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대로 배우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고등학교 때 배웠던 국사 교과서는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씌어진 것이었다. 영·정조 이후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던 조선 사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지 않았더라면 정상적인 자본주의 근대를 성취할 수 있었을 텐데,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왜곡되고 기형적인 근대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시각이 암암리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고등학교에서 배운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교과서에 실린 그런 시각은 현실감 없이 그저 모호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깨달은 것은 대학에 가서 선후배들 사이에서 유물사관에 대한 책 몇 권이나마 떠들어 보고 나서였다.

그래서, 아직 87년의 잔광(殘光)이 사라지지 않았던 마지막 한 해, 89년에 우리는 모두 유토피아주의자였다. 우리는 외세가 아닌 내부 투쟁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체되는 ‘정상적인 근대’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었고, ‘정상적인 근대’에서 발전하면 사회주의 국가로 수월히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정상적인 근대’를 빼앗아간 일본과 미국을 혐오했다. 상황만 달랐다면 삼국-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정체성과 근대를 공존시킬 수 있었다는 믿음, 존재하지도 않았던 정상적인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우리 관념 속의 그 길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유토피아, 즉 어디에도 없는 땅이었던 것이다.

정의상 발전할 수 없는 세계, 유토피아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2000년, 마이크 레스닉의 SF 소설 『키리냐가』를 읽었다. 『키리냐가』의 설정은, 마치 10여 년 전 우리가 가졌던 믿음에 소설의 옷을 입혀 세워놓은 것 같다. 서기 2123년, 일단의 케냐인들이 유럽인들의 근대를 부정하고 키쿠유 족의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인공 행성으로 떠난다. 이 키쿠유 족의 주술사 ‘문두무구’인 코리바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이다. 코리바가 꿈꾸는 세계는 키쿠유 정체성에 충실한 전통의 세계이다. ‘케냐인’이 아닌 키쿠유 족의 세계, 근대 이전의 세계가 키쿠유 족의 유토피아라고 믿는 것이다. 그는 이 세계의 이름을 ‘키리냐가’, 빛의 산이라고 짓는다. 키리냐가는 케냐 산의 키쿠유식 이름이다. 코리바는 지구의 ‘유지 위원회’와 연결된 컴퓨터로 키리냐가의 기후를 조절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키쿠유 족의 이야기들을 전승하며, 부족에 문제가 일어나면 재판관 노릇을 한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안팎에서 도전을 받는다. 소수 종족 문화 보호 차원에서 인공 행성에 키쿠유 족의 유토피아를 허가한 ‘유지 위원회’가 보기에는 발부터 나온 갓난아이를 저주받은 마귀로 보고 죽이는 키쿠유 족의 관습은 소수 종족의 문화이기 이전에 보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키쿠유 족의 생활과 정체성을 동경해서 온 부부 이주자는 그저 다른 생활 양식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으로 키쿠유 족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다른 생활 양식에 대한 모방의 욕망과 질시는 키리냐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다.

바깥으로부터 온 문제들은 오히려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안에서 발생한다.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교육받고 싶은 열망이 큰 아이 카마리는 단지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문두무구가 될 수 없고, 여자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을 수 없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키쿠유 족의 전통을 지키는 유토피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지구로 떠나 배움의 길을 걸을 것을 권유하는 코리바에게 카마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전 키리냐가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이 사람들이 제 동족이고요. 전 키쿠유 족 여자아이지 마사이족 여자아이도, 유럽 여자아이도 아니에요. 전 제 남편의 아이들을 기를 거고, 남편의 ‘샴바’를 갈 거예요. 남편을 위해 땔감을 모아 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고, 옷을 짜줄 거예요. 전 부모님의 ‘샴바’를 떠나 남편의 가족과 살 거라고요. 전 불만 없이 이 모든 일을 해낼 거예요, 코리바 할아버지. 제게 단지 읽고 쓰는 걸 배우도록 허락만 해주신다면요!” 배울 수도, 떠날 수도 없었던 카마리는 결국 자살의 길을 택한다. 패기 있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정체된 유토피아에 반기를 든다. 적도 없고 극복해야 할 곤란도 없는 생활 속에서 젊은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는다. 사람들은 도구를 개선하는 법을 생각해 낸다. 키쿠유 족의 전통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유럽 인들의 근대로 진입한다고 생각하는 코리바에게 이 변화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정의상 발전할 수 없는 세계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기 때문에 발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키리냐가는 붕괴된다. 바깥의 적 때문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 때문에. 코리바의 유토피아는 다른 키쿠유 족에게는 유토피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인공적으로 건설된 낙원은 결국 붕괴되고, 코리바는 쓸쓸히 키리냐가를 떠나 지구로 돌아온다.

포기할 수 없는 유토피아의 꿈

물론 이 소설이 흠잡을 데 없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의 발전을 현존하는 근대의 틀 이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서구 작가의 한계도 엿보이고, 한 종족을 이끌어온 문화의 힘은 그렇게 쉽게 붕괴하지 않을 것이며 한 사회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쉽사리 발전의 필요성을 느끼거나 발전에 찬성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상황의 전개가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근대 안에 살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근대를 극복할 틈을 엿보고 있는 우리, 역사상의 거대한 유토피아 실험을 목격하고 그것이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우리로서는 이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번민을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없다.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토피아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 딜레마는 코리바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유토피아를 “증상이 없는 보편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믿음”이라고 정의한다.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이 없는 사회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현실화되는 순간, 그 사회는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다. 어떤 사회에고 실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갈등을 큰 타자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억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 더 나은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은 지금 여기의 우리 생활을 개선하는 강력한 동력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가 잃는 것은 더 나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인간성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칙과 현실과 아름다움이 하나되는 땅, 가능하지 않은 땅에 대한 가능한 믿음을 상실했을 때 소설 속에서 코리바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송경아 소설가
2003/02/06 00:00 2003/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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