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살며 사랑하며...


땅과 집은 최소한의 사용료만 내고 빌려쓰다 돌려주는 것이 되어야 옳다. 그런데 오늘날은 땅과 집이 사고 파는 상품이 되었고, 나아가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개발"이나"발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파괴"를 통해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 현실이다.

처음으로 집을 짓던 과정에서 곰곰이 생각했던 점을 하나 하나 정리해보기로 한다. 오늘은 땅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아내와 함께 시골에 살기로 마음먹고 97년 여름부터 슬슬 땅을 보러 다녔다. 중개인이 소개하는 대로 충남 조치원읍 근처를 둘러보았다. 몇 군데 다녔는데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터를 잡은 서당골은 올라가는 길이 좁은 농로라 불안했으나 들어가서 보니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앞은 트여 있고 멀리 기차 지나가는 것도 보이고 읍내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더 망설이지 않고 사기로 결정해버렸다. 밭 500평.

난생 처음 산 땅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식으로 땅을 사고 파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집도 마찬가지다. 옛날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던 땅을 영국 이주자들이 때로는 사들이고 때로는 강제로 빼앗기도 해서 오늘의 미국이나 캐나다가 세워진 역사를 생각하면, 땅을 산다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이다.

당시 인디언 추장은 이런 편지를 썼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일정한 공간이 주어져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땅과 집이다. 죽으면 두고 간다. 마치 기차 타고 여행하는 손님처럼 자기 자리를 비워두고 내려야 한다. 그래서 땅과 집은 최소한의 사용료만 내고 빌려쓰다 돌려주는 것이 되어야 옳다. 그런데 오늘날은 땅과 집이 사고 파는 상품으로 되었고 나아가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개발’이나 ‘발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파괴’를 통해 돈벌이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인 만큼 인디언 추장의 말은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우리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달라.” 마음에 드는 땅이나 집을 보고 대뜸 “평당 얼마예요?” 묻는 사람들이 나는 밉다. 땅은 거룩한 것이며 우리 삶의 근원적인 그 무엇이다.

추장은 이어 말한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우리 집 주변에 날아다니는 까치와 비둘기, 더러운 물을 정화해주는 연못가의 개구리… 이 모든 것이 생명의 그물망을 이룬다. 나는 그 그물의 한 코일 뿐이다.

추장은 이어 “우리는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나는 땅 주인으로부터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은 없지만 마음 속으로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항상 그런 마음으로 살겠노라고.

그래서 집을 지을 때에도 되도록이면 화학재나 시멘트를 쓰지 않고 자연재를 써서 나중에 허물어지더라도 모두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했다. 생활하수도 내 땅 안에서 정화해 내보내려고 했다. 서당골은 복사골로 불릴 정도로 복숭아 과수원이 아래위로 펼쳐져 있고 그 중간에 층층논이 자리한 아름다운 곳이다. 내가 산 땅은 윗쪽이다. 나는 ‘내셔널 트러스트’가 아니라 ‘퍼스널 트러스트’를 통해 서당골의 자연적 아름다움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써 땅을 사고 파는 꺼림칙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씻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이곳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수천 평에 이르는 층층논의 주인은 내가 집 짓고 사는 것을 보고 중장비를 써 자기 논을 사그리 밀어버렸다. 그 논 주위에 있던 복숭나무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논 대신 넓은 벌판이 주택 착공을 기다리며 뒤숭숭하게 서 있다.

우리 집 바로 옆 산비탈의 복숭아 과수원도 올해 안으로 사라질 것 같다. 집 아래쪽의 조그만 호수 뚝방도 앞날이 불투명하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 해도 우리 집에서 500m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좋은 이웃이 몇 집 더 들어왔으면 하는 게 내 욕심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서당골이 돈벌이 중심으로 ‘개발’될 것 같아 못마땅하다. 내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다른 이들이 ‘개발’ 욕심을 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해서 서당골 파괴의 원흉이 바로 나라는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땅을 산 뒤 나는 주말농장 삼아 텃밭을 일구었다. 씨를 뿌리는 대로 싹이 올라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아이들은 물론 나와 아내도 비로소 흙과 채소, 벌레, 물, 햇볕, 공기 등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놀라움, 두려움, 신기함, 새로움…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느껴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마산에 계신 부모님도 서둘러 모셔오고 싶었다. 지금 저지르지 않으면 영원히 못할 것이라는 예감도 들었다.

98년 한 해 집 지을 준비를 했다. 집을 짓기 위한 행정 절차를 밟는 일과 목수 및 자재 구하기가 주요 과제였다. 자연녹지의 일부를 대지로 형질 변경하는 일은 다소 복잡했으나 측량설계사무소를 통해 그럭저럭 마쳤다. 집을 지을 목수인 김용빈 씨는 충북 청원군 귀래리로 귀농한 신동혁 씨로부터 소개받았다.

귀래리에 갔다가 아담한 귀틀집을 맞닥뜨린 순간 ‘바로 이거다’란 느낌이 강하게 왔다. 한옥을 짓더라도 위세등등한 기와집보다는 아담한 토담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사람이 집의 권위에 눌려서는 안 된다고 믿어서다.

귀틀집은 뼈대집과 달리 통나무를 눕혀 가로세로가 엮이게 벽을 짜면서 그 틈으로 흙과 짚을 이겨 넣는다. 김 목수의 고향인 강원도에서 이런 집을 많이 지었다 한다. 흙과 나무, 돌로 짓는 집, 아내와 나는 우리가 찾던 집이라며 기뻐했다.

그 집의 기본 설계도를 약간 변형해 우리 집 설계도를 대충 그리고 김 목수와 상의하며 조금씩 고쳐나갔다. 이 과정 하나 하나가 스스로 집 짓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돈 있다고 남 시켜 지은 집 열쇠만 넘겨받아 들어가 사는 것도 ‘불경’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
2003/02/25 00:00 2003/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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