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호지킨슨 사형폐지연맹 영국대표
2003/2003년 03월 :
2003/02/25 00:00
'한국 정부는 더 이상 사형폐지를 미루지 말라'
영국에서는 종신형을 받아 비록 감옥에서지만 살아 있을 사람이 미국에서는 죽어야 한다면? 법의 이름으로 인간을 죽이는 것이 과연 마땅한 일일까. 피터 호지킨슨 사형폐지연맹 영국 대표를 만나 의견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거구의 성악가 파바로티의 사촌쯤 되어 보이는 큰 체구의 피터 호지킨슨 박사(59세)는 다소 엄숙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그는 세계사형폐지연맹 영국대표이자 웨스트민스터 대학 부설 사형연구센터 소장이다.
한국의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그가 방한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우리(영국) 정부가 지금이 아주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한 듯 하다. 사실 그동안 한국정부는 인권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빠르게 성장해 왔다. 지난 5∼6년간 한 건의 사형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 상당한 모범이 되는 경우이다. 앞으로 큰 발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사형제도 폐지에 관해서 그동안의 경험을 나누고 싶어서 온 것이다.”
그는 런던의 보호관찰청에서 15년 동안 관찰관으로 일했다. 그런 경력이 자신을 사형폐지 운동으로 밀어갔다고 한다.
“원래 사형제도 폐지 쪽에 서 있었지만 일을 통해 그 믿음이 더 굳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65년 영국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된 이후 그전 같았으면 사형을 당했을 범죄자들도 종신형을 선고받는 것을 보았다. 그러던 중 미국 텍사스주의 교도국과 교환 프로그램이 있어 그 곳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는 여전히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기의자에 앉아 처형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영국에서는 종신형으로 살아 있을 사람이 미국에서는 죽어야 한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인지, 그 엄청난 차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진적 폐지론은 사형제도 고착화시킬 뿐
그는 사형연구센터의 소장으로 일하면서 긴 시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가야 하는지 숙고했다. 그는 전통적인 접근방식과 다른 관점을 찾고 싶었다.
“인식의 차이, 생각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세계적인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는 사형폐지에 관한 운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기구이다. 그러나 인권을 침해하는 정부들은 앰네스티의 의견을 편견으로 본다. 그래서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형폐지론자가 아니라 사형제도 연구자인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기구를 통해 희생자 보호나 대국민 홍보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사형제도를 완전히 폐지한 나라도 있지만 아직까지 집행보류로 남아있는 나라도 꽤 있다. 미성년자는 안 되고 정신질환자도 빼고. 이렇게 예외를 두면서 점진적으로 폐지로 나가겠다는 의견에 그는 단호히 반대한다.
“그런 방식이 점진적인 발전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사형제도를 고착화시킬 뿐이다. 그래서 난 타협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택하겠다는 우려할 만한 발상이며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핑계삼아 폐지를 미루고 있을 뿐이다.”
사형제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진보적이니 보수적이니 하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도 그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 하는 이분법은 이 운동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그러한 성향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사형제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문제다. 흔히 사형제도 옹호론자들을 가리켜 원시적인 사고의 소유자라고 하는 등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연구조사에서도 그런 증거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교육이나 홍보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주장이다. 왜 바꿔야 하는지 알리고 설득하는 일이 진정한 폐지로 나가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형폐지에 대한 관심이나 활동은 정부보다 민간 인권단체의 몫으로 돌리는 게 우리 현실이다. 정부는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가?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얼마나 아느냐가 관건
“누가 제공을 하느냐, 누가 시작을 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동반자란 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범죄 희생자에 대한 지원의 경우 정부가 재정지원을 하는 나라도 있다. 대만은 법무부 산하 단체가 정부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는데 아주 잘 하고 있다. 자메이카도 그와 비슷하다. 알바니아는 희생자가 경찰일 경우에 한해 정부지원이 있지만 민간인에 대한 지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교도행정개선이나 피해자 보호 및 보상 프로그램 등의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정부의 노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동일한 의제에 대해 시민단체들이 같은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유럽연합이사회의 사형전문위원으로 아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을 방문했다. 사형폐지 운동으로 볼 때 최악의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최악의 나라는 없다. 사형제도가 폐지된 지 35년이 넘는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으로 수세기 동안 사형제도가 지속돼온 나라에 가서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다. 나라마다, 사회마다 상황이 다르고 그 나름의 특수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구소련처럼 초기 민주주의 단계의 나라를 보고 나의 학생들에게 누누이 강조한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인권을 절대로 당연시하지 말라고.”
피해자 가족의 감정과 판사의 판단은 구별돼야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해오는 동안 그는 사람들로부터 ‘만약 당신 가족 중의 누군가가 희생되더라도 사형시키지 말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당연히 여러 차례 받아보았다.
“당장은 그 범죄자를 죽이고 싶고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나로서도 들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의 감정과 나중에 법정에서 판사의 판단과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영국에서는 최근 마이라 힌들리(60세)라는 한 여자죄수의 죽음이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힌들리는 애인과 함께 5명의 어린이를 죽인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36년째 수감생활을 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악의 화신’으로 일반인의 뇌리에 새겨진 힌들리는 오랫동안 영국 행형제도의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되어왔다.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여론 때문에 그의 가석방 탄원은 번번이 기각되었다.
“사형제를 대체하는 것이 종신형이지만 종신형에 대한 재심의 가능성이 봉쇄된다면 너무나 가혹한 것이다. 힌들리의 경우 한 달만 더 살았더라면 아마 가석방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피해자의 가족들이 사형을 찬성할 것이라고 짐작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형은 피해자들에게조차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힌들리에게 어린 아들을 빼앗긴 부모의 슬픔과 고통이 살인자의 죽음으로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범죄자를 처형하는 것으로 법을 실천하고 있다고 내세우기보다는 피해자 보호와 치료라는 서비스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짓는 사람들은 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을 죽이는 게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법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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