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것들
2003/2003년 02월 :
2003/02/06 00:00
'이제 우리가 주류다.”
‘비트 세계’의 『딴지일보』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형성된 30대의 자신감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이에 반해 ‘아톰 세계’의 『중앙일보』는 ‘갑작스러운 주도권 상실에 충격’이라는 제하에 50대가 느끼는 열패감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세대는 이제 시대의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다.
전에 모시던 사장님은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래방에 가면 항상 그 달의 최신곡을 뽑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는 시대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신곡을 모은 CD를 늘 차안에서 듣는다고 했다. 애처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것이 성공을 위한 몸부림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와의 대화를 위한 그만의 노력이라고 믿었다.
장강의 앞물은 뒷물에 밀려 황해에 이른다. 한 시대의 가장 선진적인 상상력은 젊은이들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기성 세대에게 있어 새로운 세대와의 교감은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사회 근대화의 주력이었던 50대의 리더십은 이제 상당한 곤경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제일 존경한다는 박정희의 근대화 신화, 미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 생존 경쟁의 무한질주, 공동체에 대한 ‘자기비하적’ 평가, 목표의 성취 수단으로 묵인되었던 부정과 비리, 그리고 탐욕의 사슬…. 오십 평생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던 이 모든 것들이 그 의미를 잃고 물거품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진정으로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패배감보다, 그들이 이루어놓은 세상에서 자라난 신진 세대와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30대 과장의 눈에 비친 20대
새롭게 부상하는 30∼40대의 자신감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기성 세대가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질서에 익숙해 있다면, 반대로 이들은 공동체의 가치와 위력을 체험한 세대다. 사회적 책무와 개인 욕망의 긴장관계를 잘 다스리는 법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이번에 보인 30대의 사회적 파워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는다. 하지만 이들 앞에는 신구(新舊)를 아우르는 소통을 이뤄야 한다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이들도 기성세대가 될 것이고, 신진들에게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랴, 시대는 그렇게 새로운 기운으로 채워져 가는 법이다. 그 때 자신들을 딛고 올라서는 새로운 세대를 대견스런 눈빛으로 지켜볼 수 있는 넉넉한 기성세대가 되려면 지금부터 세대적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윗세대는 굳어있고, 젊은 세대는 가볍다는, 그래서 자신의 세대가 가장 지혜롭고 실력 있다는 오만함은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로막는다.
30대의 중간 관리자들은 20대와 일하는 것이 녹록치 않다고 불평한다. 하긴 지금의 20대는 쉽게 해독되지 않는 존재들로 보인다. 그들은 기성 질서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의존적이다. 그들은 권위를 불편해 하지만, 자율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리는 것을 고리타분해 하면서도, 성공에 대한 집착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지금 30대인 나와 다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직장 새내기였던 20대의 나의 모습도 당시 30대 과장들의 눈에는 독해 불가능하게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대표이사 앞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업무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이틀 밤을 꼴딱 새웠다는 이유를 대며 하루를 무단 결근하면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냐며 오히려 대드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20대의 미숙함과 불안함은 그들의 세대적 원죄가 아니라 그 나이의 모습일 뿐이다. 그들이 안겨주는 단절감은 그들의 탓이 아니라 다른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하는 자연사적 차이일 뿐이다. 세대적 경험의 단절이 주는 낯설음은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오히려 풍부한 소통을 촉진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나의 인생에도 용기가 필요해!
나는 20대에 대해 지금의 30대와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달라서 낯선 세대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 그들에게 한걸음 다가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그 내면을 탐지하고, 그리고 내 작은 깨달음과 의문들을 겸손하게 전송하기로 한다. 소통의 가능성은 그 자리에서 싹틀 것이다.
지난 월드컵 때의 기억이다. 이탈리아와의 16강 경기 후반 40분이 넘어가자 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굳어버린 버릇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니 아름답게 지는 것을 담담하게 인정하자. 하지만 혼신의 몸부림으로 경기장을 누비는 선수들이나 목이 터져라 그들을 응원하는 ‘새로운’ 세대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패배에 대한 인정이야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뒤에도 늦지 않건만, 혹여 그 허망함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영악함 때문인지 지레 포기하는데 익숙해져 있던 나였다. 후반 43분 설기현 선수의 골이 이탈리아의 그물을 갈랐을 때, 나는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그리고 다짐했다. 너무 쉽게 패배를 인정하는 못된 습관에 빠져버린 낡은 나를 버리고, 불굴의 투지로 승리만을 향해 달려가는 새로운 그들을 찬미하리라.
내보일 것 하나 없는 나의 인생에도 용기는 필요해
내가 9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20대였듯이, 자우림의 노래 ‘팬이야’를 멋들어지게 뽑아내는 그들은 새로운 천년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20대인 것이다.
하나의 시대는 결국 여러 세대의 합작품이다. 회사나 사회나 여러 세대간의 소통이 얼마나 매끄럽게 이루어지느냐에 그 미래가 달려 있는 것 아닐까?
