 휴대하고 순찰대는 무장토록 하는가 하면, 투표를 ‘적당히 실시키 위해 미군대와 420명의 미민간인 직원이 투표장 부근을 순행하도록’ 했다. 구례에서도 선거 강요가 이어졌다.
“경찰놈들이 부락에 와서 총 들고 강제로 투표시켰제. 아 그렁께 경찰이 이쪽 부락에서 투표시키믄, 우리는 또 저쪽 부락에 가서 투표하러 가는 사람들 산으로 쫓아 불고 그랬어. 그놈들은 면서기들 배치하믄서 최소한도 50%를 이상을 시키라 했는데, 그때 구례군에서는 30% 정도 밖에 투표 안 했어.”
“형극의 역사를 살았제”
그가 처음으로 검거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48년 5월 3일, 전남도당 오르그, 구례군책 장성수 등 그를 포함한 핵심 책임자들이 5·10단선·단정반대투쟁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경찰이 들이닥쳤다. 며칠 전인 4월 28일 독립촉성국민회 요인들을 살해한 혐의였다. 혹독한 고문이 시작됐다.
“지독했제. 우리 때는 인자 전기고문을 양쪽 손가락에다가 마이너스 플러스 선을 쪼매 놓고 빠떼리를 돌리는 거여. 기절을 해야 그놈들이 스톱을 시켜. 그런데 실질적으로 몸에 해로운 것은 몽둥이 고문이 제일 무서워요. 패는 거. 그냥 그것도 처음에 맞을 때는 괜찮은데, 오늘 맞고 내일 와서 또 맞으믄 그게 처음에는 맞은 데가 파랗게 핏줄만 서는디 그 다음부터는 까매져요. 인자 엉덩이나 무르팍 같은데 곡괭이 자루 같은 걸로 패는 거요. 그 다음이 물고문. 주전자에 고치까리 타서 코에 대고 붓는 거. 그 다음이 인자 손톱 발톱 밑에 그 뭐시냐 대를 쪼개서 말이여, 대침을 만들어 가지고 때려 박는 거. 이런 고문을 그 때 받았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는 총살대 앞에 서게 된다.
“8월 14일인가, 15일인가에 태풍이 불어서 비가 막 굉장히 쏟아지는디 뭐시냐 이북에서 온 경찰놈들, 이놈들이 우리를 차에다 싣고 어디로 가는디, 구덩이를 파 놨어. 우리 매장할 구덩이를. 그 앞에다 세워 놓고 ‘지금이라도 좋다. 한 자리만이라도 불어라. 그러믄 너희는 살려주마’ 이러큼 회유하잖아요. 우리 잽혀 간 사람들이 다 그 회유에 넘어가겠습니까. 그래 그 때 그놈들이 공포만 쏘고 그랬제. 즈그들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었거든. 부인하는데 뭣으로 죽일 것이여. 그래도 그 나는 좀 괜찮았는디 군책임자는 고문 따문에 병신이 되어불고. 그래 인자 석방됐는디, 뒤에 얼마 안 돼서 10월 19일날 여순반란사건이 나서 입산을 했죠. 다 산에 올라가서 유격투쟁에 참여를 했지.”
그러나 결국 남한 단독선거는 실시됐다. 단독정부도 수립됐다.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2·7구국투쟁은 제주 4·3항쟁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도는 결국 총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50여 년 후, 이젠 투쟁도 끝났다. 분단된 땅덩이만 남았다. 그는 아직 살아 있고, 기억은 끊임없이 과거를 향한다.
2·7과 5·10투쟁이 끝난 후, 그에겐 더 길고 힘겨운 투쟁이 남아 있었다. 군당 지도원 생활을 했고, 산을 탔으며, 빨치산이 됐다. 수감생활을 두 번 더 했다. 사형언도도 받았다. 일흔여섯 인생, 역사는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힘들었다. 그의 가족 전체가 그랬다.
“여순사건 때 빨갱이 부역했다고 아버지가 학살됐어. 내가 산에 올라가면서는 가족들이 인자 다 친척집으로 뿔뿔히 흩어졌고. 살림살이고 뭐이고 집구석 싹 몰수 당했불고, 집도 경찰들이 와가꼬 싹 불로 꼬실리뿔고. 어머니는 외가집 가서 동생들 데리고 살고 동생들 서이는 거의 강제로 외국으로 나가부렀어. 누이들이 서이나 되는디 좋은 데로 시집하나 못 보냈고. 또 뭐이냐 연좌제로 내 조카가 헌병학교에 입교했다가 도로 빠꾸 되뿔고, 또 생질놈 하나가 육사에 합격해 놓고도 취소되고. 젤로 미안한 게 내 딸 지아여. 아버지를 모르고 컸제. 피해를 많이 봤어…. 나 땜에.”
요즘 그는 구례에 땅을 빌려 밤농사를 짓고 있다. 재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해 뇌진탕을 입은 이후로 농사일도 쉽지 않다. 정부지원금 25만3000원, 경로의연금 두 사람분 9만6000원. 1종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 두 내외의 생활비다. 서울 딸네 집에 잠시 다니러 온 내외는 다음 날 구례로 다시 내려간다고 했다. “형극의 역사를 살았다”고 말하는 정운창 씨. 그는 날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내내 궁금하고 불안했다. 말라리아 때문이다. 출감 후에 약을 과다 복용해 눈이 사시가 됐다고 한다. 약간, 아주 조금 내 얼굴을 비껴가는 그의 눈동자는, 자신의 시선과 함께 비껴갔던 그 역사, 그것만은 똑바로 보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잠시 후, 그는 484번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강사 생활을 하는 딸을 대신해 손자를 데리러 가는 길이다.
“지아 아들이야. 지금 돌 지나고 4달 지났어. 지아가 시집을 안 가다가 재작년에 시집을 갔어. 그래 놀이방에 아침 8시에 데꼬 가고 저녁 7시에 데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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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합의한다 너에 이다. 그것은 이렇게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