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노동자들, "현대판 노비문서" 없애야


택시회사에 떠도는 블랙리스트가 있다. 이 명단에 오르면 동종업계의 취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혹 취업이 된다해도 사흘을 넘기기 어렵다. 택시기사들은 이 블랙리스트를 "현대판 노비문서"라 부른다. 택시노동자들은 이 "노비문서"로 노조활동에 제약을 받는다며 울상을 지었다.

“21세기 노예제도 택시문제 개선하라!”

영업용 택시 기사였던 박완섭 씨(39세)는 이런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3월부터다.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나와 다른 회사에 재취업을 시도했지만 가는 곳마다 정확히 사흘만에 등을 떠밀려 나와 결국 청와대 앞에 왔다. 그는 재취업이 안 되는 이유가 노조활동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노조활동경력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취업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95년 박씨가 취직한 서울 강서구의 A택시 회사 노조는 당시 민주노총 산하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이하 민택) 소속이었다. 2001년 그는 노조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회사 쪽과 가까운 후보에 패했다. 새 위원장이 민주노총 탈퇴를 들고 나오자 박씨는 반기를 들었다. 회사측은 얼마 안 있어 직원들에게 회사 이전계획을 통보했다. 이사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직원들과 회사로부터 이런 저런 압력을 받은 30여 명이 회사를 나왔다. 하지만 회사는 이전하지 않았다. 거짓으로 회사 이전을 통보해 껄끄러운 사람들을 내보내는 것은 택시업계의 고전적인 노무관리수법이다.

‘골치 아픈 사람’ 리스트 실체 있어

지난해 8월 회사를 나온 박씨는 넉달 뒤 같은 지역에 있는 B택시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들어간 지 사흘만에 회사는 “미안하지만 다른 데 알아봐라. 사장결재가 안 났다”며 채용을 거부했다. 구청에 진정서를 냈지만 정식으로 취업이 되지 않았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일한 적 없잖아요”라는 말뿐이었다. 올 2월 이력서를 낸 같은 지역의 C회사도 일한 지 사흘이 지나 입사불가를 통보해왔다. 박씨는 “사업주들끼리 틀림없이 리스트를 돌리는 것이다. 민주노총 조합원은 쓰지를 않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서울 258개 택시회사 중 230여개 사가 가입한 한국노총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소속인 C회사 조합원들 역시 ‘속썩이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사업주들끼리 당연히 나누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조합 부위원장을 맡았던 탓에 역시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던 한 택시기사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는가. 사업주들끼리 술자리에서라도 골치 아픈 사람들 명단이 오고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박씨를 비롯한 대다수 조합원들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뭔가’의 실체는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택시회사의 인사노무 관계자는 “블랙리스트는 실제로 있고, 나도 가지고 있다”고 실토했다.

“서울의 각 지역마다 사장단 협의회가 있습니다. 친목모임 겸 공통의 관심사를 의논하는 모임이죠. 사무실을 따로 두지 않고, 협의회 회장이 공문을 만들어 보냅니다. 그 모임을 통해 사업주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거죠.”

그에 따르면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기준은 두 가지다. 일을 열심히 했는지와, 노조활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다. 사업장 노총이나 그 상급단체에서 간부 경력이 있으면 당연히 명단에 오른다. 상급단체에는 있지 않았어도 단위노조활동, 그 중에서도 민주노총 활동에 열심이었다면 ‘골치 아픈’ 급으로 분류된다.

“사장들이 누구누구 이름을 거론하면서 골치 아프다고 다른 회사 사장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그 이름이 공유되면서 리스트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우리 회사는 지금 40여 명 됩니다. 예전부터 쌓여온 거죠.”

택시노동자들, 택시운전자격증에 의혹 제기

택시 노동자들은 택시운전자격증이 블랙리스트 기능을 하는 게 아닌지 의문을 품고 있다. 기사들이 ‘노비문서’라고 불러왔던 취업카드가 88년 택시 노동자들의 거센 반대로 사라진 뒤 92년 정보화의 물결과 함께 등장한 것이 택시운전자격증이다. 당시 취업카드에는 택시노동자들이 거쳐온 회사들의 이름이 적히고 이와 함께 또 다른 표시 하나가 있었다.

80년 택시회사에 입사하여 85년 노조활동을 시작한 전 민택 조직국장 박채영 씨는 “노조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취업카드에는 ‘보류’를 뜻하는 ‘ㅂ’이 찍혀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그가 갖고 있는 택시운전자격증에는 주민등록번호와 자격증번호가 명시되어 있다. ‘92-01-○○○○○’. 맨 앞의 숫자부터 차례로 자격증취득연도, 서울지역, 기사일련번호를 뜻한다. 퇴짜맞은 이력서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 그는 자격증 번호에 의혹을 제기했다. “컴퓨터에 주민등록번호만 넣어도 이 번호가 나옵니다. 내가 어느 회사에 있었는지도 나오고. 지금은 4대 보험에도 다 입력되어 있어서 과거 이력이 고스란히 나와요.”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조활동을 해온 그이지만 생업을 이어가기는 녹록치 않았다. 92년 사업주의 교섭위원 매수사건에 반발해 시위를 벌이다 해고당한 뒤 그가 이력서를 내민 곳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일하려는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갈 데가 없어서 여길 오시려고 합니까”라는 비아냥부터 “야, 너 장난하려고 그래!”라는 시비까지 다양했다. 생계수단이 되어주어야 할 자격증이 그에게는 취업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택시운전자격증을 발급하는 서울택시운송사업조합의 인력개발부 관계자는 이 같은 의혹을 부인한다. 자격증 번호는 자료 관리용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노동자가 회사를 옮길 때는 기존 자격증을 반납하고 새 자격증을 발급 받아야 하는데 재직회사에 대한 기록 관리를 운송사업조합이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사업주가 신입사원을 고용할 때 이곳에 신청하는 택시운전자격증명신청서에는 전 소속업체, 퇴직업체, 자격증 반납여부 등의 항목이 들어 있다. 말썽 많았던 취업카드를 대체한 택시운전자격증이 노동자들의 손발을 묶는 블랙리스트 기능을 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업용 택시 노동자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이들이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한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노조는 대체 무얼 하는가?”라고 물으면 “노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회사에 애착이 있는 사람들이고, 대부분은 언젠가는 떠날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회사에 아예 무관심하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누구나 떠나고 싶은 직장을 머무르고 싶은 직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조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택시 노동자들을 회사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려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김선중(참여사회 기자)
2003/05/01 00:00 2003/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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