‘비트 세계’의 『딴지일보』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형성된 30대의 자신감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이에 반해 ‘아톰 세계’의 『중앙일보』는 ‘갑작스러운 주도권 상실에 충격’이라는 제하에 50대가 느끼는 열패감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세대는 이제 시대의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다.
전에 모시던 사장님은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래방에 가면 항상 그 달의 최신곡을 뽑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는 시대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신곡을 모은 CD를 늘 차안에서 듣는다고 했다. 애처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것이 성공을 위한 몸부림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와의 대화를 위한 그만의 노력이라고 믿었다.
장강의 앞물은 뒷물에 밀려 황해에 이른다. 한 시대의 가장 선진적인 상상력은 젊은이들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기성 세대에게 있어 새로운 세대와의 교감은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사회 근대화의 주력이었던 50대의 리더십은 이제 상당한 곤경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제일 존경한다는 박정희의 근대화 신화, 미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 생존 경쟁의 무한질주, 공동체에 대한 ‘자기비하적’ 평가, 목표의 성취 수단으로 묵인되었던 부정과 비리, 그리고 탐욕의 사슬…. 오십 평생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던 이 모든 것들이 그 의미를 잃고 물거품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진정으로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패배감보다, 그들이 이루어놓은 세상에서 자라난 신진 세대와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30대 과장의 눈에 비친 20대
새롭게 부상하는 30∼40대의 자신감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기성 세대가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질서에 익숙해 있다면, 반대로 이들은 공동체의 가치와 위력을 체험한 세대다. 사회적 책무와 개인 욕망의 긴장관계를 잘 다스리는 법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이번에 보인 30대의 사회적 파워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는다. 하지만 이들 앞에는 신구(新舊)를 아우르는 소통을 이뤄야 한다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이들도 기성세대가 될 것이고, 신진들에게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랴, 시대는 그렇게 새로운 기운으로 채워져 가는 법이다. 그 때 자신들을 딛고 올라서는 새로운 세대를 대견스런 눈빛으로 지켜볼 수 있는 넉넉한 기성세대가 되려면 지금부터 세대적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윗세대는 굳어있고, 젊은 세대는 가볍다는, 그래서 자신의 세대가 가장 지혜롭고 실력 있다는 오만함은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로막는다.
30대의 중간 관리자들은 20대와 일하는 것이 녹록치 않다고 불평한다. 하긴 지금의 20대는 쉽게 해독되지 않는 존재들로 보인다. 그들은 기성 질서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의존적이다. 그들은 권위를 불편해 하지만, 자율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리는 것을 고리타분해 하면서도, 성공에 대한 집착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지금 30대인 나와 다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직장 새내기였던 20대의 나의 모습도 당시 30대 과장들의 눈에는 독해 불가능하게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대표이사 앞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업무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이틀 밤을 꼴딱 새웠다는 이유를 대며 하루를 무단 결근하면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냐며 오히려 대드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20대의 미숙함과 불안함은 그들의 세대적 원죄가 아니라 그 나이의 모습일 뿐이다. 그들이 안겨주는 단절감은 그들의 탓이 아니라 다른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하는 자연사적 차이일 뿐이다. 세대적 경험의 단절이 주는 낯설음은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오히려 풍부한 소통을 촉진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나의 인생에도 용기가 필요해!
나는 20대에 대해 지금의 30대와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달라서 낯선 세대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 그들에게 한걸음 다가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그 내면을 탐지하고, 그리고 내 작은 깨달음과 의문들을 겸손하게 전송하기로 한다. 소통의 가능성은 그 자리에서 싹틀 것이다.
지난 월드컵 때의 기억이다. 이탈리아와의 16강 경기 후반 40분이 넘어가자 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굳어버린 버릇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니 아름답게 지는 것을 담담하게 인정하자. 하지만 혼신의 몸부림으로 경기장을 누비는 선수들이나 목이 터져라 그들을 응원하는 ‘새로운’ 세대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패배에 대한 인정이야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뒤에도 늦지 않건만, 혹여 그 허망함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영악함 때문인지 지레 포기하는데 익숙해져 있던 나였다. 후반 43분 설기현 선수의 골이 이탈리아의 그물을 갈랐을 때, 나는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그리고 다짐했다. 너무 쉽게 패배를 인정하는 못된 습관에 빠져버린 낡은 나를 버리고, 불굴의 투지로 승리만을 향해 달려가는 새로운 그들을 찬미하리라.
내보일 것 하나 없는 나의 인생에도 용기는 필요해
내가 9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20대였듯이, 자우림의 노래 ‘팬이야’를 멋들어지게 뽑아내는 그들은 새로운 천년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20대인 것이다.
하나의 시대는 결국 여러 세대의 합작품이다. 회사나 사회나 여러 세대간의 소통이 얼마나 매끄럽게 이루어지느냐에 그 미래가 달려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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