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새 정부 출범에 맞춰 헌법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왜 지금 헌법개정이 필요한지, 어떻게 헌법을 바꿔야 하는지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첫번째 주제는 양성평등과 사회적 약자의 인권존중을 위한 헌법개정이다. 편집자주

연재순서

1. 양성평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 존중

2. 진정한 대통령제를 위하여

3. 관료, 사법의 혁신

4. 시민참여 헌법을 만들자


▲남여평등 포스터
한 여성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해 사내 동료와 결혼했다. 어느 날 회사는 구조조정을 한다더니 최우선 순위로 사내부부를 꼽았다. 명예퇴직금 지급을 전제로 회사는 이 여성에게 자진사직을 권유했다. 그는 결국 사직서를 썼다. 그 뒤 같은 은행에 계약직으로 취직한 그는 전과 같은 노동을 했지만, 급여는 반밖에 받지 못했다.

위 사례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IMF경제위기 이후 많은 직장에서 벌어졌던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사법적 구제를 포기했다. 소송을 냈다 전원 남성으로 구성된 대법원에서 패소확정 판결을 받기도 했다. 이런 사회가 양성평등 사회라고 할 수 있는가?

지금의 법체계로는 교활한 사용자가 남녀고용평등법 등의 법망을 얼마든지 피해나갈 수 있다. 여성노동자를 해고하면서 ‘여자니까 해고’라는 말 대신 둘러댈 다른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새 직원을 뽑을 때, 승진 심사를 할 때 ‘여자니까 안 된다’는 말만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상황은 소극적인 차별금지 조항의 한계를 보여준다. ‘남녀를 차별하지 말라’는 조항은 교활한 차별, 은밀하고 은폐된 차별 앞에 무력하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차별을 단칼에 없애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는 없다. 제도로서만 접근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소극적인 차별금지를 뛰어넘어 양성평등 실현을 위한 사회적 합의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다.

현행 헌법은 모든 국민은 성별에 의하여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제11조 제1항), 여성이 고용ㆍ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제32조 제4항)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으론 부족하다. 도대체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부당한 차별’이 아닌 ‘정당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국가의 최고 법규범인 헌법에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의지를 담아내야 하는 이유다.

"적극적 평등실현의무’국가에 부여해야

적극적 의지란 ‘적극적 평등실현의무’를 국가에 지우는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차별상태를 시정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여성을 우대’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림 김종범
그 핵심은 여성할당제와 같은 제도를 통해 남성위주의 사회구조에 여성이 동등한 비중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앞서 든 사례에서, 만약 은행장이 여성이었다면, 은행간부 중 반수가 여성이었다면 과연 여성을 표적으로 한 구조조정을 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대법관의 반수가 여성이었다면 여성차별적인 구조조정을 합법으로 인정했을까라는 의문도 가져본다. 또 헌법조문에 양성평등이 실현될 때까지는 여성을 우대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었더라도,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라는 상상도 해 본다.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온 집단에 대한 적극적인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여성이나 흑인에 대한 잠정적 우대조치는 미국에서 법률과 행정명령에 의해 수행되고 있고, 미 연방대법원 판례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캐나다 헌법에도 잠정적 우대조치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조항이 있다(제15조 제2항). 이러한 조치에 대해 역차별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역사적으로 누적되어 온 차별의 심각성을 망각한 형식논리이다. 여성차별은 구조적이고 관습적이며 문화적이다. 명시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남성 중심적인 합리화의 외피를 쓰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승진과 관련한 여성차별이다. 공공부문이든 민간부문이든 상급자의 근무평가가 승진 인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남성인 상급자는 근무평가를 할 때 조직과 상급자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듯한 남성에게 유리한 점수를 준다. 남성은 육아부담을 여성에게 떠넘기면서 조직과 상급자에게 충성하여 좋은 근무평가를 받는다. 반면 여성은 연장근무나 남성인 상급자와 어울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일견 여성 차별적 요소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사제도가 실제로는 남성위주의 승진을 통해 여성차별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겉으로는 여성차별과 무관한 듯한 제도나 관행이 실제로는 차별적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공무원 사회에서도 고위직이나 중간간부급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낮다. 초등학교 교장 중 여성은 7%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승진에 여성할당제를 도입해야 하고, 승진대상자들 중에서 여성을 우선 승진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평등실현조치다. 물론 지금도 비례대표 선거나 행정고시 등에 여성할당제가 도입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전체 공공부문, 나아가 공공부문이 개입할 수 있는 민간부문에 폭넓은 여성할당제가 도입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소수의 선발된(또는 선택된) 여성들만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아래에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합리의 외피를 쓴 차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헌법에 “국가는 취업, 승진, 공무 담임, 교육 등 사회적 기회 부여에 있어서 양성평등이 실현될 때까지 여성에 대해 잠정적 우대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명시적 근거를 만들 필요가 있다. 현재 여성발전기본법에 여성에 대한 잠정적 우대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 있지만, 이 규정은 “할 수 있다”에 불과하다. 이렇게 모호한 규정을 둘 수밖에 없는 이유는 헌법에 명시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헌시비 때문일 것이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서는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할당제를 실시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차별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이런 방향으로 헌법이 개정된다고 하여 양성평등이 순식간에 실현되지는 않는다. 구체적인 법률의 개정과 개정된 법률의 집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내용의 헌법개정안이 발의되기 위해서는 시민운동의 노력이 있어야 하고, 발의가 된 뒤에도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과 국민투표를 통과해야 한다. 시민운동은 여성차별에 대한 성찰과 토론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헌법개정이 좌절될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차별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헌법개정안 발의운동과 국회 안팎에서의 토론과정을 통해 여성차별에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최소한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이 양성평등정신을 마음 속에 새길 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승수 변호사
2003/02/25 00:00 2003/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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